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자체가 여행이다. 어떨 때는 쉬지도 못하고 열심히 떠돌아 다녀야 하고, 어떤 때는 마음을 정리하여 조금은 쉬었다 가기도 한다. 나의 여행의 첫 번째 목표는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돈을 벌어 집안을 세우라는 지상 최대의 목표를 위해 내가 좋아하던 전자공학을 포기하고 약대로 갔다. 대학 시절은 독재의 환경이라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힘들어 학보사 신문기자로 들어가서 세상의, 아니, 학생들의 눈이 되고 마음이 되고자 하였다. 그에 앞서 무엇이 되면 이 난감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너무 크게 잡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이 되면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대학생들과 함께하며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을 것 같았다. 교수가 되면 학생의 지도와 고민, 나아갈 방향을 이끌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TV만 켜면 교수들이 나와서, 정치나 사회 진단, 건강 해결 등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 교수가 되자고 생각한다. 그 뒤로 15년 만에 교수가 되었다.
교수가 되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곳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물론 강의와 연구, 학생 지도들을 했지만, “교수가 연구비가 없으면 교수가 아니다”라는 정의를 스스로 만들어 그 길을 가게 되었다.
전국의 교수들과 경쟁하여 따 내어야 하는 것이라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발령을 받은 이후부터 정년 퇴임까지 연구비를 받아서 근무를 한 것이 나의 최대의 목적을 수행한 것이 너무 자신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세월 위에 쏘아진 화살은 멈추지를 않았다. 학교 생활에 말 할 수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가 다가올 때 글을 썼다. 시인이 되고, 또 수필가가 되었다. 더 바빠졌다. 주위를 돌아보거나 챙길 시간은 한참 줄어들었다. 심장이 울렁거리고 잠을 잘 수 없을 때 색소폰을 시작했다. 어쩐지 색소폰의 진동수가 심장이 뛰는 주파수가 같았는지 많은 정신적 도움을 받았다. 한 번씩은 요양원에 색소폰 봉사를 하는 것이 이제는 즐거움으로 다가섰다.
재직 중에 딸을 미국 유학을 보내고, 결혼은 시킨 일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에 대한 이정표가 되었다. 주위를 살뜰히 챙기지 못하여 나의 대사에 누가 올까라는 큰 고민이 생겼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은 전국의 교수, 선후배, 지역 사람들이 참석해 주셔서 체면을 살린 적이 있었다.
이번엔 정년 퇴임이 다가왔다. 23년 2월 28일이 퇴임인데, 형식은 차리지 않기로 하고, 제자들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조금은 이래도 되나하는 생각과,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생각이 골고루 들어 여태까지의 발간된 논몬, 학회 발표, 특허, 프로젝트 등을 정리하여 단행본을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냥 아무런 일 없듯이 퇴직하기로 하였다.
근데, 나와 같은 과는 아니지만, 동료 교수 여러 명이 나의 퇴직 환영 해외여행을 기획했다고 했다. 1월에는 성수기라 비행기를 잡을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해외는 어려워도 국내 여행을 추진한다고 했고, 그 곳은 강릉이라 했다. 학회가 강릉에서 있으면 여수에서 8시간 정도로 운전을 해서 가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여수-양양 비행기가 있단다.
2월 24, 25, 26으로 2박 3일로 정해졌다고 했다. 작년엔 수술을 3번이나 하여 엄청 고생이 많았는데, 아직은 몸이 정상은 아니었으나 가본지도 오래되고 하여 함께 갔다. 너무 반가운 일이고 가슴 따스한 일이었다. 당일은 허균, 허난설헌의 고택에 갔다. 나는 50이 넘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위인들은 아주 어릴때부터 자연과 사람을 노래하고 있었다. 2일째는 눈이 온다고 예보되어 있었다. 나는 어디에 가더라도 항상 사진을 찍기 때문에 새벽에 바닷가에갔더니, 동쪽이 시커멓게 깔려져 있고 해를 보지 못하고 들어 왔다. 들어오자마자 눈이 엄청나게 오는 것이었다. 계획은 금강산보러 고성의 전망대에 갈 예정이었으나, 눈이 너무와서 포기하고 정동진으로 갔다. 산 위에 배가 눌러 앉은 영상의 호텔이었는데 눈과 아울려 좋은 경치를 만들어 주었다.
다음으로 오죽헌에 갔다. 40 년 만에 경포 호수를 보았다. 그때 젊을 때 학교 신문에 일출 사진을 싣겠다고 무작정 강릉 경포 호수에 갔었다. 그 때는 기중기가 있었고 철새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고요한 호수만 옛날의 정경을 물속에 숨겨두고 있었다.
오죽헌의 앞에는 첫 번째 모자가 한국 화폐의 모델이 되었다고 영광스런 표식이 서 있었다.
강원도에 신사임당이 있으면, 여수에는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계셨는데 왜 우리는 이 일들을 역사에 남기지 못하고 흘러 보내는가에 아쉬움이 컸다.
다음날 새벽에 또 일출 사진을 찍으러 갔다. 어제는 눈이 와서 일출을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아침은 벌겋게 타오르는 해무 앞으로 아주 맑은 햇님이 반겨 주는게 아닌가. 거친 파도 저 끝으로 너무도 아름다운 햇님이 미소지으며 올라오는 것이었다. 어디에 가든지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컷만 얻으면 그 여행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여행이었는데, 오늘은 여러 컷의 예쁜 사진을 찍어 더없이 기쁜 여행이 되었다.
[강릉 일출,20230226]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은 부산에 사는 고교 동창들이 자리를 마련해 주어 그 고마움에 마음을 표했다. 그 다음 28일 날, 학교에서 주최하는 퇴임식에 참여하고, 저녁엔 대학 동창 교수들이 퇴임을 축하해주어 나의 마지막 일을 기분 좋게 디자인 해 주었다.
또 하나, 나는 퇴임을 하면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특허 등으로 화사를 차릴까, 아니면 약사 면허증으로 약국을 개설할까, 또 아니면 병원에 약사로 취업할까 등이었다.
2월달에 여러곳에 이력서를 내었다. 나 딴에는 오랫동안 생체에 대하여 연구를 해왔고 논문과 특허도 많이 있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되돌아 오는 답은 우리가 찾는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보면, 지금 한창 젊은 약사들이 대학을 졸업할 시기이고 말도 잘 들을 것인데, 대학의 정년 퇴임한 명예교수는 어렵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자존심을 상하고,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또 서류를 내었으나, 같은 분위기 였다.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스스로는 할 만큼 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사용자의 눈에는 그저 노인인 것 이었다.
대학 생활 중에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지원을 했는데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언제 자리가 될 수 있는지 모른다고 한 적있었는데, 그 때 나는 입학식 때 입은 양복을 차려입고 내가 자취하는 집 주위를, 건물이 멋진 집을 찾아 초인종을 누르고 사람이 나오면, “저 부산 약대 학생인데 자제분이 있으면 잘 가르쳐 보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고 연락처를 주었다. 일 주일 이상을 돌아 다녔을 때, 한 집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아르바이트 가정교사를 한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광고에 난 구인처의 많은 곳에 이력서를 내었다. 다른 사람을 구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광고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곳에 다시 이력서를 넣고, 현재의 상황을 더불어 메일 보냈다.
1. 계속 광고가 나고 있어 아직 약사를 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 됩니다.
2. 저는 학사장교 1기 출신으로 성실함을 담보합니다.
3. 저가 연구한 부분이 항암, 항비만, 항산화 분야이어서 어떻게든 도움을 줄수 있습니다.
4. 저의 연구, 특허, 프로젝트, 저서 리스트를 동봉합니다.
5, 저는 시인이고, 수필가이어서 귀사에 의미지 실추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엔 안된다고 했던 곳에서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여러 가지를 묻는 것 중에 하나가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는 너무 나이가 많아 해낼 수 있겠습니까로 해석했다. 저는 컴퓨터를 가르치는 사람이고 실물인터넷에 기반을 둔 기계는 모두 잘 다룰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 주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사람을 잡는구나. 그래서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다. 3월이면 학생들에게 필수 과목(미생물학 I)을 강의 해야 하는데 너무 늦으면 둘 다 놓치게 된다. 빨리 답을 달라고 했다.
27일 날 “4월 1일부터 근무하십시오. 계약서를 씁시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어, 퇴임후 한 달 뒤부터 종합병원에 약제 과장으로 근무하게 되어 가슴 설렌다.
정년 퇴직은 누구에게나 너무도 영광스런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65세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적지 않은 나이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한계를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마음 또한 누구에게나 간절한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