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농부가 아닐지라도 지렁이의 분변토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렁이는 땅속의 농부라고도 한다. 눈, 코, 귀가 없는 데도 영양가 없는 흙을 몸으로 채워 활성화된 분변토를 제공하여, 모든 농사를 잘 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은 지렁이에게는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어 먹이체인에서 제일 아랫부분에 위치하여 육신을 다른 생물의 먹이로 제공한다. 농부는, 특히 우리는 지렁이의 위대한 헌신에 대하여 그렇게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산다. 어쩌면 징그럽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고 길가에서 만나면, 엉겹결에 비켜가곤 하는 일이 지렁이를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면, 맨 아래의 먹이 체인이면 존재하기 위해서는 엄청 번식력이 강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이 자본을 알게 되면서, 짧은 시간에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제초제, 농약 등을 사용함으로써 자연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파괴하고 있음을 안다. 지렁이는 암수 한 몸이기는 하지만 다른 개체와 몸을 합하여 7개정도의 알을 낳고, 차츰 부화 성장을 통하여 1년 정도면 성체에 이른다. 즉, 다른 동물에 비교하여 그 개체수가 많이 증식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사람들을 지렁이가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 세월이 한참 지나도록 기다려 지렁이가 증식한 후에 농사를 짓기도 한다. 결국 일본의 농사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농사는 자연이 짓고 농부는 그 시중을 든다”고 한 말을 생각하면 결국 지렁이가 농사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땅속에는 엄청난 량의 미생물이 살고 있는데, 이 또한 지렁이처럼 토양을 숨쉬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세균을 지표 밖으로 끄집어내어 정리하면 지구 위에 1.5미터의 층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이 역시 자연에 속한다. 인간은 얼마나 많은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지를 또한 자각해야 한다.
나는 항상 새벽에 6,000를 걷는다고 말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다. 아침에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그나마 운동할 시간이 없고, 저녁에는 다른 상황들이 많아서 아침에 요란을 떨고 있다. 전날 비가 제법 오고 난 다음날은 공기도 깨끗하고 맑기도 하여 기분이 참 좋다. 이런 맛에 잠을 덜 자더라도 이순신공원에 출근하는 맛을 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비가 자주 와서 이런 기분을 많이 느낀다. 꼭 같은 상황으로 비가 오고 난 다음 날은 공원의 포장도로에, 내가 걷기 운동을 하는 길, 한 바퀴돌면 1.3 Km정도 되는데, 숲속에서 인도로 기어 나온 지렁이가 40여 마리 정도 된다. 그 중에는 밟혀 생명을 잃은 것, 어떤 것은 죽을 힘을 다하여 기어가는 것, 어떤 것은 길바닥위에 살기를 포기하는 것들로 보인다.
물론 지렁이는 습기기 있는 곳에서는 편안하게 살 수 있다. 왜 이런 무모한 일을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고, 환경의 변화를 주고 싶어 소주도 한잔하고, 고함도 질러보고, 게임도 해보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건네는 일들을 하곤 한다. 그러고 나면 쌓였던 분이 쬐끔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더 깊은 스트레스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금 살고 있는 아지트를 쉽게 버리지는 못한다. 또 챗바퀴 돌 듯 다음날에 몸을 실어야 하기 때문에라도.
비가 오면 지렁이들에게는 어쩌면 기분이 아주 좋은 날이 될 수 있다. 촉촉해서 숨쉬기도 좋을 것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한판 진하게 놀 수도 있을 것인데, 왜 안식처를 두고 인도로 나와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 생을 마감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름대로의 기분이 좋을 때 도전하는 것을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눈이 있다면, 저 넓이 정도의 길이면 얼마 정도의 시간이면 건너 갈 수 있을 것이야 라고 계산 할 수도 있겠지만, 볼 수도 없는 길을, 어떻게 건너갈 생각을 할까? 인간 측면에서는 지렁이의 움직이는 속도로는 폭 3미터정도를 건너는 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되고, 그 시간 안에 해가 떠서 땅을 달구면 호흡이 곤란해지고,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올 것이다. 따라서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과가 너무 빤하니까.
그런데도 많은 지렁이들이 도전하는 것은 생명보다 도전하는 가치를 더 높은 곳에 두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렁이는 볼 수는 없지만, 피부의 감각으로 빛의 명암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내가 운동하는 새벽에 이동을 시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방향을 잘 잡지 못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에너지를 소비하여 길바닥에 불시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지렁이들을 도로를 가로질러 간 것도, 지금 가려고 무지하게 노력하는 것도 나름의 계산으로 출발을 했을 것이다.
갈까 말까 망설이던 것은 늦게 출발하여 헤매고 있을 것이고, 일찍 출발했던 것은 목표를 달성 했을 것이다. 도전하는 것은 옳고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다. 그러나 준비 없이 남이 하니까 해보겠다는 심사는 갖지 말아야 한다. 도로의 중앙 정도에 도달했을 때, 땡볕을 만나면 생명을 바치는 도전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생명의 가장 중요한 일은 기본을 지키는 일이다. 기본은 상식을 따르는 일이다. 상식이란, 누가 어떤 부분을 깊게 연구하여 얻어지는 전문 분야를 얘기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길바닥에서 빠싹 마른 지렁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사람도 자신이 해보고자하는 일에는 강하게 도전 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눈, 코, 귀, 입을 다 가지고 있어 상황판단을 무리하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 때에, 그 일은 도전해 보는 것이 그 뒤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