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이 19세기까지 독립국가인 이유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는 어떻게 19세기까지 독립을 유지했을까?

by 바다의 지정학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을 보면 19세기까지 대부분 독립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어째서 당대 강국들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은 영국, 프랑스에게 19세기까지 먹히지 않았을까? 어째서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은 대항해시대에 인도차이나 반도를 단 1개 국가도 점령하지 못했을까?


오늘은 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1탄. 내부적 요인 "견고했던 동남아시아의 왕국들"


태국 아유타야 왕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는 "쑤리요따이 왕비" 영화


19세기 이전의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문명"과 "미개"가 공존했다. 현재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미개했던 구석기 시대 수준의 알몸의 원주민들이 살던 곳이었던데 반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은 꽤나 문명 수준이 높았던 문명국가들이었다.


미개했던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지역의 도서부(해양부) 동남아시아 지역과는 달리 문명을 꽃피웠던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었던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은 수백 년간 독자적으로 꽃피웠던 문명, 강력한 중앙집권제, 체계적인 관료제, 그리고 상당한 국방력을 갖춘 "전근대 왕국들"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각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역사 속에서 전쟁을 많이했다는 것도 바로 이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을 일컫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필리핀 같은 해양부 동남아시아 지역은 전쟁이 아예 없었다. 특히 필리핀의 경우는 7000개가 넘는 열대 섬으로 이뤄져 있어서 "국가"나 "부족"의 개념이 없다 보니 전쟁이 아예 없었다. 필리핀의 지도를 봐도 옆에 이웃하고 있는 국가가 아예 없으니까.


1. 문명 왕국들의 존재



미얀마(버마): 미얀마 역사상 가장 강했던 왕국인 버강(바간) 왕국은 한때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강국으로 부상하였고 태국, 캄보디아를 위협할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중세 시대 13세기에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대원제국(원나라)이 동남아시아 정복 작전을 개시하면서 당시 미얀마였던 바간 왕국은 그대로 대원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곧 멸망하였다.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성했던 미얀마가 대원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멸망하자 동남아시아의 전체 패권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미얀마가 순식간에 멸망하면서, 캄보디아(크메르 제국)도 덩달아 추락하고, 미얀마와 캄보디아가 망하자 그후, 동남아시아는 베트남과 태국이 18세기까지 흥기를 잡게 되었다.


그러다가 미얀마는 18세기 중반 건국된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는 바간 왕조 다음으로 미얀마 역사상 매우 호전적이고 강력한 제국이었다. 이들은 아유타야(시암)를 침입하여 멸망시키고, 서쪽으로는 인도의 아삼(Assam) 지역까지 영토를 늘려 19세기의 영국을 먼저 선제공격할 정도였다.


당시 미얀마는 이미 아라깐(라카인주), 아삼, 마니푸르 등 인접 지역을 진출하여 영국령 인도와 긴 변경을 맞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영국과 긴장 상태였다. 그러다가 미얀마(버마, 꼰바웅 왕조)가 변경 지역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농민 봉기군이 영국령 인도 쪽으로 도망가자 자가잉왕စစ်ကိုင်းမင်း의 미얀마군이 그들을 추격하며 영국령 인도 영토를 침범하면서 미얀마vs대영제국의 전쟁이 시작됐는데 당시 대영제국에게 미얀마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지역의 패권을 다투는 강력한 경쟁자였다.


어쨌든 당시 미얀마는 18~19세기의 동남아시아의 패권국이었다.


태국(시암): 현재는 관광의 국가로 유명한 태국이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경제가 발전한 국가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태국은 항상 애매한 포지션이었다. 초기에 인도차이나 반도로 건너왔을 시절 빼고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나약한 시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장 강한 시절도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 중국의 최남부에 원주민들이었던 타이족은 중국의 당나라가 원정군을 보내 대륙 최남부까지 정복하자 이를 보고 현재의 인도차이나 반도로 도망쳤다. 처음에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출한 타이족들은 크메르 문명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곧 미얀마가 동남아의 최강국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13세기 중세시대의 세계 최강국인 대원제국(원나라)가 미얀마를 정복하며 멸망시키고 크메르 제국까지 침략하여 멸망까지 몰고 갔고, 베트남도 대원제국의 침략으로 완전히 초토화가 되면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은 "공백기"에 접어들게 되었고 호랑이가 없는 굴에 여우가 생기듯이 동남아시아에 미얀마나 베트남, 캄보디아라는 호랑이들이 죽거나 사라지니 "태국"이라는 여우가 동굴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장 번영을 꽃피운 왕국이 바로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Kingdom)" (1351~1767)이다. 아유타야 왕국은 동남아시아에서도 크메르 문명 못지 않는 문명국이면서도 오랫 동안 존속한 왕국인데 무려 "400년 이상 존속"하며 동남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물론 아유타야 왕국은 1767년 다시 흥기한 미얀마의 침입에 의해 멸망했으나, 곧바로 화교 출신인 탁신 대왕이 "똔부리 왕국"을 세우고, 이어 짜끄리 왕국(Chakri Dynasty)(현 태국 왕실, 1782~현재)가 방콕을 수도로 삼아 재기에 성공했다. 이들은 일본인들이나 스페인인, 영국인들을 용병이나 상인으로 활용할지언정, 이들에게 지배권을 내줄 생각이 없는 꽤나 공부를 많이하던 왕국이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요즘 범죄국가로 가장 문제가 많은 깜보디아와 라오스다. 이 시절의 깜보디아는 크메르 문명의 아름다움과 라오스는 란쌍 왕국의 아름다움을 잃고, 서쪽의 시암과 북쪽의 미얀마, 동쪽의 베트남(대월) 사이에서 식민지가 되거나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따라서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18세기까지는 미얀마vs베트남vs태국이 깜보디아, 라오스라는 먹잇감을 두고 싸우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독자적인 왕국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는 베트남과 미얀마, 태국의 견제 때문에 서구 세력에게도 쉽지 않았다.



2. 방어에 집중하던 국방력과 저항


이들 인도차이나 반도 왕국은 수만에 이르는 대규모 상비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은 16세기 이후 명나라 한족 상인, 이슬람 아랍 상인, 일본 상인, 그리고 포르투갈 상인 등을 통해 조총과 대포 등 화기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물론 명나라, 아랍, 유럽, 일본의 최신 기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정글과 산악 지형에 익숙한 이들 군대를 제압하는 것은 외국인들에게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3. 화려한 외교 정책


17세기의 태국(시암)의 나라이(Narai) 국왕처럼 일부 국왕들은 여러 세력 간의 경쟁을 이용하는 "균형 외교"를 시도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왕국을 끌어들여 네덜란드를 때리거나, 영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등, 이들은 결코 경제 정책에 어둡지 않았다.


2탄. 외부적 정세(1) - 아시아 열강들이 19세기에 태국,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삼지 않았던 이유



1. 명나라, 남명


명나라, 남명은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전통적인 초강대국이었다.


하지만 중국 한족제국들의 대외 관계는 "몽골식, 청나라식, 유럽식 식민주의"가 아닌 "조공 책봉(Tributary System)"에 기반했다.


명나라의 조공 책봉제는 고대 로마가 속주들에게 행했던 시스템과 가장 가까운데, 고대, 근세 중국 황제는 "세계의 중심, 기반"으로서 중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국가들(여기서는 시암, 미얀마, 베트남 등)의 국왕들을 "책봉(국왕으로 승인)"하고 "조공"을 받았다. 명나라가 책봉을 해줘야만 그 국가가 국제 사회의 공식 국가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마치 오늘날의 유엔이 인정하는 국가처럼 말이다. 현재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명나라가 조공 책봉제가 아니라 직접 식민통치를 펼친 국가도 있었다. 바로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명나라는 베트남에게 조공 책봉제를 행하는 대신 1,000년간 직접 식민 통치하고 자원을 수탈하는 식민 지배를 펼쳤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베트남은 같은 공산국가임에도 반중감정이 최고조인 것이다.



게다가 명목상으로나마 조공 책봉제를 내세웠던 명나라와는 달리, 대청제국은 미얀마를 침략하고 베트남 내정에 직접적으로 군사 개입하는 등 대놓고 식민주의 정책을 펼쳤다.


2. 오스만 제국


세계 최강의 제국 몽골제국의 식민지였던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몽골제국(일칸국)의 식민지이자 몽골제국을 계승한 티무르 제국의 반식민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몽골제국의 식민지였던 오스만 제국은 식민지배하에서 해방된 후에는 15~18세기까지 명나라와 더불어 세계 패권국 중 하나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오스만 돌궐 역시 인도차이나 반도에 식민지(속국)을 두지 않았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의 심장부는 아나톨리아(오늘날의 튀르키예)와 발칸 반도였다. 이들의 세계관은 "지중해", "흑해", "중동(아라비아, 페르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란의 사파비 제국~무굴제국~명나라가 직, 간접적으로 교류하긴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주된 관심사는 우선 1순위는 러시아였다. 오스만 제국의 가장 최우선 숙적이자 맞수를 꼽자면 1순위는 무조건 러시아다. 대투르크 전쟁, 크림 전쟁 등 오스만 제국의 평생에 걸친 전쟁은 절반 이상이 러시아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서쪽(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국(오스트리아)과의 발칸 반도 패권 다툼, 빈 공방전 등. 바다(지중해)로는 베네치아, 스페인 등 유럽 연합 함대와의 해상권 다툼. 남쪽(아라비아)으로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보호하고 홍해 교역로를 확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동양(중동)인 사파비 왕조(페르시아)와의 메소포타미아(이라크) 및 캅카스 지역 패권 다툼이 있다. 이 '거대한 전쟁' 속에서, 시암이나 미얀마는 오스만 제국의 대전략에 아무런 지정학적 가치를 제공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는 강력한 갤리선 선박을 보유했지만, 인도양에서는 다른 목적을 가졌다. 16세기, 포르투갈 왕국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에 나타나자,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와 홍해를 해군 기지로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 함대의 목적은 인도차이나 장악이 아니었다.


주된 목적은 (1) 포르투갈 세력을 견제하여 기존의 아라비아~인도 간 향신료 교역로를 "보호"하고, (2) 아라비아 반도의 성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인도 구자라트의 술탄을 돕거나 아쩨(인도네시아) 술탄국에 일부 기술자를 파견하는 등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을 도우며 그곳에서 서구 세력이 동남아시아 공략에 실패하게끔 "이슬람 연대"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동맹에 가까웠지 속국화 시도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통적인 "대륙 세력"이었기 때문에 인도양을 넘어 벵골만과 태평양까지 원정 함대를 보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은 명나라와 무역에 가장 집중하던 전통적인 실크로드 무역의 "종착지'였다. 이들은 알레포, 이스탄불,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명나라 상인들과 무역을 하며 유럽 상인들에게 당시 세계 최첨단 기술력의 명나라의 물품들을 중개하며 막대한 부를 얻었다. 따라서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캄보디아의 쌀이나 미얀마의 티크(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직접 해군을 파견할 경제적 유인이 전혀 없었다.


3. 이란(사파비 제국)


이란의 사파비 제국(1501~1736)도 세계 최강의 몽골제국의 전 세계 식민지들 중 하나였다가 해방된 후에 건국된 후신들 중 하나였다. 사파비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페르시아(이란)의 제국으로, 특히 나디르 샤는 정복자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사파비 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식민지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파비 제국의 목적 자체는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의 경쟁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두 제국은 메소포타미아(이라크)와 캅카스(조지아, 아르메니아)의 패권을 두고 수백 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던 패권 경쟁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파비는 시아파(Shi'a), 오스만은 수니파(Sunni)로 각각 동양의 이슬람의 맹주들로서, 종교적, 이념적 대립이 극심했다. 제국의 모든 자원과 군사력은 이 서부 전선에 집중되었다.


서쪽의 위협이 오스만 제국이었다면, 동쪽(북동쪽)에서는 중앙아시아의 칭기스칸의 후예가 건국한 우즈베크 칸국들이 사파비 제국의 호라산(Khorasan) 지역을 끊임없이 침략했다. 옛날에는 몽골제국의 식민지였던 이란이었는데, 몽골제국이 해체됐음에도 이제는 칭기스칸의 후예가 건국한 우즈베크 칸국이 끊임없이 이란의 국경을 침략하니 사파비 제국으로서는 치가 떨릴 만하다. 어찌됐든 사파비 제국은 이 "두 개의 전선"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게다가 설사 사파비 제국이 인도차이나에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도달할 방법이 없었다.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입하려면 또 다른 몽골제국의 후계 국가이자 적대적인 무굴제국이 버티는 인도 아대륙 전체를 통과하거나, 히말라야와 티베트라는 강대한 제국들이 있는 지역을 넘어야 됐다.


물론 사파비 제국은 페르시아만 연안에 일부 항구를 가졌으나, 이는 지역 안보용이었을 뿐, 인도양을 건너 벵골만까지 원정 함대를 보낼 수 있는 대양 해군(Blue-water navy)이 전무했다. 게다가 인도양은 처음에는 명나라, 오스만 제국, 아랍, 일본이 장악했다가 이후에는 일본과 포르투갈,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4. 무굴 제국


세계 최강 몽골제국을 계승한 후계 국가들 중 하나인 무굴 제국은 국명만 봐도 몽골제국을 계승했다고 천명하고 있다. 무굴 제국의 국명 자체가 페르시아어로 "몽골"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급된 아시아 제국 중 인도차이나 반도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무굴 제국(1526~1857)이지만 굳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1번째로는 이미 인도차이나 반도는 사실상 인도의 식민지면서 식민지가 아니었다. 이게 뭔 개소리겠냐 싶지만 전통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들은 베트남을 제외하고는 인도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물론 인도가 불교~힌두교였던 시절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지만 여전히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도의 영향력은 가장 막대했다. 심지어 동남아시아는 중국보다도 인도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는데 지리적으로도 중국보다 인도가 동남아시아에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식민지화를 하지 않아도 인도의 영향력이 계속 항시 미치고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를 굳이 식민지로 만들 필요성은 없던 것이다.


또한, 무굴 제국은 마치 대청제국처럼 이민족 정복제국이라는 점이다. 무굴제국은 전통적인 인도 제국이 아니다. 몽골족 군인이 인도를 정복하여 건국한 대제국이 바로 무굴제국이다. 따라서 지배층은 소수의 몽골족-튀르크족이며 피지배층이 인도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몽골족-튀르크족의 피가 흐르는 황제들(악바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 등)의 목적은 인도차이나 반도 따위가 아니라 인도 아대륙 전체를 정복하고 통치하는 것이었다.


북인도를 정복한 후에도, 남쪽의 데칸 고원(Deccan)에 버티고 있는 데칸 술탄국들과, 이후 등장한 마라타 동맹(Maratha Confederacy)을 정복하는 것이 숙원사업이었기에 제국의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다. 특히 "전쟁광"으로 악명 높은 아우랑제브 황제는 수십 년간 남인도 원정에 매달리다 제국의 쇠퇴를 자초할 정도였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 외에 동쪽의 정글 너머로 눈을 돌릴 시간이 없었다.


물론 워낙 국경에 가깝기 때문에 가끕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곤 했다. 유일한 접점은 무굴 제국의 벵골 식민지와 미얀마의 아라깐 왕국(Mrauk-U) 사이의 국경 분쟁이었다. 아라깐은 일본 왜구 용병들과 포르투갈 용병들과 연합하여 무굴제국과 맞서 싸우고 저항하곤 했다. 하지만 이는 무굴 제국에게 "정벌"의 대상이 아닌, "진압"해야 될 "반란군"이었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무굴제국의 식민지였던 벵골 지역에 총독을 보내 이들을 진압하고 치타공(Chittagong)을 무력 점령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반란군 토벌이 목적이었지 귀찮게 아라깐 산맥을 넘어 미얀마 본토를 정벌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5. 일본



17세기 초엽, 일본은 고대시대부터 끊임없이 이어지던 수백 년 간의 전쟁을 끝내고 군부통치인 도쿠가와 에도 막부(Tokugawa Shogunate)를 수립하여 "쇄국(Sakoku)" 정책을 수립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도쿠가와 에도 막부가 마냥 평화의 시대는 아니었다. 각지의 쿠데타, 내전이나 지역 군벌들이 아이누족들의 사할린 섬으로 북상하거나, 오키나와를 식민지화하는 등 전쟁도 꽤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로 조선을 침략하진 않았다.


어쨌든 이 시기에 일본은 중국 명나라, 네덜란드(나가사키 데지마), 조선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모든 서양 세력과의 교류를 원천 차단하고, 일본인의 해외 출국 및 귀국을 엄격히 금지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에 일본은 은본위법으로 은광을 채굴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아 제국주의로 발전할 "경제력"을 쌓았고, 오히려 쇄국을 펼치자 바깥으로 나가는 일본인 용병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그래서 실제로 전국시대보다 오히려 일본 에도 막부 시대때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용병들이 훨씬 더 많았다. 즉, 막으니 더 많아진 것이다. 미국이 "금주법"을 시행하자 오히려 "마피아"들이 생겨난 것과 비슷한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16세기까지 일본인 왜구 출신의 용병대장인 "야마다 나가마사"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의 아유타야(시암)로 진출하여 당시 태국으로 진출하려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동남아시아 내에서 신임을 얻고 전공을 쌓아 승진했으나, 오히려 남몰래 자신이 태국(시암)을 전복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시도했다가 발각되어 결국 축출되었다.


6. 러시아


러시아의 팽창은 "얼지 않는 항구"를 찾는 "동진 정책"과 "남하 정책"에 기반했지만, 그 방향은 인도차이나 반도가 아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얼지 않는 항구 수준이 아니라, "쪄 죽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주요 적대국가들은


(1) 발트해, 흑해(vs 오스만 제국, 스웨덴)이었고,


(3)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vs 대청제국)이었으며,


(2) 중앙아시아(vs 몽골계 준가르 제국)이었다.


17세기부터 시베리아에 진출했지만, 이는 기원전의 고조선이나 고대 중국 한나라의 모피 무역처럼 모피 등을 얻기 위한 "육로 팽창"이었다.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해군력을 투사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 제국이 태평양 함대를 본격화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받은 것은 러시아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 중후반의 일이었다.


7. 조선


조선이 빠지면 심심하니까 그냥 넣어봤다. 조선은 앞서 위에 언급한 국가들 중 인도차이나 반도에 가장 영향력이 없던 국가 1등이었다. 물론 조선은 최전성기인 초기 시대 때 기준으로는 동남아시아의 모든 국가들보다도 군사력이 훨씬 강했지만, 중기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로는 당대 동남아시아 최강국들인 미얀마나 베트남을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최약체인 캄보디아나 라오스보다는 약간 강한 수준 정도로 추락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16~17세기)이라는 거대한 전쟁들을 겪은 후에는, 전국토가 초토화가 되었고 국가의 기능이 점차 붕괴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로 인해 왕권의 하락과 과도한 정쟁들로 국가의 지방 행정력은 미치지 못했으며 막대한 세금 부여로 일반 백성들이 해적, 산적, 도적으로 갈아타는 등 "국가"가 아니라 사실상 현재의 소말리아 같은 범죄국가처럼 되가는 형국이었다.


게다가 조선의 시선으로 동남아시아의 "시암"이나 "미얀마"는 알더라도 중국의 상인들을 통해 전해 듣는 "아득히 먼 남쪽 열대 지방"에 불과했고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조선은 초반 때라면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이미 중반 임진왜란 이후로는 국가 전체가 붕괴된 상황이라 바다 건너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할 경제력, 그리고 의지는 전무했다.



3탄. 외부적 정세(2) - 19세기 이전 유럽 열강들이 태국,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삼지 못했던 이유



1. 영국


18세기까지 영국의 관심은 오직 "인도"였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의 막대한 부(면직물, 향신료, 초석)를 벌기 위해 프랑스 왕국과 치열한 경쟁(까르나띡 싸움 등)을 벌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인도에서 중국(차, 도자기)으로 가는 교역 항로를 보호하는 "경유지" 정도의 가치에 불과했다. 따라서 힘들게 미얀마나 시암 같은 강력한 왕국을 정벌하기보다는, 해안가에 페낭(1786년), 싱가포르(1819년) 같은 교역 거점을 확보하는 데 만족해야했다.


게다가 심지어 19세기에 벌어진 3차례의 영vs버마 싸움 역시 미얀마가 먼저 영국에게 선빵을 쳐서 인도의 변경 아삼, 벵골을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로, 영국이 먼저 선수를 친게 아니라 미얀마가 먼저 영국을 공격한 것이다.



2. 프랑스 왕국


17세기 프랑스 왕국은 시암의 나라이 왕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선교사 파견, 안보 고문단 파견 등 경제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했으나, 하지만 이는 1688년 시암의 왕궁 쿠데타로 친프랑스파가 축출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후 프랑스 왕국은 18세기에 영국과의 "7년 싸움"(1756~1763)에서 패배하며 인도와 북아메리카(캐나다)의 식민지를 대부분 상실했다. 그렇게 프랑스 왕국은 항상 영국에게 패배하면서 늘 "유럽에서 2등 신세"라는 놀림거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18세기 후엽쯤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1789~1815)으로 이어지는 국내외의 혼란 속에서, 프랑스 왕국은 동남아시아에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잃어버린 왕국"을 만회하려는 나폴레옹 3세 시기인 약 19세기 중엽쯤이었다.



3.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생각보다 욕심이 없던(?) 나라였다. 네덜란드의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인도네시아 섬"(특히 말루꾸 섬의 향료)였고 이거 하나 먹는데 만족했다.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정향, 육두구 등 큰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는 향신료 교역을 독점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즉, 쓸데없이 돈을 들여가면서 속지를 늘리는 대신에 자기가 먹었던 인도네시아 섬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내치(?)에 치중했다고 보면 된다.


이를 위해 이들은 경쟁자인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왕국을 몰아내고 현지 술탄들을 굴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게다가 쌀이나 목재가 주산물인 인도차이나 본토(시암, 미얀마)는 이들의 "향료 교역"에 비하면 매력이 떨어졌다. 아유타야에 교역관을 두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교역" 목적이었지 정벌의 야욕은 전혀 없었다.


4. 스페인 왕국


스페인 왕국의 동남아 속지는 오로지 "필리핀" 1개가 전부였고 유일했다. 심지어 그조차도 술루나 여러 지역은 아직 독립 상태였고 필리핀 전체를 다 먹지도 못했다.


스페인 왕국의 주된 관심사는 "남미"(멕시꼬, 뻬루)의 은(Silver) 교역"이었고, 필리핀 마닐라는 이 남미의 은들을 중국에게 갖다 바쳐서 비단, 도자기와 교환하는 "갈레온 교역"의 종착지에 불과했다.


게다가 스페인 왕국은 이미 보유한 남미와 필리핀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게다가 스페인 왕국은 마치 "불나방" 같은 존재였기에 쉽게 흥했다가 불과 100년도 안 돼서 쉽게 망했기 때문에 이미 스페인 왕국은 시들 시들 해져서 망했기에 캄보디아나 시암을 정벌할 수 있는 힘도, 여력도, 의지도 전혀 없었다.


4탄. 열대 지방이라는 지리적&환경적 장벽


이 모든 정치적, 경제적 이유 외에도, 인도차이나 반도 자체가 먹기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땅이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1) 말라리아, 이질, 뎅기열 등 치명적인 열대성 질병들은 면역이 없는 유럽인들에게 재앙이었다. 말라리아 치료제도 없는데 이런 열대 지방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죽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2) 해변가에서 열대 정글 속으로 들어갈수록 빽빽한 열대림, 높은 산맥(미얀마의 아라깐 산맥 등), 거대한 열대 정글의 강이 가로막고 있었다.


(3) 타란튤라 거미, 독충, 해충, 각종 개미와 말벌들, 아나콘다처럼 거대한 거대 뱀들, 큰 코도모 왕도마뱀, 바다 악어들, 코끼리와 코뿔소와 표범들.. 같은 열대 지방 특유의 거대한 곤충과 해충, 동물들은 공포를 질려서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4) 남아프리카, 남아메리카와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습하고 무더운 고온다습한 날씨와 우기(몬순)는 작전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5탄. 19세기에 모든 것이 바뀐 이유


그렇다면 왜 19세기에는 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식민지화가 진행되었을까요? 이는 19세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것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1) 아시아 우위 시대의 종말(패권의 교환)


고대 로마제국이 동, 서로 분열된 후로 고대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면서 시작된 "아시아 우위 시대"는 17세기까지 이어지다가, 18세기에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하더니, 19세기에 영국의 산업 혁명으로 완전히 역전당했다.


(2) 산업 혁명(기술 격차)


증기선의 발명으로 강을 거슬러 내륙 깊숙이 사람들을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다. 또, 기관총(맥심건)과 신형 소총 등으로 재래식 군대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압도적인 화력의 격차가 발생했다. 그 모든 것보다 가장 큰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퀴닌(Quinine)"의 발명이었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이 발명되면서 열대 지방을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3) 19세기 시작된 자본주의(동기 부여)


산업 혁명으로 인해 공장에서 쏟아지는 상품을 팔 "새로운 시장"과, 공장을 돌릴 "원자재"(고무, 주석, 티크 등)가 절실해졌다. 이는 과거의 "교역 거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4) 러시아 제국vs영국 간의 패권 경쟁(그레이트 게임)


영국이 미얀마를 차지하자, 프랑스 왕국은 이에 뒤질세라 캄보디아, 라오스를 차지했다.(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이 시기 태국(시암)이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미얀마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사이에서 "완충 지대(Buffer State)"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라마 4세, 5세(쭐랄 롱꼰 왕)가 주도한 선제적인 근대화 혁명(노예제 폐지, 행정 개편)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론 태국이 독립국이지만 하지만 현재 주류 학계에서는 태국도 독립국이 아니라는 의견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 상황인데, 이 대표적인 이유로는 일본군이 태국에 주둔하면서 수많은 식민 수탈을 행했기 때문에 태국도 피해국으로 봐야한다는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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