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라는 나라가 처음 독립을 선언했을 당시 그들에게는 바다를 지킬 힘이 전혀 없었어요. 독립 전쟁 기간 중에는 대륙 해군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에 대항하긴 했지만 싸움이 끝난 뒤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미국 의회는 약 1785년쯤에 마지막 남은 선박인 얼라이언스 호를 매각해버렸어요. 이로 인해 미국은 해군이 단 1척도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지요.
그 시기에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의 바르바리 국가들 즉 알제와 튀니스 그리고 트리폴리와 모로코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바르바리 수적"들이 미국 연안들을 노리기 시작했어요. 과거에는 미국은 영국 수군의 보호를 받거나 프랑스 왕국과의 우방인 덕분에 안전했지만 독립 이후에는 어느 나라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약소국 신세가 된 것이지요. 약 1784년쯤에 마리아 호와 도핀 호가 알제 수적에게 나포되면서 미국인 선원들이 노예로 잡히는 슬픔이 시작되었어요.
바르바리 수적들은 단순히 물건을 훔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백인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인신매매를 주 수입원으로 삼았어요. 당시 기록에 의하면 미국인 남성 선원들은 가혹한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여성 포로들은 지중해 연안의 노예 시장에서 거래되거나 현지 통치자들의 하렘으로 보내져 노예가 되는 고초를 겪었지요.
미국 정부는 이들을 구출하고자 많은 몸값을 지불해야 했지만 수적들은 갈수록 더 큰 액수의 공납금을 요구했어요. 당시 미국의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금액이었고 이는 국가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지요. 결국 과거 동로마처럼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어요.
미국이 수군을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약 1793년쯤에 발생했어요. 포르투갈 왕국vs북아프리카의 알제 수적들 사이의 휴전이 성립되면서 대서양으로 나오는 길이 열렸고 알제 수적들이 단숨에 11척의 미국 상선을 추가로 나포해버린 사건이 벌어진거에요. 이로 인해 100명이 넘는 미국인 백인들이 노예로 끌려갔고 미국 경제는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지요.
미국인 여자 백인 성노예들에 관한 구체적인 상황은 당시 생존자들의 회고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예를 들어 1800년대 초반에 발간된 마리아 마틴의 수기 같은 자료들을 보면 수적들에게 붙잡힌 백인 여자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이 묘사되어 있어요.
로버트 데이비스의 연구에 의하면 19세기까지 약 100~ 125만 명의 유럽인과 미국인이 노예들이 바르바리 수적에 의해 노예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이들은 대부분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거나 운 좋게 몸값이 지불되어 고국으로 돌아갔지요.
토머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 같은 초기 지도자들은 수군 창설의 필요성을 혀가 닳도록 주장했고 특히 제퍼슨은 미국인들이 북아프리카 수적들의 노예로 살면서 공납금을 바치느니 그 돈으로 배를 만들어 수적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얘기했지요.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약 1794년쯤에 수군법이 통과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미 해군의 실질적인 탄생점이 되었어요.
미 해군은 처음엔 단 6척의 프리깃함을 건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어요. 헌법 호와 연합국 호 그리고 성좌 호 같은 이름이 붙은 이 배들은 당시 경제력으로는 좋은 화력을 자랑했지요. 약 1801년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된 뒤 트리폴리가 공납금 인상을 요구하며 선전포고를 하자 미국은 즉각 수군을 파견했지요.
이것이 바로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이에요. 스테판 디케이터 같은 인물들이 활약하며 적진의 배를 불태우고 수병대가 트리폴리의 해변 도시 데르네를 먹는 성과를 거두었지요. 이후 약 1815년쯤에 제2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미 해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북아프리카 수적들에게 더 이상 공납금을 내지 않게 되었고 비로소 수군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어요.
바르바리 수적과 맞서 싸운 미국은 뒤에 자국 상선을 보호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지요. 이 과정에서 탄생한 미 해병대는 지금까지도 그들의 군가에 트리폴리의 해안이라는 가사를 넣어 당시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어요.
미국의 사례와 매우 유사한 역사가 고대 한국의 신라에서도 발견됩니다. 통일 신라 시대에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은 국제 약탈조직인 일본 해적들의 침공이 거셌는데, 이들은 신라 백성들을 납치해 당제국(당나라)의 노예 시장에 팔아넘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는 미국의 바르바리 해적 사례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이에 해상왕 장보고 장군이 등장하여 흥덕왕에게 해군 1만 명을 요청했고 828년에 완도에 해군 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했습니다. 청해진은 단순한 해군 기지를 넘어 해적 소탕을 위한 전문적인 해군 본부의 역할을 했습니다. 장보고 장군은 강력한 함대를 조직해 서해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고 이를 통해 왜구의 인신매매를 근절시켰습니다.
미국이 해적 때문에 해군을 창설해 강대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듯이 신라 역시 장보고 장군의 청해진을 통해 동북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두 사례 모두 국가의 위기를 해군력 강화라는 정공법으로 돌파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