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산다는 것은 먼저 내가 누구인가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젊을 때의 나답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 빼어나게 이겼다는 것을 기쁘게 알고 지내왔던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조그마한 국립대학의 일원이 전국의 교수들과 프로젝트 경쟁에서 이기고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제시한 이론에 대한 명쾌한 결과를제시함으로써 스스로의 목표에 다가가는 것이 스스로의 자존심과 타 연구자들에 비하여 본, 또는 그보다 나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뼈대를 세우고 넘어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었다. 또 최대의 목표였으니까. 이때 행복했냐고? 어쩌면 행복을 찾을, 맛볼 시간도 없이 파묻혀 지냈기 때문에 이게 행복이었다라고는 말하기 어렵고, 그저 내 자신에 대한 충성이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새로운 연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론을 가장 최근의 논문을 읽으면서 이것이 나의 연구와 현실에 맞는지 어떻게 응용하여 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대하여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고 길을 찾았다.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니라서 몸과 마음을 바쳐 또, 다른 내일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 작은 보람을 위하여 내 자신을 던졌던 것, 새로운 것에 환희를 쌓으며, ‘그래! 이 맛이야’ 하면서 이것이 최고의 것으로 알고 만들며 살았다.
물론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 줄도 알면서 그 굴에 들어가 날새는 줄 모르고 혹사해 왔다. 그것이 지상지고의 삶이라 생각했다. 또, 젊은 사람이 한 번쯤 부딪혀 해내야 할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로젝트가 끝나가면 다른 프로젝트를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썼던가, 그러다가 떨어지면 내 모든 것이 끝났다, 졌다 하는 패배감으로 생선에 소금을 절이듯이 온 몸을 절였던 생각이 많다. 이렇게 나의 학교생활은 지나갔다.
평소에는 누구보다도 사람 냄새 나게 살려고 무진 노력했던 것도 생각난다.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려 가면서 맥주 맛도, 사람 맛도 보면서 조금은 즐겁게 사람답게 살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럴려면 나의 생활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필요 충분 조건이었다. 프로젝트는 내가 감수해 낼 정도로 몇 개씩 되어야 하고, 연구원이 넘쳐야 하며, 내 생각대로 결과가 나오는, 참 행복한 일들에 둘러싸여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해진다. 그 외는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그다지 하지 못한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잡으려고, 해외로 국내로 발표하는 그 시간들로 배가 불렀던 시절 속에 나는 가두어져 있었다.
이런 결과인지는 몰라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년퇴임 하는 하는 해에 수술대에 3번이나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나의 꿈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저 먼 구름이 하나둘씩 흩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공허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이겨내지 못할 때, 마음을 추스르기 위하여, 시를 쓰고, 수필을 쓰고, 차 안엔 항상 카메라를 싣고 다니면서 마음을 다스리려고도 많은 애를 썼다.
나는 최근부터 모든 일에는 총량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제안하고 그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행복에도, 사랑에도, 생각에도, 재산에도, 물질에도, 생각에도 모든 부분에 총량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조금 과학적 근거로 풀어보면, hyperbolic saturation 커브와 거의 같다. 초원에 토끼가 너무 많아 넘쳐 날 것 같아도 그 양은 포화 곡선처럼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사랑도 초기에는 못 보면 죽을 것 같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뜸해져, ‘잡아둔 물고기 먹이 안 준다’는 형태로 바뀌어 간다. 행복도 너무 많이 쌓이면 이상은 행복은 머무르지 않는다. 결국, 자기의 행복 총량은 정해져 있어 아껴 가면서 써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나의 연구에 대한 총량도 어느듯 포화 곡선에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태껏 만들어둔 특허, 천연자원의 대량생산 기술, 예를 들면 좋은 성분을 가지고 있는 식물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상품을 만들려면 아주 많은 량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기술을 간단하지는 않다. 이로부터 기능성 성분을 대량 추출하여 화장품, 기능성 식품, 치료제등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두었는데, 마지막에 수술을 3번이나 하고 나니 내가 진정 바로 살아왔는지, 특히 내가 중요시하는 사람 냄새 나게 살았는지에 대한 결과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년 퇴임이 다가올 때 사람 맛이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약국, 병원, 회사등에 취업하여 무언가 함께 잘 지내고 싶은 생각을 했다. 문제는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프로젝트는 좋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집중하여 작성하면 그 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만, 정년 퇴임의 나이에 약국, 병원, 회사에 원서를 넣고 경쟁을 해보았더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경력이나 경험은 전혀 사용될 곳이 없었다. 나는 충분히 잘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충분히 쉽게 설명하여 매출을 높일 수 있다고 장담했으나, 사용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겠냐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결국은 많은 나이에 이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겠냐 하는 것을 계속하여 나이 머리에 세뇌시켰다. 젊고, 성실하고, 밤늦게까지 좋은 인상으로 일을 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약국과 병원등 10여 곳이상 퇴짜를 맞았다. 이것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구나하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강박감을 주는 것은 내가 일을 하지 않고 그냥 세월만 보내면 금방이라도 사람이 퇴화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라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주위에 정년 퇴임하신 교수님들을 보면 언제 저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삶의 무게]
나는 약사이고 약학박사이고 약사 면허증이 눈을 뜨고 있고, 자신감 또한 살아 있는 터였다. 안 되면 말지하는 생각은 모래 태풍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 냄새나는 함께 더불어 갈 수 있는, 나의 노력으로 조금이나마 주위를 따스하게 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나의 사람 냄새나게 하는 이론에 근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 등 비빌 곳을 찾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절박한 마음으로 내가 살고있는 주위의 종합병원에 서류를 내고 연락이 오도록 기다렸다. 큰 기대는 않고, 여수에서 좀 떨어진 순천에라도 일자리를 구하려고 응모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간절하고 절박해야 길이 보이듯이 연락이 왔다. 참으로 귀인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한다. 2년전에 2월에 코로나에 감염되어 기침이 심하게 나고 숨쉬기가 어려워 한밤에 보건소에 전화했더니 병원에서 연락이 갈거라고 했다. 병원에서 연락이와 현재 상태를 이야기 했더니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임시 선별진료소에서 기본적인 검사를 하며, 살아오면서 생각조차 못 했던 폐렴이야기도 들었다. 당장 나라에서 수용하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면서, 이 병원의 어떤 분께서 몇시간을 연락하더니 목포보다는 가까운 순천이 좋겠다며, 앰뷸런스에 태워 순천의료원으로 보내어 주었다.
면접 도중에 코로나 얘기가 나와 순천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았다하니, ‘그래요? 그때 내가 주선하여 보내주었다’는 기억을 확실히 한다는 것이었다, 부원장님이었다. 나는 그 당시 춥고, 숨쉬기 어렵고 해서 누구인지는 몰랐는데, 나의 면접관이 되었다. 정년 퇴임 전에 3번의 수술을 한 것 때문에 부정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했다. 나이도 많은 데다 힘든 수술을 했고, 또 병원이 일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어서, 많은 추가적인 검사를 받고, 또, 채용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아주 상세하게 온몸을 다 파헤쳤다. 몇 시간이면 될 줄 알았던 신검이 며칠로 늘어나고, 일주일을 넘겼다. 나 자신도 이렇게 안 좋은 곳이 많은데 기대하는 것도 내 욕심은 아닐까하는 자책이 들었다. 좀 건강을 회복한 후에 직장을 구할까도 생각했는데, 그냥 쉬고 있으면 그 나태함에 길들어 질 것 같아 도전하는 것이 나의 생각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나는 입으로 누구한테나 운동을 해라, 건강을 지켜라, 하루 한두 시간 정도는 자신을 위하여 투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왔고, 나 자신도, 1998년부터 퇴임하기까지 헬스클럽에서 운동, 사워하고 학교를 기분좋게 갔다. 나에게는 운동이 나의 종교와 같았다. 그런 내가 무너졌다. 할 일이 엄청 많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말이다.
여러 고비를 넘기고 종합병원 약제과에 입사하게 되었다, 지금은 제2 전성기를 맞아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다른 일들을 하나씩 열매를 맺어 볼까한다.
여수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위하여 한밤의 버스킹에 참여하고 있다. 색소폰으로 즐거움을 받고 기쁨을 줄수 있어 행복하고, 한 번씩은 양로원 봉사도 해왔다.
그리고 “여수 문화예술 나눔공동체”의 공동 대표를 맡아 문화 축제를 여수시민이 함께 참여하는“2023 나눔 문화축제”을 열고자한다.
어울렁 더울렁 함께 만들어 가는, 정을 바탕으로 현실을 건축해가는, 다름을 인정하며 함께 키워가는 일들, 사람 냄새나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전화 한 통 할 수 있는 정겨움, 누구라도 바라는 사회, 이를 위하여 몸 던질 수 있는 곳이면 나답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