한명회는 "군인 같은 성격"?

1000만명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특집 2편

by 지구본 여행기




요새 가장 장안의 화제인 사건이 2개가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이란vs미국 전쟁이요, 내부적으로는 바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국제적으로 영화 산업계가 죽어가는 이 상황에서 선전하여 1000만명 영화가 기정사실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특집 2편으로 메인 빌런인 "한명회"의 냉혹하고 철저하며 군인 같은 성격은 실제 영화 속에서만 그런지 아니면 실제로도 그런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명회는 1415년 태종 15년에 출생했습니다. 그의 가문은 조선 역사에서 꽤나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대단한 가문인데 특히 할아버지 한상질은 당시 세계 패권국이던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이라는 국명을 윤허 받는 데에 일조할 정도로 명망 높은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칠삭둥이였습니다. 성종실록 209권 성종 18년 11월 14일 기록된 그의 졸기를 보면 어린 시절 모습이 키가 몹시 작고 왜소하여 장성할 수 있을지 주변에서 걱정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난쟁이" 같았다는 점입니다.


부모를 일찍 여읜 탓에 가난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나 어려서부터 기개가 남달랐고 범상치 않은 포부를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조선인들의 평균 성인 남성의 키가 159cm쯤인 것을 감안하면 한명회는 청년으로 성장했어도 159cm보다는 훨씬 더 작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하지만 당시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의 키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159cm면 작긴 했어도 그 당시 아시아에서는 꽤나 큰 키를 가진 남성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유교 엘리트가 거치는 문과 시험에서 항상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요새로 치면 경찰공무원이나 군무원 시험에서 항상 떨어졌다고 봐도 됩니다. 38세가 되기까지 시험에 낙방하며 무명의 세월을 보낸 그는 결국 조상의 공로(전쟁이나 국가 건설이나 발전에 이바지 등)로 관직에 오르는 음서 시스템을 통해 경덕궁의 궁지기라는 하급 관리직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경덕궁의 궁지기는 의외로 한명회 역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공직이 되는데 비록 그는 군인 출신이 아니지만 궁지기는 궁전에 출입하는 군인들이 혹시나 반란을 일으킬 지를 항상 철저하게 감시하는 그런 관리직이라고 볼 수 있기에 그는 궁지기직을 수행하면서 나중에 훗날 군부 쿠데타의 주인공들이 되는 군인들과 인맥이 닿게 됩니다.


여하튼 이를 통해 볼 때 그는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천재라기보다 현실 정치의 흐름을 읽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실전형 제독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성리학적 지식은 부족했을지 모르나 인간 심리를 파악하고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는 정치적 직관력만큼은 당대 최고였다고 분석합니다.


물론 한명회는 군인은 아닙니다. 그는 문관으로 관직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직접 칼을 들고 전장에서 적군을 베어 넘기거나 무술 실력을 뽐냈다는 기록은 역사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그의 행적을 보면 그는 전선에서 싸우는 무사가 아니라 후방에서 작전을 짜고 명령을 내리는 참모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가 호방한 군인처럼 비치는 이유는 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거친 군인들을 포섭하고 그들을 수양대군의 수하에 두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군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언어로 소통할 줄 아는 성격이었으나 본질은 정치가이자 행정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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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1453년 군부 쿠데타의 계유정난의 핵심 설계자였습니다. 수양대군을 군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반대파인 조선의 군권,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김종서 장군과 이징옥 장군, 황보인 등을 제거해야 됐고 그들을 제거할 살생부를 작성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한명회는 당시 권력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자신이 선택한 수양대군에게 구체적인 군부 쿠데타 방법과 군인들 포섭 계획을 제안했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어린 소년왕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죽이는 데 앞장섰다는 점에서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선택한 주군에게는 철저히 충성하며 권력의 중심부에서 세조의 통치를 견고하게 뒷받침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성격은 날카롭고 과단성이 있었습니다. 비록 의복은 유생의 의복을 입었으나 마음가짐은 군율을 중시하는 군인과 같았습니다. 계유정난 당일 주저하는 수양대군에게 단호하게 군부 쿠데타를 실행할 것을 촉구하거나 반대 세력을 처단할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모습에서 그의 냉철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그는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데 능했고 정국이 혼란스러울수록 더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대담함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그를 단순히 글 읽는 선비가 아닌 권력의 핵심에서 정국을 주도하는 실권자로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한명회는 군부 쿠데타의 선두에서 군대를 직접 이끈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모든 작전을 총괄한 총사령관인 수양대군의 참모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홍윤성과 양정 같은 전쟁을 잘하는 군인들을 전방에 배치하여 수많은 정적을 제거하게 했습니다. 단종의 폐위와 영월 유폐 그리고 최종적인 죽음의 과정에도 그의 정략적인 판단이 깊게 개입되어 있습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단종이 살아있는 한 세조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며 단종의 사사를 주장한 세력의 중심에 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명회는 직접 손에 피를 묻히기보다 시스템과 명분을 만들어 상대를 제거하는 방식을 취했기에 훨씬 더 용의주도한 것입니다.


한명회는 살아생전 영의정을 지냈으며 조선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73세라는 장수를 누리고 1487년에 편안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생전의 모습만 본다면 그는 비참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비극은 사후에 찾아왔습니다. 1504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당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체의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를 당했습니다. 연산군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죽어 땅에 묻힌 그의 시신이 날카로운 창날 끝에 꽂혀 시장에 내걸리는 수모를 겪었으니 이는 역사적으로 가장 비참한 사후 처벌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2026년 개봉한 1000만명 영화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 한명회는 실존 인물이 가졌던 권력욕과 치밀함을 극대화했습니다. 실제 역사의 한명회가 장기판을 두듯 국가 정세를 조종했다면 영화에서는 직접 소년왕 단종을 압박하기 위해 유배지 근처까지 영향력을 뻗치는 직접적이고 칼날로 위협하는 악역으로 등장합니다. 한명회는 국가 시스템을 구축한 유능한 권력자이자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냉혈하고 사악한 면모도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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