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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May 10. 2023

진정한 단맛은 쓴맛이다

지금 5월의 장미가 눈 맛을 돋구고 있어,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여태껏 내가 무엇을 하며 살겠다고 발버둥 쳤는지 애잔한 마음이 든다. 장미 사이사이에 같이 숨을 내쉬고 있는 블루에로우, 금목서, 오죽, 접시꽃, 샤인머스켓, 시계꽃들도 한창의 청춘을 노래하고 있다. 청춘을 노래한다는 것은 젊음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인생에 있어서는 단맛을 축적하는 시기가 아닌가 한다. 나에게도 저렇게 장미가 만발하듯이 나의 삶에 있어서도 단맛을 뿜어내고 저장하던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이후에도 충분히 더 달고 익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으로 자신에 차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그러한 청춘이, 굳이 나서서 자랑하지 않아도 나의 삶을  착실하게 채워준 청춘의 향기가 돌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내리막이 있으면 기필코 오르막이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아주 달지는 않았으나 단맛을 보기도 하였고, 아주 쓰기도 하였으며, 어떤 떫기도한 삶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쓴맛, 신맛, 짠맛 및 단맛을 느낄 수 있도록 혀의 미뢰의 수용체가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이유는 아마도 살아가는 데에도 이 맛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매운 맛, 떫은 맛도 감지 할 수 있는데 왜 미각에는 포함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매운 맛은 우리 몸에 캡사이신 수용체가 있어, 이와 반응하여 느껴지는 통각으로 규정된다. 즉 고통이라는 말이 된다. 맛의 개념은 다르나 쓴 맛과 매운맛은 삶의 어려운 부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떫은 맛은 쓴 맛도 신맛도 아니면서 텁텁한 느낌을 주는 맛으로 생감이나, 익지 않은 귤, 밤 껍질 등의 맛으로, 요즈음은 유해산소를 제거 할 수 있는 성분으로, 먹을 수만 있다면, 좋은 항산화제임에는 틀림없다, 녹차가 항산화제, 유해산소를 제거 할 수 있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풀릴 듯 안 풀릴 듯한 맛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한다.     


신맛은 살람들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느껴지는 맛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하는데, 쓱 기분 좋은 일은 아닐 상태일 것 같다. 그러나 신맛은 침을 고이게 한다. 누구라도 목이 마르면 석류를 먹는 생각을 하면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짠 맛은 어떤 일을 격었을 때 나의 생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맛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인격적으로 다가가지 못할 상대나 아주 인색한 경우에 짜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삶이 영글어 감에 따라 듣고 싶지는 앟은 말일 수 있겠다.     


쓴 맛은 최선을 다했는데도 그 결과가 아플 때, ‘참 쓰다’는 말을 한다. 어느 쪽이 더 맛이 좋을까, 단맛을 보고 쓴 맛을 보는 경우, 그리고 쓴 맛을 보고 난후 단맛을 보는 경우, 아마도 대부분을 쓴 맛 뒤에 단맛을 보기를 원 할 것이다. 단맛을 먼저 보는 경우에는 쓴 맛이 왜 쓴가를 그대로 느낄 수 없다. 또한 쓴 맛을 피해가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은근히 쓴맛이 없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달콤한 맛이 좋은데 굳이 쓴 맛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쓴 맛은 참으로 참아내기 어렵다. 물로 입을 행궈도 여전히 쓴 맛은 남아 있다. 쓴 맛을 소거 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단 것을 먹는 것이다.  그 누구도 쓴 맛을 원하거나, 기다리거나 일부러 맛을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들의 바램이고 염원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는 영원한 평지도 내리막도 오르막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세뇌되어 가고, 그러다가 쓴 맛을 보아도 이것은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사실도 기대 한다. 그렇게 삶은 짜여져 있다. 아마도 삶이 수학적으로 7차함수임에 꼭지점이 위에 3개, 아래에 3개로 되어있어, 3번 정도는 좋은 일이, 3번 정도는 어려움이 함께 하도록 되어 있다.     


결국은 단맛과 쓴맛이 교대로 찾아오겠지만, 진정한 단맛은 쓴 맛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면 왜 우리의 삶이 쓴가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작년에 3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아주 소중한 것을 알았다. 단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니 잃어버렸다기보다는 단맛에 젖어 버렸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왜냐면, 나는 지금 단맛의 극치인 쓴맛이 나를 지탱해주고 바로 세워 주었기 때문이다.     


집사람이 그간에 많이 피곤하였다고 도라지 즙에 시럽을 넣었다면서 마셔보라고 권했다. 마셔보았더니 엄청 쓴 맛이었다. 분위기 전환용으로 장난하는 것으로 알았다. “엄청 쓴데” 했더니, 오히려 나더러 장난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또 다른 과일즙에 설탕을 넣어 마셨다. 너무 썼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내가 단맛을 잃어버렸구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극적인 일이 났다.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엷은 단맛을, 나는 느끼는 것이었다. 너무 단맛이 진하면 나에게는 쓴맛으로 느껴지는 것을 알았다.    


                                                [행복이란]

  

행복을 단맛이라 한다면,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함을 느끼고 지낸다. 그 많은 고통 속에서도 잘 버텨내어, 지금은 정년퇴임 후에 종합병원에서 아픈 환자들에게 약을 조제하여 그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하고 있다. 얼마나 진한 단맛인가.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를 생각했다. 그 때는 모두가 쓴 맛밖에 없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조그마한 단맛이 나에게는 너무 진해져서 쓴 맛으로 느끼고 있다. 지금은 쓴 맛의 덕분으로 아주 활기차게, 예전의 단맛이상으로 잘 지내고 있다. 왜냐고, 진정한 단맛은 쓴 맛이라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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