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가 성(性)을 규범적으로 엄격하게 통제한 이유는 단일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1차적 원인은 "유교 성리학"에 있지만, 그에 의해 파생된 여러 영향, 사건, 문화들에 의해 세계적으로도 금욕주의가 강한 보수화가 한 번 더 진행됐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단 하나의 이유가 아닌, 유교성리학적 이념, 경국대전, 사회 구조, 그리고 남성우월주의와 엄격한 성 역할에 대한 엄격한 규범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조선 사회가 성을 자유로운 표현의 대상이 아닌, 사회 질서 유지와 국가 통치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념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어 도덕적 순결과 성(性) 분리(性別分離)를 강조했고, 중앙 관료국가로서 제도를 통해 가족, 혈통, 재산의 단속을 강제하였으며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의 혈연, 제사(祭祀) 중심 사회구조가 여성의 성(性)을 "가계 보전"의 관점에서 통제하도록 동원되었고, 이러한 이념과 제도는 법, 문화, 관습, 지역사회 감시와 결합되어 실질적 억압으로 이어졌다. 이 여러 가지 작용들이 결합되어 조선의 성문화는 "세계적으로도 특히 이슬람교에 필적할 만큼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인들도 다 아는 기본 상식으로, 그럼 왜 그런 작용들이 나타났는지 더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1) 유교 성리학(性理學) 이념의 절대적 영향으로 인해 공적 질서로 자리잡힌 엄격한 성 관념
조선 건국의 핵심 이념이었던 유교 "성리학"은 조선의 성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성리학은 여러가지 분야들의 학문들의 총합체이긴 하지만 그들 중 하나로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철학도 존재하며, 그러므로 인간의 감정과 욕망, 특히 성욕을 통제하고 다스려야 될 대상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공자의 윤리, 주자(朱子)적 해석의 신유교(Neo-Confucianism)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했기에 이러한 신유교(조선식 유교라고도 정의 가능)는 가부장성(父權), 충(忠), 열(烈), 효(孝)과 같은 사회 윤리적 명령들 그리고 사회적 위계로 성역할의 분리를 강조했다. 특히 "여성의 정절(貞節)", "남녀 성별의 분리(男女有別)"는 윤리적 이상으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 관학(官學)과 과거제(科擧)를 통해 유교적 가치가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보편화되었고 이는 곧 국가의 정책, 법제에도 반영되었다.
유교의 핵심 규범(예: 삼강(三綱), 오륜(五倫), 혹은 남녀의 구별을 규정한 예(禮))은 단순한 사상적 이상이 아니라 가정생활과 성행동을 엄격하게 규율하는 규범으로도 작동했다.
이기론(理氣論)도 이렇게 성(性)을 억압하는데 한몫했는데, 성리학에서는 우주 만물의 본질이 이(理, 원리)와 기(氣,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정의한다. 인간의 본성 역시 순수한 윤리적 원리인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감정과 욕망을 포함하는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뉜다. 겁나게 어렵고 복잡하긴 한데 쉽게 설명드리자면 성욕은 "기질지성"에 속하는 것으로, 이를 죄악시하고 억압, 탄압하고 제어하지 않으면 "이(理)"의 영역인 윤리 도덕적 본성을 해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개인의 성적 욕망(人欲)을 억제하고 사회적 도리(天理)를 따르는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遏人欲)"이 군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 정의를 쉽게 설명하자면 금욕주의를 강하게 할수록 신분제 사회의 조선의 양반들의 권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왜냐면 애초에 유교 성리학 자체가 그런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학문도 속해있다 보니 유교 성리학이 기본 이념인 조선에서 성을 억압, 탄압, 금욕주의를 강하게 할수록 기득권층인 양반 신분들의 권력이 강해졌던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들의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금욕주의"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면서 윤리 도덕적 우월함을 내세우면서 강해진 권력으로 금욕주의를 통치의 수단으로도 삼았던 것이다.
유교 성리학의 엄격한 금욕주의는 음양론(陰陽論)으로 인해 남녀 역할을 금욕주의적이고 엄격하게 만든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 성리학은 음양론을 통해 남녀의 역할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하늘과 땅, 낮과 밤처럼 남성(陽)은 바깥 일을 주관하고 여성(陰)은 안의 일을 다스리는 것이 인간의 도덕적 이치라고 보았다. 이러한 "남녀유별(男女有別) 사상"은 여성의 활동 공간을 집안으로 한정시켰고, 여성의 성을 남성우월주의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 아래에 두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했다. 그러면서 여성의 정절은 가문의 명예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가치로 강조되었기에 이런 여러 가지의 사회적 분위기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성을 억압하고 탄압하고 죄악시하는 금욕주의가 대단히 강했던 것이다.
또한, 성리학적 사회에서 성(性)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명나라, 몽골과 튀르크, 무굴, 중동, 서아시아의 이슬람이나 유럽과 똑같이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성행위는 개인의 쾌락이나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이어갈 후손을 생산하는 신성한 의무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난 성적 행위는 "선정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엄격히 금기시되었다.
(2) 경국대전 같은 법률과 제도를 통한 여성 통제
하지만 조선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금욕주의를 단순한 도덕적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국가의 법률과 제도, 조례, 관료체계를 통해 규범적으로 이식하고 적극적으로 성을 통제했다. 유교가 지닌 이러한 규범성은 법과 관료체계를 통해 제도화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같은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금욕주의에 관련된 여러 가지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이는 대부분 여성에게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특히 조선 초~중기 이후 관청은 상속, 제사(祭祀), 혼인 관련 규정을 재정비하였고 특정 성행위(예: 간통, 과도한 정절 위반)를 형사적, 행정적 제재의 대상으로 삼으며 법적 처벌까지 강행했다. 초창기부터 시행된 여러 법, 관행(예: 경국대전, 속대전 등의 법전들, 사림, 유학자들의 관행 권고)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국가 통치의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이러한 점들도 명나라, 몽골, 튀르크, 무굴, 오스만, 동시대나 오늘날의 중동 이슬람 국가들이나, 또한 유럽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표적으로 어떠한 법률들이 시행됐는 지 알아보자.
첫 번째 대표적 법률로 재가금지법(再嫁禁止法)이 있다. 조선 초기부터 여성.. 특히 사대부 가문 여성의 재혼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남편이 죽더라도 한 남편만을 섬겨야 한다는 "일부종사(一夫從事)"의 원칙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하고, 여성을 남편 가문에 귀속시키는 제도로 발전, 기능했다. 과부가 되어 수절하는 것은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받았고, 이 대표적 상징과 사례가 바로 "열녀문(烈女門)"을 세워 이를 사회적으로 장려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미망인(widow)의 재혼 금지 정책은 단지 윤리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특정 시기에는 법적, 행정적으로 강요되어 실제로 재혼을 금지하거나 재혼 시 불이익(관직 박탈, 자손의 진출 제한 등)을 받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혈통(종손의 문제)과 제사 의무를 중시하는 국가적 논리에서 설명된다.
두 번째 대표적 법률로 적서차별(嫡庶差別) 제도가 있다.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적자(嫡子)"와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庶子)"를 엄격히 차별하는 제도는 남성의 성적 자유는 일부 용인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엄격한 정절을 요구하는 이중적 잣대를 보여줍니다. 남성은 첩을 두어 성적 욕구를 해소하고 후사를 볼 수 있었지만 여성은 오직 한 남편에게만 종속되어야 했던 것이다.
(3) "내외법" 같은 사회적 분위기와 관습과 순결함의 강함
조선시대가 금욕주의가 세계적으로도 강했던 이유는 단순히 사상, 법률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사회적 관습"까지 존재했기 때문이다. 역시 조선의 성문화를 보수적으로 만드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민간의 금욕주의가 강화되는 데는 내외법(內外法)의 강화가 대표적인데 7세가 되면 남녀가 한자리에 함께하지 않는다는 "남녀칠세부동석(七歲不同席)"이라는 유교 경전 예기(禮記)의 내칙(內則) 편에서 유래된 조선시대의 유명한 격언처럼, 남성과 여성의 공간과 만남을 엄격히 분리하는 "내외법"은 단순히 집권층인 양반층 뿐 아니라 민간에까지 널리 퍼져 있을 정도로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남녀 간의 자유 연애 같은 자유로운 교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했고 성적인 문제 발생 가능성을 사던에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로 기능했다. 그로 인해 명나라, 몽골, 튀르크, 무굴, 일본, 러시아를 선두로 한 유럽, 동시대나 혹은 오늘날의 중동, 서아시아의 아랍, 이슬람 국가들과 같이 조선시대에는 여성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고 외출 시에는 얼굴을 가리는 장옷이나 쓰개치마 등을 착용해야 됐다. (참고로 의외로 이 점 때문에 한국이나 조선시대의 사극들이 유독 중동~서아시아의 아랍권에서 인기가 많기도 하다. 왜냐면 자신들의 문화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중동, 서아시아의 아랍, 이슬람권 국가들에서 처음 한류가 들어갈 때 한국의 사극들부터 가장 먼저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중동, 서아시아의 아랍, 이슬람권 국가들은 굉장히 엄격하다 보니 영국 드라마 같은 성적 방탕함이 자주 등장하는 서구 드라마들은 거의 들어오지 못했는데 한국의 사극들은 중동이나 서아시아의 이슬람 문화권과 비슷한 금욕주의를 가지다 보니 가장 먼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사극인 허준이나 대장금은 중동과 서아시아 이슬람권 국가들에서 시청률 70~90%를 달성했고 주몽은 이란에서 90% 이상을 달성하며 수많은 이슬람권 국가들에서 한국 사극은 국민 드라마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여성의 정절은 개인의 덕목을 넘어 가문과 사회의 명예로 여겨졌다는 점이 가장 크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금욕주의를 가장 강하게 강화, 확산시킨 대사건들이 있으니 바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등의 대전쟁들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 전 국토가 초토화가 되면서 인구가 1/10이 학살당하는 등의 어마어마한 국가적 파괴를 겪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양반층이나 집권층들은 조선을 개혁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이 이렇게 적군에게 학살당하고 패전한 이유를 "유교 성리학의 타락"으로 보았고, 유교 성리학을 지금보다 훨씬 더 강화해야 조선이 보다 더 단결하고 그래야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국가적, 민족적 비극을 겪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의병들이 강해지고 양반들의 권력이 잠시 약해지는 "신분제의 붕괴"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기에 조선 조정에서 유교 성리학으로 단결과 무너진 신분제의 복구 및 강화를 목표로 유교 성리학을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화시켰고 금욕주의를 엄청나게 강화했던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통해 무수하게 학살을 당한 민간에서도 유교 성리학적 금욕주의가 훨씬 더 강화되어야 다시는 이런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비극을 겪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민간 전역에까지 금욕주의가 완전히 뿌리깊게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보통 조선시대를 역사를 설명할 때 항상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기준점으로 삼는 이유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유교 성리학의 교조화 같은 완전히 "극단화"되어 갔기 때문에 그 현상들 중 하나가 송시열의 등장과 금욕주의의 강화였다.
어쨌든 이런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대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학살을 겪으면서 국가에서 붕괴된 신분제를 복구하기 위해 조정은 여성의 순결함의 기준점에 대해서 더욱 강화했다. 가장 대표적 사례로는 외적에게 욕을 당하는 것을 죽음으로 막은 "논개"같은 여성들은 열녀로 칭송받았고 이러한 이야기는 소설, 판소리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생산시키며 사회 전체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성별 분리로 인해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교육, 공적 지위에서의 배제도 심했는데 유교적 규범은 여성의 공적 공간 참여와 교육 기회를 더욱 더 제한했다. 왕실, 양반가에서 여성은 은거(隱居), 내실(內室)에 머물도록 완전히 확실하게 규범화되었고 남성의 "선비(士)" 이상과 대조되는 여성의 도덕적 덕목(순종, 순결, 정절)이 강조되었다. 학문, 관직을 통한 사회적 상승로가 차단되니 여성의 사회적 발언권 약화와 함께 성적 규범 준수가 사회적 생존전략이 되었기에 여성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이는 문헌, 회고록(예: 숙빈, 후궁 관련 기록 등등), 그리고 유학자들의 규범적 저술 등에서 확인된다.
(4) 재산, 혈통, 가족에서 금욕주의가 가계 보전의 수단이 된 방식
명나라, 몽골, 튀르크, 무굴, 오스만 왕조, 러시아를 선두로 한 유럽, 일본 같은 세계 초강대국들은 남성우월주의가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강했다. 그런데 이에 조선도 빠질 수 없이 강했는데, 조선 사회는 남성우월주의적 부계(父系) 중심의 혈연, 제사 체계가 체계적으로 법제화까지 되있어서 대단히 강력했다. 가문(宗族)과 제사는 가문의 연속성(특히 남성주의적 계승)에 의존하므로 여성의 성적 행동은 곧 "혈통의 순결"과 가계 재산(상속)의 안정성)과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신분, 재산 분배가 가계 단위로 작동하므로 혈통의 "순결성(남성 혈통의 불확실성 제거)"은 정치, 경제적 중요성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에게 금욕주의, 순결함, 정절 통제가 강화되었던 것이다.
즉, 성적 자기결정권 문제는 곧 사회, 경제적 권력 재생산의 문제였고, 엄격한 금욕주의와 성 규범은 가계의 법적, 제례적 삶을 보장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5) 민간의 지역사회, 감시, 명예의 정치 같은 제도 밖의 통제들
위와 같은 점들 외에도 지역 공동체의 규범, 부모, 친족, 그리고 지방 향리(鄕里)의 감시, 명예, 체면의 정치가 일상적 통제까지 만들어냈다. 조선은 북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엄격한 권위주의형 왕조국가였기 때문에 누군가 쿠데타 같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끔 항상 감시하는 체계가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었기에 그런 기능들 덕분에 민간에까지 이렇게 금욕주의가 엄격하게 적용이 될 수 있던 것이다.
여성의 순결함은 가문의 "명예"와 직결되었고 "문중 감시"와 "수치심"은 공식 제재 이상으로 강력한 억압 수단으로도 작용했던 것이다. 또한 유교적 규범을 수호하는 지방 유력자, 향리, 사대부들의 도덕적 캠페인(예: 미덕 칭찬, 정절 기념비 건립 등)은 사회적 행동을 규범화하는 수단으로 확실히 작용했다.
즉, 국가 법제와 가문, 지역사회의 비공식 제재가 결합되어 개인의 성적 자유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박탈된 것이다.
(6) 왜 조선이 유독 "세계적으로 금욕주의"가 되었나.
물론 조선만 유난히 금욕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금욕주의가 강하고 성을 죄악시하고 억압하고 탄압한 제국들로는 한때 세계 패권국이었던 대원제국(원나라), 몽골계 티무르 제국, 몽골계 무굴제국, 오스만 투르크 왕조, 당 제국(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대청제국(청나라), 서아시아의 이란 왕조들, 중동의 아랍 왕조들,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유럽, 영국의 청교도들이 가장 악명 높을 정도로 심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에 못지 않았다.
이념의 강도가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유교 성리학이 과거, 교육, 관직, 법률같은 정치체제 전반에 깊이 침투하면서 이념의 "국가화"가 이뤄졌고, 동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중동, 남아시아, 유럽의 국가들처럼 강력한 금욕주의로 인한 도덕 규범의 시행을 기능케 했다.
그리고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도 이런 금욕주의에 한몫했는데, 가문, 성(性) 관련 금욕주의적 규범을 제도화, 집행할 수 있었다는 점은 조선의 중앙집권제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가령 느슨한 봉건제의 경우는 아무리 중앙 정부에서 금욕주의를 내세운다 한들 지방 영지에서 그걸 반대하거나 반발하여 민간에까지 퍼지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데 조선은 국가 전체가 국왕이 지배하는 강력한 권위주의형 중앙집권제 왕조국가였기 때문에 금욕주의를 강하게 천명하니 국가 전역에서 그대로 사회 전반에까지 자리잡을 수 있었다.
가계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주의적 혈통, 상속 문제가 특별히 중요했던 점도 있었다.
정절, 순결 등을 유교의 상징으로 장기간에 걸쳐 정절비, 문학, 기담 등으로 미학화하고 그 상징을 통해 사회적 규범을 재생산한 점 등등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결합되면서 조선은 "성적 규제"에 대해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강한 제도적, 사회적 일관성을 보였고 이것이 "남성우월주의와 금욕주의가 대단히 강한 보수적인 국가"로서 조선이 완전히 자리 잡게된 것이다.
(7) 법, 판례, 실천과 간통, 정절 위반에 대한 처벌의 사례들
물론 이런 점들에 대해 악영향도 있었는데 조선의 형사, 사회적 제재는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여러 연구는 금욕주의적인 정절에 관련된 법을 위반하였을 경우에 대해 여성에게 더 엄한 사회적, 법적 책임을 가하는 게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실무 판단으로나 지역 사법에서의 불균형으로도 나타났다. 또한 조선의 양반 계층의 남성은 동시대의 오스만 제국처럼 첩(妾)을 두는 관행이 관념적으로 허용되거나 관용되었으나 여성에게는 감히 유사한 행위는 흉내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물론 시대별, 지역별 강도의 편차는 약간은 있었지만 전반적 추세는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엄격하게 금욕주의가 적용되되 유독 여성을 중심으로 한 도덕 규범의 엄격한 적용이었다.
물론 이런 점에서 성(性)에 대한 양면적인 이중적 태도도 있긴 하다. 겉으로는 성을 억압하고 금기시했지만, 그 이면에는 중세시대 유럽이나 중동의 아랍권 국가들, 근대시대 영국의 청교도인들처럼 몰래 정부나 지방관, 형제 같은 가족, 지인, 타인들의 감시를 피해 숨어서 성적 욕망을 다양한 형태로 해소하기도 했던 것이다. 양반 남성들은 남몰래 기생집 출입을 통해 풍류를 즐겼고(물론 조선시대의 기생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성 접대를 하지는 않았다. 여성에게 직업이 한정된 조선시대였기에 기생은 21세기 현대시대의 연예인, 개그맨, 배우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기생이 성 접대를 하게 된 건 사실상 조선이란 국가가 완전히 사라진 일제강점기 때부터 기생 문화가 변질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왜곡된 현상이었던 것이다.), 서민 문화 속에서는 작자 미상의 해학적인 성적 묘사가 담긴 민담이나 민요, 춘화가 국가의 감시를 통해 가끔 암시장에서 불법으로 거래되었다. 물론 이는 조선처럼 금욕주의가 있던 유럽에서도 "누드화(nude painting)"라는 형태로 나타났으니 이런 기생이나 춘화가 있다고 해도 조선이 금욕주의 국가였단 점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표출조차도 대부분 남성 중심의 문화였으며, 여성의 성적 자기표현은 완벽하고 철저히 억압되었다는 한계를 지닌다.
게다가 오히려 이렇게 남몰래 성(性)에 대한 양면적인 이중적 태도가 조선시대가 성을 억압시하고 죄악시하고 탄압했던 금욕주의였던 결정적 증거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남몰래 한국산 드라마를 시청했다고 해서 북한이 한국산 드라마를 중요시하는 국가인가? 그건 아니다. 그건 하나의 현상일 뿐이고 북한은 여전히 강력한 독재 국가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남몰래" 성(性)에 대한 "양면적인 이중적 태도"를 가졌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자유로운 성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할 수 없이 성적 해소를 하려면 남몰래 해야 됐던 아픔도 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시대처럼 성(性)에 대한 양면적인 이중적 태도를 가지거나 불륜을 몰래 하는 건 오히려 금욕주의가 대단히 강한 중동 아랍, 이슬람권 국가들이나 서아시아의 이란, 남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국가들에게 나타나는"공통적인 현상"이다. 워낙 사회적으로 금욕주의가 강하다 보니 남몰래 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양면적인 이중적 태도"로 보일 뿐인 것이다.
게다가 조선시대가 성을 제도적으로 억압하고 탄압했던 것에는 간통죄(姦通罪)의 엄격한 처벌도 있다. 조선시대 간통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는 중범죄로 다스렸다. 특히 유부녀의 간통은 남편과 그 가문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어 매우 엄하게 처벌받았다. 남성 역시 처벌 대상이었지만,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비난과 법적 처벌의 무게는 훨씬 컸다. 그렇기에 단순히 사회적 분위기가 금욕주의를 강조한 것을 넘어서 조선은 아예 법적으로도 이런 성적 일탈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크나큰 중범죄로 처벌 대상이었기에 대놓고 했다가는 법적으로 처벌될 수가 있었기에 죽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몰래 해야 됐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의 세계적으로 강한 금욕주의는 유교 이념의 국가적 채택, 법, 제도의 법제화, 남성우월주의적인 부계, 제사 중심의 가계, 지방의 군인들, 유력자, 향리, 지방관, 지역사회, 형제와 가문의 감시와 명예 정치 등등이 총집합되었던 결과물이다. 이 여러 가지 작용들이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하여 개인의 성 행위를 공적, 가계적 차원에서 엄격하게 단속하였기에 한때 세계 패권국이었던 대원제국(원나라), 몽골계 티무르 제국, 몽골계 무굴제국, 오스만 투르크 왕조, 당 제국(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대청제국(청나라), 서아시아의 이란 왕조들, 중동의 아랍 왕조들,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유럽, 영국의 청교도들처럼 세계적으로도 성을 죄악시하고 금욕시하고 억압하고 탄압하며 금욕주의가 강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적, 이념적 결합’의 결과로 여성, 성에 대한 규범적 통제가 상대적으로 강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