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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Dec 17. 2022

새벽 바다

누구나 물속에서 태어난다. 식물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물에서 태어나 물을 고향으로 삼고 있다. 바다에서 태어난 생물은 그 넓은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별 욕심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아주 작은 량의 물-엄마의 바다-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욕심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다.   

  

나는 물속에서 태어나서 물을 곁에 두고 자라났고, 성장할 때도 물이 있는 곳에서 살았다. 국민학교 전후에는 우리 집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두 개, 왼쪽에 두 개의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마산의 합포 바다를 지나치며 다녔고, 대학은 부산의 바다를 보고, 직장은 아름다운 물, 여수에 있는 대학에 발령받아 지내다가, 후에는 일본의 카스미가우라 호수를 끼고 있는 츠쿠바에서 연구를 하였고, 그 다음엔 대서양을 끼고 있는 미국의 보스턴에서 사바티칼 연구를 하였다.      


그래서 나의 고향은 물이라고 해도 그렇게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좀 기분이 틀어지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물가로 가는 것이 성격이라기보다는 눈에 물이 보여야 잠잠해지는 물의 특성이 마음속에 자리 잡아 버렸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은 생명의 보고이며, 생명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 노자는 인간 수양을 물이 가진 일곱 가지 덕목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즉,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겸손(謙遜),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지혜(智慧), 구정물도 받아주는     포용력(包容力), 어떤 그릇에나 담기는 융통성(融通性), 바위도 뚫는 끈기와 인내(忍耐), 장엄한 폭포처럼  투신하는 용기(勇氣), 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大義)를 가져야 하며,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주장했다.    

 

나의 필호를 “물길”로 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물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며, 그 화는 한 인생을 바꾸는데도 큰 일익을 담당한다. 어릴 때는 물이 나를 이끌어 갈 줄은 몰랐다. 국민학고 6학년 가을, 어마어마한 폭풍우에 네 개의 시내가 범람하여 조그마한 우리 집을 홀라당 삼켜버렸다. 집뿐만 아니라, 내가 예뻐하던 목에 방울이 달린 젖 짜는 염소, 엄마의 한을 안은 소, 돼지, 닭 등 모두를 쓸어 갔다. 그렇게 겁이 나던 물이 나와 한평생을 같이 하고 있다. 나의 연구 생활도 물이 없으면 단 한 가지의 실험도 할 수 없다. 오히려 물이 나를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必然)이라고 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구나 목이 타면 물을 마시지만, 나에게는 나의 삶을 붙잡고 있어 삶의 전부가 되었다.    

 

그리고, 늦가을의 바다는 사람을  생각에 젖게 한다. 높은 등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파란 바다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색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바라다보아도 그냥 내가 그 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고, 가느다랗게 불어오는 갈바람은 가슴속 곳곳을 후벼 파고, 멀리 화물선의 굴뚝에는 도망가지 못한 가을이 걸려있다. 물길인지, 잔잔한 파도인지, 상선의 가슴을 간질이고 있고 큰 배도 간지럼을 타고 갸우뚱거리는 것이 더없이 정답다. 


                                           [이순신 공원 전망대의 봉수대]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새벽 운동을 해오고 있다. 가을엔 몰랐는데 겨울이 되어 갈수록 같은 시간인데도 더 어두워져 간다. 집에서 십분 남짓 걸으면 이순신 공원에 도달하고, 첫 번째 한 바퀴는 봉화대가 있는 전망대로 계단을 숨차게 올라가고, 두 번째 바퀴는 편평한 길로 걸으면 5,000보 정도가 되며, 집까지 돌아오면 6,000보, 4Km가 된다.   

       

컴컴한 계단을 209번 오르면 전망대에 도달하고, 남쪽으로 보면, 아직도 잠이 들깬 바다가 이불을 끌어당기고 있고, 불빛을 가득 실은 무역선도 잠이 오는지 이불 끌어당기기에 동참하고 있다. 나도 덩달아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잠시 시간이 지나면, 에오스의 손짓으로 바다가 붉게 타오르고, 잠을 깬 바다에는 조그마한 배들이 이불을 박차고 나오고, 그 위에는 철새 가족들이 해를 쪼러 가고 있다.    

 

새벽 바다를 보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이 없어진다. 그렇게 머리를 조이던 번뇌도 사라지고, 내 마음에 저 넓은 바다가 안착한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어도 괜찮으리. 여태껏 볕뉘조차도 들어 올 수 없었던 밴댕이 소갈딱지 속에, 저렇게 큰 텃밭이 생기다니, 다시 새롭게 경작해 볼 일이다. 항상 포근히 감싸주는 저 바다가 잠을 깰 때 투정하는 모습이란 참으로 바다 냄새라기보다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저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반평생이 지난 지금에도 살아가는 방향조차도 잡을 수 없는데, 40에 불혹을 느낀 공자의 사람됨이 저 바다와 같을지니.     


무욕(無慾)이란 누구라도 말할 수 있지만 행동하기는 쉽지 않는 철학이다. 또 그 누구도 여기에 대하여 자신있게, 소신있게 가르쳐 줄 석학도 많지 않다. 저 바다로부터, 심해로부터, 그 푸른 의미를 담아 볼 일이다.   

  

생의 정점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또한 어디로 갈 것인지도 밝아오는 새벽 바다에서 그 의미를 추슬러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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