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스페인인들이 살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는 구석기시대의 알따미라 동굴 벽화에서부터 시작되요. 약 기원전 1100년쯤에 페니키아 사람들이 남부 해안에 교역을 위해 정착촌을 형성하며 바깥 사회와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후 그리스 사람과 카르타고 사람들이 뒤를 이었지요. 이 시절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베로 사람, 켈트 사람 등 다양한 원시 부족들이 거주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어요.
약 기원전 218년쯤에는 제2차 포에니 싸움을 계기로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의 최남부 일부에 들어오면서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지요. 로마는 이후 약 600년간 "히스파니아"의 최남부 일부를 조공국으로 다스리며 음식, 글자, 경제, 문화, 건축술 등 아름다운 로마 문화를 놓았어요. 이 과정에서 기존의 원시 부족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결국 로마의 경제력, 생산력, 행정력, 문화 수준으로 인해 동화 정책을 펴면서 무릎을 꿇었어요. 로마의 다스림은 히스파니아에 평화, 안정,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어요. 대규모 농장인 "라띠뿐띠움"에서는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생산하여 로마로 수출되었고 풍부한 자연 광물 자원은 로마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어요. 로마의 공중보건 시스템과 경제적인 수로 건설 등은 히스파니아에도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선사했지만 의료 혜택은 주로 부유층에게 집중되었어요.
이후 기원후가 되면서 고대시대로 접어들었어요. 고대시대의 세계 패권국가인 고대 중국 한무제vs흉노(匈奴)제국이 서로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하였고 결국 한무제에 의해 밀린 흉노제국이 분열되면서 그 일파인 훈족이 서구에 등장하게 되요. 훈족의 아틸라는 훈제국을 세우고 서유럽의 부족들을 공격하여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키고 더 나아가 로마제국까지 침공하면서 로마제국이 쇠퇴하게 되었고 이렇게 막강한 훈족의 침공을 피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여러 부족들 중에 서고트족이 5세기 초에 이베리아 반도에 서고트 왕국이라는 왕국을 만들었어요. 서고트 왕국은 로마의 행정 체계를 일부 가져왔지만 왕위 승계를 둘러싼 내부 분열로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었지요.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711년에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이슬람교는 무서운 여세로 북아프리카로 전파되었고 그렇게 전파된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들이 마치 일본 왜구처럼 지브롤터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했어요. 그 시절의 서고트 왕국은 내분으로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였기에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안 됐었고 무어인들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불과 몇 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이슬람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이에요.
이로써 약 800년에 걸친 이슬람 식민 지배 시대.. 즉 스페인의 오욕의 역사 시대인 "알안달루스" 시대가 열렸어요. 711년쯤 이슬람 무어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하여 알안달루스(Al-Andalus)라 불리는 다문화 왕국을 세웠던 것이지요.
이 시절의 영향으로 인해 스페인에는 은근히 이슬람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게 다 이슬람이 스페인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생긴 잔재들이에요. 특히 "알함브라"는 그라나다에 있는 무어인 이슬람 임금님의 건축의 걸작으로 약 14~16세기쯤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이 시절 코르도바 대모스크 같은 큰 공공건축이 만들어지고 페르시아와 아랍식 관개인 "아세키아"를 도입하여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어요. 무어인 식민 지배기에는 농경과 어업이 번성했고 로마 시대 관개시설을 수리한 새로운 수로가 만들어져 무더운 지대가 비옥한 농경지로 변했어요. 이 시기에 유대인과 기독교인도 비교적 포용 속에서 서로 착하게 살았고 다언어, 다문화 사회가 형성되었어요.
(나) 스페인의 중세 시대(이슬람인들이 스페인을 800년간 식민 지배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중세시대로 접어들면서 먼 미래의 12세기,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적 패권제국이었던 몽골제국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세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패권국"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렇게 몽골제국의 세계 패권기인 13세기에 몽골제국이 당시 전세계의 모든 이슬람 제국들 중 가장 군사력이 강력했던 아바스 제국, 호라즘 제국까지도 모조리 다 정복해버리자,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약한 편에 속했던 이베리아 반도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무어인들의 왕국들은 약화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당시 지구상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가장 고립된 장소가 된 남유럽에서는 알안달루스의 크리스티안 왕국이 독립운동인 "레꽁끼스따(레콩키스타)"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이슬람인들은 점차 북쪽으로 이주하여 결국 그라나다 왕국이라는 무어인의 왕국만 남게 되었어요. 약 1260년경에는 그라나다 왕국을 제외한 대부분 영토가 독립됐어요.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는 날에 레꽁끼스따는 완료되었고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인해 통일 "스페인 왕국"이 탄생했어요.
알안달루스.. 특히 "후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던 꼬르도바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였어요. 이슬람 문명은 유럽보다 훨씬 발전된 수학, 과학, 의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우월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훗날 유럽 르네상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관개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었어요. 이슬람 식민 통치하의 스페인은 기독교인, 유대인,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였지만 이들의 관계가 800년간 항상 평화로웠던 것만은 아니었어요. 비이슬람교도들은 "딤미"로서 일정한 조세를 헌납하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를 일부 허용받았지만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했거든요.
게다가 이 시절은 이슬람 사회가 스페인을 식민 지배하였기에 여성 지위는 전반적으로는 이슬람풍 가부장적 질서 아래 남성에게 종속된 삶을 살아야했어요. 물론 본토인 이슬람 왕조와는 달리 스페인에서는 성(性)에 대한 담론은 비교적 개방적인 편이었으나 여성의 성적 순결은 조선시대처럼 엄격하게 통제되었지요.
(다) 스페인의 대항해시대(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드디어 짧은 황금기를 누리다)
스페인 왕국의 여왕
약 1469년쯤에 까스띠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뻬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스페인 통합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이들은 약 1492년쯤에 스페인을 식민 지배하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수도 그라나다를 탈환하며 레꽁끼스따를 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탄생시켰어요. 그리고 같은 해에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에 오면서 스페인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지요.
고대시대부터 약 800년에 걸친 이슬람 무어인들이 스페인을 식민 지배한 기간을 마침내 "국토 회복 운동"으로 벗어난 스페인은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인해 통일 "스페인 왕국"이 탄생하였고 약 1492년쯤에 콜럼버스가 항해를 하면서 서인도 항로를 개척하면서 신항로를 개척하여 남아메리카를"발견"하면서 스페인 왕국은 곧 물로 흥한 물의 왕국이 되었던 것이었어요.
스페인 왕실은 1524년 미노르카 지방과 이탈리아 남부, 남아메리카의 구석기~신석기시대 수준의 미개인 문화인 잉카, 아즈텍을 다스렸어요. 16세기 초부터 에스빠냐 왕국의 탐험자들은 남아메리카의 원주민을 먹으며 땅을 빼앗았는데 그 과정에서 스페인인들이 알몸으로 살아가던 구~신석기 수준의 잉카 여자, 아즈텍 여자, 남아메리카 원주민 여자들을 성폭행하거나 임신시키는 등의 성적 착취들이 스페인의 기록에까지 자주 언급될 정도로 매우 매우 빈번하게 이루어졌어요. 예를 들어 1519년 꼬르떼스의 탐사대는 캐리브해 열대 섬의 섬주민들에게서 20명의 여성 노예들을 선물로 받았고 그 가운데 나우아어, 스페인어를 잘 배웠던 "도냐 마리나(말린쩨)"라는 여성이 꼬르떼스의 성노예였다가 아내가 됐다가 통역사처럼 일을 했지요. 남아메리카의 원주민 여자들은 스페인인들에게 납치되거나 종속되거나 스페인 시장에 팔리는 처지에 놓였어요.
이렇듯 잉카, 아즈텍 스페인 지배의 역사는 남아메리카 원주민, 잉카인, 아즈텍인 여자들에게 성적 착취와 성폭력으로 얼룩져 있어요. "꽁끼스따도르"들은 남아메리카 원주민 여자들을 성적 착취하고 유럽에서 건너온 전염병은 남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를 급감시켰지요. 특히 알몸으로 생활하던 구~신석기인들이던 남아메리카 원주민 여자들에게 하는 성적 착취는 굉장히 길고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지요. 스페인 사람들은 성욕의 해소를 위해 알몸의 남아메리카 원주민 여자, 잉카 여자, 아즈텍 여자들을 밥먹듯 심심하면 납치하고 성폭력을 일삼았고 성노예로 삼으며 임신시키거나 스페인 시장에 팔아넘겼고 이는 수많은 남아메리카 원주민 여자, 잉카 여자, 아즈텍 여자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아기를 임신하면서 "메스티쏘"라는 새로운 인종 집단의 탄생으로 이어졌어요. 이렇듯 스페인 사람들의 남아메리카 원주민 여자, 잉카 여자, 아즈텍 여자 성폭력과 성노예 시스템을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 신부와 같은 일부 성직자들이 고발하고 처우 개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남아메리카 잉카, 아즈텍에서 널리 행해지는 스페인 사람들의 성폭력들을 줄이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이렇게 경제력이 발달하게된 스페인 왕국은 필리핀으로 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1521년 필리핀에서는 막탄 섬의 라뿌 라뿌라는 이름의 사람이 데리고 있는 석기시대 수준의 필리핀 원주민들이 탐험자인 마젤란과 싸워 이겨 그를 죽였어요. 게다가 남부의 술루 왕국은 스페인과 끊임없이 전쟁하였고 스페인은 술루 왕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면서 끝내 술루 왕국을 먹는데 실패했어요. 남미에서도 아즈텍과 잉카가 스페인에 패배하기는 했으나, "슬픔의 밤(La Noche Triste)"과 같이 아즈텍 원주민들이 스페인인들과 싸워 이긴 싸움들도 많았어요.
어쨌든 이렇게 "신대륙 발견"은 스페인 왕국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어요. 아즈텍과 잉카를 차례로 먹은 스페인 왕국은 포토시 은광에서 채굴된 막대한 양의 보석들을 본토로 실어 날랐어요. 이런 경제 발전으로 인해 스페인 왕국은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으로 부상하며 "황금기(Siglo de Oro)"를 맞이하면서 글로벌적인 경제 왕국으로 성장했어요.
하지만 이 황금기 시절의 스페인 왕국(에스파냐 왕국)보다 훨씬 더 강한 제국이 있었습니다. 바로 명나라입니다. 당시의 명나라는 압도적인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명나라"는 세계 1위의 군사력과 안정된 통치 체제,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으며, "몽골계 티무르"를 계승한 "무굴 제국" 역시 막대한 영토와 부를 유지한 제국이었으며, "세계 최강 제국"의 자리는 명나라에게 넘겨주긴 했으나 여전히 오스만 제국보다도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한 "북원제국(北元, ᠤᠮᠠᠷᠳᠤ ᠶᠤᠸᠠᠨ ᠤᠯᠤᠰ)"과 "몽골계 오이라트 제국", 그리고 초기까지는 "세계 최강의 패권제국 대몽골제국"과 "몽골계 티무르 제국"의 식민지로 잠시 전락했다가 해방된 이후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오스만 투르크(오스만 제국) 역시 지중해에서 강력한 패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1위의 군사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가진 명나라와 명나라의 군사적 라이벌인 북원제국과 오이라트 제국, 막대한 영토와 부를 유지한 무굴 제국, 한때는 몽골계 티무르 제국이 훨씬 강했으나 티무르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앙카라를 정복하면서 몽골계 티무르 제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던 오스만 제국이었으나 여전히 유럽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 스페인 왕국은 국방력, 기술력, 인구, 생산력에서 모두 열위에 있었습니다. 예컨대, 17세기 초 무굴 제국은 세계 GDP의 약 23%를 차지하며 중국을 넘어설 정도였고, 명나라는 동시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왕국은 비록 황금시대에 신대륙의 은과 향신료로 경제적 부를 누렸으나, 그 규모와 군사력은 명나라, 북원제국, 오이라트 제국, 오스만 투르크, 무굴 제국들 만큼의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스페인 왕국의 힘이 남아메리카 지방에서 유입되는 경제력에 크게 의존했던 비정상적인 경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후술하겠지만 스페인 왕국이 아주 잠깐 흥했다가 바로 망한 것도 이런 비정상적인 경제 시스템으로 인해 파산이 나면서 결국 망해버렸습니다. 명나라와 스페인 왕국이 "은"으로 국제 무역을 주도할 때도 명나라는 계속해서 경제적 이득을 차지했는데 스페인 왕국도 처음에는 손해를 보진 않았으나 점차 손해를 보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약 1520년쯤에는 멕시꼬의 띠노찌띠뜰란이란 곳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이 기독교 축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불청객(스페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인 아즈텍 사람들이 와서 스페인 사람들을 죽이는 "라 노쩨 뜨리스떼(비애의 밤)" 사건이 벌어졌어요. 이 과정에서 아즈텍 사람들은 약 400명의 스페인 병사들과 4,000명의 스페인 사람들의 꼭두각시가 된 원주민들을 살해하며 스페인은 패배하였고 도망쳤어요. 이처럼 스페인이 아즈텍이나 잉카에게 패배한 적도 매우 많았어요.
약 1537년쯤에는 잉카 국왕인 만코 잉카라는 사람이 올란따이땀보 싸움에서 스페인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어요. 이 싸움에서 잉카군은 땅을 물로 잠가 스페인군을 괴롭혔고 결국 활과 총, 대포 같은 원거리 장비들로만 무장된 스페인군은 크게 패배했고 100여 명만이 병력을 유지한 채 야밤에 도망치는 치욕을 겪어야 했어요.
이처럼 스페인 왕국은 남아메리카의 잉카, 아즈텍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연한 부정부패와 탐관오리, 그리고 잇달은 파산으로 생겨난 군사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점진적으로 망해갔어요. 게다가 유럽에서도 스페인 왕국은 네덜란드를 잠시 식민지로 만들었는데 1568~1648년에 터진 네덜란드 독립전쟁(80년 전쟁)을 치르면서 북부 네덜란드 지역을 상실했고 1648년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새로이 탄생한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해야할 정도로 많이 약해졌지요.
(라) 스페인 왕국의 망조와 끝없는 붕괴(아주 잠시 잠깐 흥했다가 바로 망하게 되다.)
게다가 스페인 왕국은 남아메리카의 잉카, 아즈텍을 먹었으나 말라리아 같은 열대 모기들로 인해 습하고 무더운 남아메리카의 내부 열대 지방들은 감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또 신석기시대 수준의 필리핀 원주민들과의 전쟁에서도 스페인 왕국은 7번이나 패배했으면서도 완전한 승리는 거두지 못했는데 특히 1521년 필리핀의 막탄 싸움에서 필리핀 원주민들을 다스리는 리더인 라뿌 라뿌가 탐사대를 이끄는 우두머리인 뻬르디난드 마젤란을 죽였고 이후 스페인 왕국이 7번의 패배 끝에 간신히 압도적인 경제력과 많은 인구수로 인해전술로 밀어붙인 끝에야 필리핀을 실질적으로 먹는데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북부의 민다나오의 무슬림 공동체인 술루, 모로족과의 전쟁에서는 계속 패배하면서 그 섬들은 끝내 먹지 못하고 독립국으로 계속 남았어요.
망조가 든 스페인 왕국의 패배와 붕괴는 끝도 없었어요. 까를 5세(까를로스 1세)와 뻴리뻬 2세의 기간 동안 아주 잠시 잠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국은 황금기를 만들었어요. 땅도 유럽(네덜란드 같은)은 물론 남아메리카, 필리핀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물의 왕국"을 건설했지요.
하지만 계속되는 당시 세계 패권국이었던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손해를 당하고 전쟁에서도 계속 패배하면서 스페인 왕국의 국가 재정은 날로 소모해 갔고 경제력도 약해졌고 경제력이 약해지니 당연히 경제력을 바탕으로 둔 국방력도 약해졌던 것이에요. 특히 스페인 왕국의 약화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80년 전쟁)이었는데 이 네덜란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스페인의 국력은 크게 소진하게 되었지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본래 스페인 왕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는 경제적 이유, 개신교라는 종교적 이유로 스페인 왕국에 봉기했고 오랜 독립운동 끝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을 쟁취하면서 스페인 왕국의 국력(경제력+국방력)이 크게 약화됐어요.
게다가 이렇게 스페인 왕국이 유럽 여기저기서 패배하면서 "맛집"으로 소문나고 동네북으로 추락하자 약 1588년쯤에는 스페인 왕국의 뻴리뻬 2세가 영국을 정벌하기 위해 보낸 "자칭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가 영국의 신흥 해병에게 크게 격파당한 사건은 스페인 왕국의 무적함대가 스페인만의 착각이었고 진짜 무적함대는 아니었단 걸 입증해주는 결정적인 반증이 되었어요. 또 이 스페인 왕국이 영국에게 패배한 사건은 스페인 왕국의 망조를 보여주는 결정적이자 상징적인 장면이 되기도 했어요. 이 패배로 스페인 왕국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남아메리카나 스페인 주변의 해상 패권까지 완전히 잃기 시작했고 이후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벌어진 "30년 전쟁"을 거치며 유럽의 주도권은 프랑스 왕국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면서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들에서 스페인 왕국은 완전히 빠지게 되면서 사실상 스페인 왕국은 국가는 존재했으나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중진국"으로 다시 추락해버렸어요.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남아메리카의 일부 지방에서 유입되던 은까지 스페인 왕국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국내 여러 경제 기반을 망가뜨리는 등 경제, 안보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어요.
게다가 18세기 초엽쯤에 "근친결혼"과 "근친상간"으로 유명한 합스부르크 왕실의 대가 끊기자 스페인 왕위 계승 논란을 생기면서 전쟁을 낳았고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이 스페인 왕국을 침입했고 그 결과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실의 뻴리뻬 5세가 왕위에 올랐고 이로 인해 스페인 왕국은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에게 스페인 본토의 최남부 땅인 "지브롤터(Gibraltar)"를 점령당했으며 결국 영국은 이 스페인 본토의 지브롤터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스페인은 지브롤터를 할양해야 했어요. 이로 인해 영국의 식민지로 스페인 본토의 지브롤터가 추가되었지요. 그렇기에 현재까지도 스페인은 본토의 지브롤터를 돌려받지 못한 채 현재까지 영국에게 땅을 반환을 요구하고 시도했지만 영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이 스페인의 땅은 영국령으로 남아 있어요. 게다가 이 스페인의 지브롤터(Gibraltar)는 영국이 가장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식민지"에요.
이렇듯 스페인 왕국은 술루 술탄국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였고 앞서 얘기한 스페인 본토 땅인 지브롤터를 영국의 식민지로 빼앗기고 1713년에는 포르투갈, 영국 연합군의 스페인 왕국 침입, 1805년에는 트라팔가 해전 같은 해전에서 패배하는 등 스페인 왕국은 싸우는 족족 패배하면서 이 과정에서 경제력이 심각하게 줄어들었고 그 결과 스페인의 해군, 육군은 완전히 약해지면서 "오합지졸"로 불리게 되었어요.
어쨌거나 이 시절의 스페인 왕국 사회는 가톨릭 교리와 "종교재판소(Inquisición)"의 다스림 아래 있었고, 금욕주의가 강한 조선시대처럼 동성애 등의 비규범적 성(性)은 종교적,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되고 처벌받기도 하는 등 사회적으로 보수적이고 폐쇄되었어요.
(마) 스페인 왕국의 근대 시대 초엽(망한 스페인 왕국에 침입해 학살한 나폴레옹)
스페인 황금시대에는 페루, 멕시꼬의 은광에서 막대한 은화를 수입하여 국내 경제가 급격하게 갑자기 급성장하면서 국방력도 잠시 올라갔으나 동시에 과도한 물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사치, 타락, 향락, 농촌의 붕괴 문제를 겪으며 국방력이 매우 떨어지게 됐어요.
남아메리카의 독립 운동도 이렇게 죽어가던 스페인 왕국을 완전히 약화시킨 계기였지요. 약 19세기 초엽쯤에 "시몬 볼리바르"라는 독립운동가의 주도로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속지가 연속적으로 독립을 얘기했고 스페인 왕국은 잇달아 이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대부분을 돌려받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약 19세기쯤인 약 1810년부터 1821년까지 이어진 멕시코 독립 전쟁과 남아메리카의 독립운동에서 스페인 왕국은 잇따라 패배하며 과달루뻬 이달고, 볼리바르 등의 독립운동가에게 항복해야 했고 이로써 스페인 왕국이 그나마 유지하던 남아메리카의 열대 지방은 단기간에 사라졌고 그에 따른 경제력과 국방력 축소 및 약화로 마지막 속지는 쿠바와 필리핀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이마저도 스페인 왕국이 오합지졸이 된 것을 확인한 미국이 약 1898년쯤에 스페인 왕국에게서 삥을 뜯어내고자 미서전쟁이 터졌고 거기서도 대패한 스페인 왕국은 쿠바, 뿌에르또리꼬, 필리핀같은 습하고 무더운 열대 섬을 죄다 미국에게 빼앗기면서 그나마 유지하던 "경제대국"이라는 별명도 빼앗겼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적도에 가까운 습하고 무더운 열대 섬인 필리핀을 다스리게 된 미국에 의해 현재 필리핀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기도 하고 미국의 음식이나 문화가 절대적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지요.
부르봉 왕조의 지도자들은 스페인 왕국에 계몽주의 이념을 삽입하고 행정, 경제, 안보 분야에서 억지로 개혁을 하게끔 만들었어요. 하지만 이러한 개혁마저 사치와 향락에 빠져 타락하고 방탕하게된 귀족, 귀부인들과 교회의 저항에 부딪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요.
약 19세기쯤인 약 1808년쯤에는 유럽의 강대국이던 나폴레옹이 약소국인 스페인 왕국을 침입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여기서 나폴레옹의 병졸들이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점령하자 이에 저항하며 스페인 사람들의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 결국 "스페인 독립 전쟁(펜인술라 전쟁, 이베리아 반도 전쟁, 반도 전쟁)이 터졌어요. 그리고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쁘 보나빠르뜨를 왕위에 앉혔지요. 프란시스꼬 고야는 이 스페인의 독립 전쟁 중 1808년 5월 3일 발생한 마드리드 봉기와 처형 장면을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란 그림으로 나폴레옹 병졸들의 만행을 고발했지요. 이 작품에서 고야는 나폴레옹 병졸들의 유린과 스페인 민중의 저항을 생생하게 그렸고 "독립기념관"에서도 이 사건과 그림에 대해 소개된 적이 있어요. 이 시절의 스페인 왕국은 아주 잠시 나폴레옹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대부분의 군대까지 잃고 흉가처럼 황폐화되었으며 결국 연합군과 북아프리카 정벌 실패 등 전쟁에서도 거듭 패배를 하였지요.
프란시스꼬 고야가 약 근대시대 19세기인 1814년쯤에 그린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는 근대시대의 나폴레옹에게 학살당하는 스페인의 비참함을 보여준다.
이 독립운동은 스페인 왕국에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겼지만 동시에 스페인 국민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스페인 왕국은 극심한 정치적 타락에 빠져들었는데 절대왕정을 복고하려는 권력자들과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까를로스 싸움같은 여러 차례의 내분으로 이어졌지요. 이렇게 약 19세기쯤에는 스페인 왕국에서는 봉기와 독립, 내분, 혁명이 반복되었고 정권은 수시로 교체되면서 국력은 끝도 모르게 추락하고 망해가고 있었어요.
약 1873년쯤에는 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인 "제1공화국"이 간신히 만들어졌지만 이마저도 내분과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1년도 채 되지 않아 붕괴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 시절의 산업화가 일부 지역에서 진행되면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 맞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벌이는 등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스페인 여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일부 여자들은 교육 기회를 요구하고 사회 개혁 운동에 참여하는 등으로 스페인은 침몰해갔어요.
(바) 스페인의 근현대 시대(끝이 없는 스페인의 흑역사)
근대시대인 약 20세기 초엽쯤에 스페인의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어요. 약 1931년쯤에 제2공화국이 탄생하여 여성 참정권 부여, 토지 개혁 등 진보적인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러한 개혁은 자주 지주, 가톨릭 교회 등 보수쪽의 격렬한 반발을 샀지요.
결국 약 1936년쯤에 쁘란시스꼬 쁘랑꼬라는 장수가 이끄는 파시스트 세력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스페인을 사실상 유럽에서 가장 최빈국으로 떨어뜨리고 1,2차대전 내내 다른 나라에게 점령이나 당하고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동네북이라고 알린 "스페인 내전"이 발생했어요. 약 3년간의 내분은 "인민전선(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진보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아나꼬 신디깔리즘, 그리고 까딸루냐 민족주의가 뭉친 좌파 모임)" 같은 공산주의가 짙은 공화파와 이에 저항하며 봉기하는 국민파 간의 이념 대결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과 국제여단이 스페인의 공화파를, 파시스트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스페인의 국민파를 각각 조종하면서 주변국들이 스페인에 마구 끼어들면서 어지럽혔던 대리전 성격을 띠었어요. 마치 오늘날 태국vs캄보디아 분쟁이 전세계적 초강대국인 중국vs미국의 패권 전쟁의 대리전들 중 하나로 보는 것처럼요. 여하튼 이 스페인 내전은 수십만 명의 사망자와 난민을 낳았고 스페인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 스페인을 아직까지 유럽에서 가장 "약소한 후진국"으로 만든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 남아있어요.
어쨌거나 이 내분에서 약 1939년쯤에 쁘랑꼬가 다스리는 국민파의 승으로 내분은 끝났고 이후 약 40년쯤 이어지는 북한의 김정은같은 쁘랑꼬의 사이비 종교스러운 독재 정치가 시작되었지요. 쁘랑꼬 정권은 극우 가톨릭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마치 조선시대 말기때처럼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어요. 그리고 이로 인해 진보하던 모계 사회와 같은 여성의 권리는 다시 후퇴하여 자유로운 성행위를 즐겼던 스페인 여자들은 이혼과 피임이 금지되고 여성의 역할은 "남자의 대를 잇는 임신, 출산의 도구"로 국한되었지요. 금욕주의가 강했던 남성우월주의적인 부계 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유교 성리학처럼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들은 "사회악"으로 규정되어 박해받았던 것은 덤이었지요.
여하튼 경제적으로 쁘랑꼬 정부 초엽에는 고립주의와 캄보디아의 폴포트의 크메르루주처럼 "자급 자족의 농업 경제"를 추구했으나 약 1950년대 후엽쯤부터는 해외 자본을 유치하고 경제, 지식 관료들을 등용하여 경제 개발을 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이로 인해 약 1960년대쯤에는 스페인은 반짝 "스페인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 회복을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그 이면에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 노동 운동에 대한 묵인이 있었지요.
(사) 오늘날의 스페인(민주화와 그 이후의 현재)
약 1975년쯤에 쁘랑꼬가 사망하면서 기나긴 독재가 물러나고 스페인에도 민주주의가 주입되기 시작하면서 스페인에서 민주화 운동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이는 후안 까를로스 1세 국왕이 독재자 쁘랑꼬의 후계자가 되리라는 예상을 깨고 민주화 운동을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약 1978년쯤에는 민주주의 헌법이 제정되었고 이후 스페인은 평화, 사회 치안 안정, 정치적 안정을 되찾고 유럽 공동체(EC, 현 유럽 연합 EU)에 가입하면서 오랫동안의 약소국, 후진국, 최빈국 생활을 마침내 청산하고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는데 성공했지요.
민주화 이후 스페인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어요. 모계 사회처럼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어 이혼과 피임이 다시 합법화되었고 약 2005년쯤에는 동성 결혼이 유럽에서 3번째로 합법화되는 등 성소수자의 권익도 크게 향상되면서 여성 인권과 복지, 성적 소수자 인권 보장에 앞장섰지요. 동성 커플의 양육권도 허용되었으며 동년 스페인은 가정폭력과 젠더 평등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여 국제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모계 사회와 같은 여성 권리 보호 시스템을 갖췄지요. 또 최근 조사에서 스페인은 성소수자에 대한 수용도가 매우 높아 LGBT 당사자 가족이 있다는 응답자 비율이 90%가 넘는 것으로 밝혀졌고 스페인 국민의 약 절반 이상이 자기를 페미니스트로 얘기할 정도로 여성우월주의와 젠더 의식이 높은 국가가 되었지요. 이는 20세기 후엽쯤부터 이어진 여성운동과 사회의 전반적인 자유화 정책의 성과로 평가되요. 그래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는 2023년 7월에도 대규모 프라이드를 벌이며 축제처럼 즐기고 스페인은 여전히 여성과 LGBTQ+ 시스템 선진국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이처럼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사회 전반의 성 평등 의식이 높아졌어요. 보건의료 시스템 역시 보편적 공공 의료 체계로 전환되어 모든 국민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지요.
게다가 오늘날의 스페인은 복지국가 시스템을 만들어 공공보건과 보건의료도 좋아졌지요. 예를 들어 국민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는 보편적 의료를 제공하며 평균수명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또 여성 건강 간호와 출산 지원, 성교육 등이 공공 보건 정책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지요. 한편 뽀스트쁘란꼬 시대 이후 스페인은 중산층이 확대되고 노동시장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과 교육 수준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어요.
하.지.만 이런 스페인의 변화는 "독"이 되기도 하고 있어요. 이렇게 과도하게 LGBTQ+, 페미니즘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현재 스페인에는 "여성우월주의"가 만연해 있고 뉴질랜드처럼 너무 페미니즘이 많아지면서 스페인 남자들은 역으로 차별받는 것도 현실이었으며 이로 인해 스페인 남자들이 주변국으로 도망가는 등의 사회적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어요. 게다가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보면 LGBTQ+, 페미니즘 같은 여성주의적인 정당들이 많았기에 이러한 성 문제에 관해서 여성쪽으로만 편향된 시스템들이 양산되고 있어요. 게다가 복지국가 시스템으로 사회적으로 좋아졌다곤 하지만 이 역시 혜택들이 처음에는 남녀 골고루 나눠졌다가 점차 여성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나타났고 과도하게 포퓰리즘적인 복지 정책을 남발하다 보니 복지나 여성 인권 자체로는 발전했을지 몰라도 국력의 척도 할 수 있는 "경제력"은 오히려 뒤떨어지면서 유럽에서도 큰 목소리를 내기 힘들 정도로 태국과 같은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현재 스페인의 경제 상황은 결코 좋지 못한 것도 사실이에요.
이렇듯 스페인은 여전히 여러 과제를 안고 있어요. 이렇게 경제력이 다시 뒤떨어진 스페인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채 스페인 경제에 더 큰 영향을 주었고 과도하게 높아진 여성우월주의에 의해 생겨난 낮은 남성 인권과 높은 청년 실업률은 여전히 스페인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어요.
게다가 스페인이 아주 잠시 잠깐 흥했던 시절이긴 하지만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 남긴 상처와 유산은 여전히 남아메리카를 안좋게 만들고 있어요. 스페인 사람들이 성욕을 참지 못하고 남아메리카의 수많은 잉카 여자, 아즈텍 여자, 브라질의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을 납치하고 감금하고 번식 성노예로 삼으면서 성폭행, 임신, 출산을 반복하게 하고 또 잉카 여자, 아즈텍 여자,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 가운데 몇몇은 스페인 시장에 팔아넘기면서 다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사람의 성노예가 되게 만드는 등으로 인해 "메스티쏘"라는 지금까지 없던 전혀 생소한 돌연변이 같은 인종을 탄생시켰고
특히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심하게 여자 성폭행 사건이 급증했던 곳이 쁘레시디오 일대인데 이곳 남아메리카 원주민 여자들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성폭력 사건이 급증하고 있어요. 여하튼 이로 인해 근대시대인 약 18~19세기쯤인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보고된 자료들에서는 남아메리카 사회에서는 19세기까지도 결혼, 가정, 불특정 남성에 의한 강간, 성폭행 사건들이 밥먹듯 일상처럼 벌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아니 19세기뿐 아니라 현재도 마찬가지에요. 현재도 지구상에서 성폭행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도 남아메리카이기도 하고 여성 납치, 인신 매매, 그리고 여성 노예 거래 등은 남아메리카의 마약 카르텔들에 의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게다가 남아메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성문화가 개방된 지역이기도 하지요. "베네수엘라"의 경우는 지구상의 모든 남자들이 성욕을 풀기 위해 오는 "성욕 창고"라고 불릴 정도로 성매매 관광국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으며 오죽하면 베네수엘라의 여자들이 할 수 있는 밥벌이 수단은 미녀 페스티벌에 참가하거나 유흥업소에 몸을 파는 매춘부가 되는 것뿐이에요. 베네수엘라가 미녀의 왕국이라는 타이틀에는 이런 슬픔이 숨어 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남아메리카나 미국의 많은 유흥업소에는 베네수엘라 출생의 창녀들이 가장 많다고 해요.
이처럼 스페인은 본토도 심각한 사회 문제가 많지만 스페인이 아주 잠시 잠깐 다스렸던 남아메리카에서도 이렇게 개방적인 성문화와 불법 성매매 관광이 성행하는 등 스페인 왕국의 안좋은 유산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볼 수 있지요.
여하튼 이렇게 스페인의 역사를 보면 스페인은 여왕의 나라라고 잘 알려져 있지만 이런 흑역사들도 많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자료, 사진, 그림 모으고 여러 가지 조사도 하고 하느라 이 글을 쓰는데 무려 하룻밤이나 걸렸는데 성의를 봐서라도 보신 분들은 다들 1번씩 구독 좀 부탁드려요~~ (T_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