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에 조선은 중기부터 총, 대포, 화력 발전에 진심이었는데, 조선은 오늘날 미국처럼 민간인의 총기 소지가 자유로웠던 국가임과 동시에 민간 시장에서 총기가 15만 정 이상 자유롭게 거래됐었던 사실을 아는가?
오늘은 그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1) 조선시대의 무허가 노점상 "난전(亂廛)"의 역사
원래 조선시대의 상업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 아래 이루어졌다. 국가는 수도 한양에 "시전(市廛)"이라는 허가받은 상점을 설치하여 시장의 유통과 가격에 직접 통제하고 관할했다. 그렇게 허가받은 상점의 시전 상인들에게는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하는 대신, 왕가와 관청에 필요한 세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의무(국역)를 부과했다.
그렇다면 이 시전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조선 건국 직후 태조 시대부터 성종까지 15세기에 한양의 도시 계획과 함께 종로를 중심으로 시전이 형성되었다. 특히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조세들을 공급하던 육의전(六矣廛)인 선전(비단), 면포전(면포), 면주전(명주), 지전(종이), 어물전(어물), 저포전(모시)들은 시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다. 이들에게는 국가 소속의 공무원은 아니지만 국가를 위해 일하는 존재였기에 그 대가로 막강한 상업적 특권이 주어졌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의 만악의 근원이자 조선시대 전체를 완전히 왜곡, 변형, 파괴시킨 "그 사건" 즉 대전쟁들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전과 이후로 정의될 정도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렇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토가 파괴당한 조선은 17세기에 걸치면서 인조 ~ 숙종기에도 강하게 타격을 입은 경제가 회복되지 못했고 동시에 파괴당한 사회 구조의 추락이 심화됐다. 과학 기술력의 발전으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기존의 시전 체제만으로는 늘어나는 상업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해 파괴된 국가 회복에만 총력을 다하면서 민간 시장까지 통제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자본주의에 미쳐있던 한민족 특성상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처럼 이 틈을 타 허가 없이 물건을 판매하여 난전(亂廛), 즉 "어지러운 상점"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들은 주로 종로의 뒷골목이나 도성 안의 공터, 다리 밑에서 자리를 잡고 시전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암거래를 주도하며 서민들에게 물건을 팔며 큰 호응을 얻었고 순찰하던 경찰들인 "포졸"들에게 발각되면 재빨리 철거하여 숨는 등으로 목숨을 연명했다.
이렇듯 난전은 국가 정부, 경찰력 포졸, 시전 상인의 규제들과 감시, 순찰을 피하기 위해 생산지에서 직접 유통을 받거나 중간에서 상품들을 쌓아서 판매하는 상업 활동이 있었으며 이는 공식적인 "시전" 밖에서 이루어진 상행위였던 난전으로 불렸다.
난전의 등장은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이익을 침해하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시전 상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명분으로 정부에 난전 단속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에 호응한 정부는 시전 상인들에게 금난전권(禁亂廛權), 즉 난전을 금지하고 그들의 상품을 단속하여 압수할 수 있는 막강한 사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는 시전의 독점권을 법적으로 보장하여 국가 재정과 물자 조달의 안정이라는 이름 하에 경제적 이득을 꾀하려는 국가 정부와 시전 상인의 암묵적 거래의 목적이 있었다.
(2) 금난전권의 폐해와 시장과 상업의 악화
금난전권은 시전 상인들에게는 강력한 무기였지만, 수많은 부작용을 파생했다.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악용하여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통제하고 시장 가격을 조정하고 폭리를 가져갔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와서 한양의 물가는 비정상적으로 치솟았고 소비자들과 영세 상인들은 죽어나갔다.
게다가 금난전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시전 상인 소속의 하인들이 난전 상인들을 폭행하고 상품들을 빼앗는 등 물리적 충돌까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심각한 사회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3) 정조의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자유 시장 활성화
18세기 후반 정조(正祖)는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개혁하기 위해 달렸는데 그 역할을 담당했던 담당자는 당시 재상이었던 "채제공(蔡濟恭)"으로 그의 주도 아래 상공업 육성과 자유로운 시장 경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면서 정조 15년인 1791년에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금지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과감한 조치를 강행한다. 이는 국가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담당하는 육의전의 특권은 일부만 유지해주되 나머지 상품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가 국가 통제 경제에서 벗어나 자유 시장 경제의 원리를 일부 인정한 시장주의적인 정치였다. 이로써 난전은 합법적인 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신해통공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자유 시장의 경제 활성화라는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있었으니, 바로 "민간 시장에서의 활발한 총기 거래"였다.
(4) 삼군문의 보고로 인해 발각된 조선 민간 시장의 수많은 총기 거래들
"삼군문(三軍門)"에서 첩보(牒報)하기를,
"활과 화살 이외의 군기(軍器)는 사사로이 만들고 팔 수 없도록 엄격히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화약, 탄환, 총칼 등을 가게에 벌여놓고 마음대로 팔고 있으며, 심지어 계(契)를 만들어서 도매까지 하고 있습니다. 만약 엄단하지 않는다면 훗날의 폐단이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옛법을 거듭 밝혀서 엄격하게 과조(科條)를 제정해야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군기를 사사로이 만들어서 팔고 심지어 계까지 만들고 도매하는 행위는 보통의 난전(亂廛)과 같이 논죄할 수 없습니다. 사사로이 만들고 도매 행위를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사로이 주전(鑄錢)하거나 사사로이 책력을 만드는 형에 따라 사형으로 처단하고, 서로 사사로이 사고파는 행위 등은 모두 사형을 한도로 엄격히 처벌하되, 연한을 정함이 없이 극변(極邊)으로 원배(遠配)하소서. 그리고 양 포도청이 주관해서 조사하여 물종(物種)은 각각 해당 군문(軍門)으로 분송(分送)하고, 죄인은 형조로 이송해서 율에 따라 감단(勘斷)하되, 포도청과 법사(法司)의 사목(事目)에 기재하도록 하소서."
하자, 그대로 따랐다. 순조 14년(1814년) 2월 10일 임인 1번째 기사의 기록이다.
이렇듯 위와 같이 순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신해통공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해진 이면에서 민간에까지 총기가 시장에 유통되는 위험한 현실을 보여준다.
또한 이 기록은 조선 후기에 민간에 총기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를 명확히 증명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고종 시대에 이르면 조선의 민간 총기 보유량은 약 15만 정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전체 인구수가 최대 1000만명 밖에 안됐던 한반도를 고려할 때 어마어마한 민간인의 총기 보유 수치다. 오늘날 총기 소유의 자유가 가장 폭넓게 인정되는 국가로 미국을 떠올리지만 이미 수백 년 전 조선은 사실상 미국보다 앞서서 "총기 소지 합법 국가"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결코 자랑스러운 기록은 아니지만 말이다.
(5) 임진왜란부터 시작한 총의 역사
조선에 총기, 즉 화약 무기가 전쟁사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말기 때 최무선의 자체 화약 무기 개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개인화기로서의 총기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그 중요성이 각인된 것은 16세기 말 임진왜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 장군이 이끄는 일본 공격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7년간의 끔찍한 전쟁이 시작되면서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일본군 공격대의 화승총 보병들이 사용한 조총(鳥銃, Matchlock, 화승총)의 효율을 본 조선은 전쟁 중에 즉각적으로 조총의 제작 기술을 습득하고 자체 생산에 돌입한다. 당시 세계에서 총, 대포를 자체적으로 제작, 대량 생산, 보급이 가능한 국가들은 명나라, 오스만 왕조, 무굴제국, 일본, 유럽, 그리고 조선뿐이었음을 생각하면 엄청난 것이다. 이는 명나라의 경우는 세계 인류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총, 대포를 개발한 제국인 송나라의 후예인 통일 한족 제국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초기까지는 몽골제국의 식민지였던 오스만 왕조도 러시아 제국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선진적인 화약 무기 기술을 습득했으며, 무굴제국은 몽골제국의 수많은 후신들 중 하나로 선진적인 최첨단 총, 대포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중국과 유럽에 의해 총의 기술력은 전수받았으나 임진왜란 시기에 대포 기술은 전수받지 못했고 유럽은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총, 대포 생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조선은 비록 고려시대의 모든 것을 반대하고 부정했다곤 하지만 고려시대가 개발했던 자체 화약 무기 대포의 기술력은 그대로 전수받았기에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조총을 빠르게 제작 가능했다. 그리고 조선은 먼 훗날에 자체적으로 조총을 발전시키면서 권총 같은 "단총"도 개발해내는 데 성공하긴 했다.
조정은 일본에 전쟁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했거나 항복한 일본 군인 "항왜"들을 통해 조총의 제작 기술을 적극적으로 습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조총을 직접 시험하고 제작을 독려하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총기 국산화는 해상 전쟁의 승패가 걸린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각궁, 흑각궁 같은 조선의 활들이 화승총 따위보다 훨씬 위력이 강력했다. 그럼 왜 조선은 국가적으로 화승총 생산에 이렇게 사활을 걸었을까? 바로 "검"과 "활"과 "창" 같은 냉병기 무기들은 엄청나게 혹독한 훈련이 필요한 무기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오스만 튀르크)나 오이라트 제국, 명나라, 무굴제국, 조선 같은 동양의 활들은 특히 짧고 날렵하지만 강력한 단궁이었기 때문에 활시위를 당기는데 엄청난 "근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일반인은 감히 사용하기도 힘들고 엄청나게 전쟁 훈련을 많이 한 군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쟁무기였다.
사용하기도 이렇게 힘든데 제작 과정도 힘들었다. 고려, 조선의 활 중 최고라는 "흑각궁"의 재료는 물소뿔인데 이 물소뿔은 인도, 네팔, 부탄 같은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베트남, 미얀마 같은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물소의 뿔로만 제작이 가능하다. 조선은 주로 네팔 지역에서 물소뿔들을 수입한 듯 하다. 그런데 문제는 아시아 무역을 지배하던 명나라가 조선이 물소뿔을 많이 수입하면 마치 오늘날 미국의 트럼프가 무역 전쟁으로 관세 정책을 때리듯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조선이 필요 이상으로 물소뿔을 수입하지 못하도록 무역적으로 때렸다. 이는 명나라가 조선의 국방력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은 성종 19년인 1488년부터 네팔 지역의 물소들을 수입하여 자체적으로 조선에서 사육하여 굳이 수입할 필요없이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물소뿔을 생산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조선의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 문제였다. 앞서 말했듯 물소뿔은 주로 습하고 무더운 서남아시아나 남아시아 같은 아열대 기후들에서만 서식했던 물소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조선은 중국, 유럽과 동일한 위도에 걸쳐있는 추운 기후 국가였기에 당연하게 물소가 모두 얼어죽었고 결국 물소뿔 생산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조선은 끈질기게 국방력 강화를 위해 물소뿔이 필요했고 물소가 아닌 조선의 황소로 자체적으로 활을 제작하였으나 그 위력은 흑각궁의 절반도 못미쳤기에 결국 서남아시아 인도, 파키스탄, 네팔, 부탄, 스리랑카 지역이나 동남아시아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지역의 물소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물소뿔을 수입해도 제작하는데 수개월이 걸리는데 워낙 귀한 전쟁무기인 지라 국가에 소속된 정규군인들에게만 지급되는 무기가 흑각궁이었다. 당연히 일반인은 감히 만질 수 조차 없었다. 애초에 조선은 반란의 위험을 사전에 막기 위해 개인무기인 "도검(檢)"의 소지는 허용했으나 전쟁무기인 활, 창의 소지는 엄격하게 규제했고 검은 많이 소유해도 웬만하면 봐줬지만 활, 창을 많이 소지하는 조직이 있으면 진압하기 바빴다.
그렇기에 위력은 당시 흑각궁, 각궁 같은 단궁이 총보다 훨씬 강했으나 총은 길가던 농민도 사용법만 알려주면 1초만에 무기로 쓸 수 있다는 "편리함"이 장점이었기에 의병들까지 조직하려면 총의 생산은 필수였다. 즉 검이나 활, 창은 사용하려면 혹독한 훈련을 받고 그만큼 근력과 체력이 갖춰져야 비로소 사용이 가능했지만 "총"은 근력과 체력 없이 단순히 사용법만 알면 1초만에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은 명나라, 일본, 유럽의 도움이나 지원없이 조총을 자체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보급하는 데 성공했고 이렇게 생산된 총기들은 보병 군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義兵)"에게도 지급되었다. 특히 의병들은 정부에 소속된 공식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었기에 이 시점부터 "민간인"이 총기로 무장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임진왜란은 조선의 모든 남성 백성들에게 총기의 유용함과 필요성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한 거대한 학습의 장이었던 셈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17세기에 접어들며 광해군 ~ 효종시대에는 이제 화력무기가 많이 발전하고 국제적으로 총, 대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조선도 활보다 총, 대포의 발전, 생산, 보급을 주력으로 삼고 총, 대포를 보병대의 핵심 무기로 삼고 이를 전담하여 제작, 관리, 수리하는 관청인 "군기시(軍器寺)"와 "화기국(火器局)"을 중심으로 총기 생산을 완벽하게 국가가 독점했으며 그런 무기들을 사용하는 직업군인인 "훈련도감(訓鍊都監)"가 창설되었다. 물론 민간에서의 총기 제작이나 소유는 상상할 수 없는 중범죄, 즉 반역죄에 준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총기는 오직 군인과 일부 특수 목적 즉 예를 들면 국왕의 호위, 국경 수비, 호랑이 사냥꾼인 착호갑사 등을 위해서만 국가의 엄격한 관리 하에 지급되었다.
(6) 후기로 갈수록 늘어나는 민간의 총기 테러들
임진왜란과 연이어 발발한 1636년에 발발한 세계적으로 막강한 청제국 팔기군 기병대의 조선 침략전인 병자호란은 조선의 국방 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소수의 정예 군인만으로는 국가를 지킬 수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고, 이는 민간의 군사적 역할 증대로 이어졌다.
그럼에 따라 군기시나 군영에서 기술을 익힌 장인들이 몰래 빠져나와 사적으로 총기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불법 공방들이 파죽지세로 생겨났다. 이들은 부유한 상인이나 지방 토호들의 비호를 받으며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이 시기의 총기 유통은 아직 소규모의 "밀거래" 수준이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사회는 정쟁 즉 정치적 전쟁과 파벌 싸움이 심각해지면서 지방에까지 행정력이 미치지 않게 되었고 국왕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약화되면서 총기를 제어할 치안력은 추락해 갔다.
총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이를 이용한 총기 난사, 테러, 강도, 살인 등 강력 범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후기로 갈수록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총기를 이용한 테러 난사 사건과 이에 대한 조정의 우려 섞인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조정은 여러 차례 민간의 불법 총기 제조 및 소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총기 문화를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두에 언급된 순조 14년(1814년) 2월 10일의 기록에 따르면 불법적인 총기 유통이 더 이상 숨어서 이루어지는 "밀거래" 수준을 넘어 마치 시장의 난전처럼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기록이자 이러한 시대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삼군문(三軍門), 즉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라는 수도 방위의 핵심 군부대가 직접 문제를 제기할 정도니 말다했다. 이는 총기 유출이 국가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심지어 계(契)를 만들어서 도매까지 하고 있습니다." 라는 부분은 개인적인 판매를 넘어 자본을 모아 조직적으로 총기를 대량 유통하는 "범죄 조직(기업형 난전)"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보고에 따르면 당시 총기는 단순한 개인 소유를 넘어 민간 시장에서 노점상처럼 공공연하게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편의점에서 아무나 담배를 구입할 수 있듯이 아무나 조선인들이 총을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계"까지 조직해 도매로 대량 거래하는 오늘날의 총기 박람회나 총판과 유사한 형태의 유통망까지 존재했던 것이다. 이는 총기 제작과 유통이 국가의 통제망을 완벽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벗어나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민간 상업의 영역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심각한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흔히들 조선시대 후기는 온갖 사회적 악들이 총출동하는 시대였다고 하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었던 것이다.
기술력 좋은 장인들은 국가를 위해 일하기보단 관의 통제를 피해 사적으로 총기를 제작하여 판매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가져갔고 백성들은 이러한 민간 시장에서 쉽게 총과 탄환, 화약들을 구매하면서 자신을 지키거나 더 나아가 악행들까지 서슴지 않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정이 마냥 이런 총기 살인 범죄들에 대해 규제만 할 수는 없던 이유가 있었는데 계속해서 증가하는 총기 살인들을 규제하기 위해 치안력과 행정력을 발휘하여 규제를 시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국방력 유지를 위해 민간의 총기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 이중적인 상황에 놓여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호랑이 사냥과 같은 명분은 국방력 강화를 위해 여전히 유효했고, 언제 있을지 모를 대청제국이나 일본 같은 막강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백성들도 무장하여 총 다루는 법을 잊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애초에 병자호란은 조선이 처참하게 패배하여 초토화가 되긴 했으나 임진왜란은 의병들도 중무장하여 조선을 지키는데 조금이나마 보탰기 때문에 민간의 총기 숙련도는 꼭 필요하긴 했기에 결국 처음에는 나름 약간의 규제는 시도했으나 결국 "강력한 규제"보다는 "현상 유지"를 택하는 것으로 타협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7) 세도정치로 인해 최고조를 기록한 조선 민간의 총기 보유수 15만 정
순조 시대를 접어들며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본격화되면서 더욱 더 심해지며 민간 총기 사용은 가장 최고조에 이르렀다. 왕권이 추락하다 못해 사실상 거의 죽어버렸고 마치 중세 봉건제 국가처럼 안동 김가(家) 등의 특정 양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국왕을 대신하여 통치하면서 돈이 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지방까지 사실상 거의 못하면서 지방은 아예 다른 독자적인 국가처럼 돼버렸고, 당연히 국왕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으니 호랑이 없는 굴에 카라칼이나 승냥이들이 날뛰듯이 지방 관리들이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지방의 주민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폭거와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면서 1811년에에 발발한 홍경래의 반란부터 시작하여 사회적 불안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이렇게 마치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처럼 민중들이 직접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야 될 처지가 되면서 스스로 총기로 무장하거나 해야 됐고 거기다가 세도정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수많은 민란들이 발발하면서 이후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1894년에 발발한 동학 농민 혁명 및 항일 의병 투쟁에서 총기는 민중의 핵심 무기로 완전히 정착했다. 물론 동학농민군 중에는 돈이 없는 서민들은 창과 같은 근접 무기를 들었지만, 많은 동학농민군들이 화승총을 비롯한 각종 총기로 무장하고 이들을 진압하려는 관군과 일본군 연합에 맞섰다. 이는 당시 민간에 얼마나 많은 총기가 퍼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하고 단적인 증거인 셈이다. 만약 정부의 총기 통제가 철저했다면 이러한 대규모 무장 항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지방의 관청에 있는 무기고 습격도 이유이긴 했지만 말이다.
실제로 근대시대의 프랑스 왕국의 외교관이었던 "조르주 뒤크로(Georges Ducrocq)"라는 사람은 그의 저서 "PAYS DU MATIN CALME"에서 당시 조선 민간에 보급된 총기가 15만 정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이는 결코 과장된 수치가 아니며 당시의 여러 기록과 정황을 통해 교차 검증된다. 이는 당시 국가의 세도정치가들이 백성들을 오히려 죽이고 돈을 빼앗는데 혈안이 되면서 백성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혹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총으로 무장하기 위해 그만큼 민간에 총기가 많이 생산된 것이다.
물론 이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가장 먼저 조선 민중의 무장 해제에 착수했다. "1907년"부터 실시된 "총포급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여 대대적인 총기 회수를 실시했고 이는 항일 의병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식민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였다. 만약 조선 민중이 비무장 상태였다면 일제가 이토록 강압적으로 총기 회수에 나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근대사적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 이전까지 조선 사회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민간인들이 총기로 무장되어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그리고 민간이 아닌 당시 조선 국가 정부의 여러 군영이 보유하고 있던 총기의 총합계에 가깝거나는 19만 정 이상으로 추정되며 특정 시기 생산량을 추산한 수치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