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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할 수 있는 일

by 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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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배려]


신이 하는 일을 제외하면, 모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을 움직여 자신들을 숭배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려면 신들도 구태의연한 옛날의 생각에서 많이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요즈음 말로 개혁을 해야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그 이전에는 신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의 필요에 의하여 신을 존중하고 숭배하며, 인간의 신분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의존해 왔다. 신이 나쁜 일을 해도 신이니까 당연히 할 수 있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사람이 아닌 신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해 왔고 그의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었다, 아니 제기하지 못했다.


신들의 왕이라고 하는 제우스는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이 필요하거나 마음에 들면 어떤 술수를 해서라도 그 여인을 자신의 품에 안는 아주 힘도 세고 변신술도 능하고 번개도 마음대로 움직이며 자신의 뜻대로 사는 신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이러한 신을 힘이나 능력보다도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지구 위에 혹은 신의 나라에서도 받아주지 못하는, 존경보다는 멸시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과 신이 다른 가장 큰 요건을 보면, 사람은 정에 의하여 만나고 헤어지고가 가능한 반면, 신은 기도에 의해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다르다. 우리가 절대자를 찾는 이유도 이와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살핌]

신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인간의 생활에 간섭하려 한다면 그것인 이미 신의 경지에서 벗어나 인간이나 별 다름없는 대우를 받을 것이다. 사람이 신을 숭배하는 이유는 사람보다 높은 경지에 있어 나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예을 들어 내가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하면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다 했을 것이다. 그래도 별 차도가 없다면 어쩌겠는가. 자신보다도 훨씬 높은 경지에 있는 신에게 좀 해결해 달라고 기도를 할 것이다. 하루고, 한달이고, 몇 년이고 자신의 넋이라도 바쳐 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참으로 아프게도 신은 내가 어려움에 쳐해 있을 때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계시도 없다. 결국은 그 짐을 자신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신에 대한 기대감이 현저히 떨어져도, “나의 기도가 미치지 못했나봐”하면서도 신의 영역에 대하여 나쁜 말은 하지 않는다. 그토록 인간은 연약하고, 어디 기댈 곳도 없는, 어쩌면 억울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못한다. 언젠가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멍한 하늘을 쳐다보기만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정 신을 있는 것인가 하며 불신론을 제기하며 이 세상에 믿을 것은 본인 밖에 없다는 사실을 슬프게 인정하기도 한다.

DSC_8570-ad-1.JPG [보이지 않는 힘]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신은 죽었다라고. 그러면서 신은 어떤 일만 하는 것 일까하는 생각을 한다. 사람이 없다면 신은 존재할 수 있을까하는 명제에 대하여도 생각해본다.

결국, 신은 인간들을 움직여 서로 불신하게하고, 서로 싸우게 하면서 신의 꼭두각시로, 신의 하인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위치가 체계가 없어지고 인간 조차도 신을 아래로 볼 것이므로.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진정 무엇인가하고. 확실한 것은 신이 하는 일을 제외하고 나면 모두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거대한 명제를 떠올리고 기뻐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신이 하는 일이 무엇일까라고 다시 생각해본다. 그래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정해 질 수 있을 것이므로.

신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죽어야 한다. 신은 먹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사람은 먹어야 한다. 신은 자연 현상을 움직인다. 사람은 자연에 지배되어 희노애락을 유지한다. 이것들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확실하게 그을 수 있다. 결국은 사람은 신보다는 한참 낮은 지위에 있다.


그러나 신들도 말을 하고, 사람도 말을 하며, 신도 자유를 누리고 사람도 자유를 누린다, 자유를 누려야 사람냄새 나게 살 수 있다. 신이, 사람더러 말을 하지마라든지, 자유를 버려라 라는 말은 할 수 없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들도 사랑을 하고 사람들도 사랑을 한다. 이것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므로, 신이 인간더러 커거나 작거나 사랑을 하지 마라는 명령은 할 수 없고 하지 않는다. 즉, 이 부분에서는 신과 인간이 동격으로 볼 수 있다. 신도 격이 있어 인간이 지키지 못하는 명령은 하지 않고 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존중하는 모드라야 인간이 신을 우러러 볼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다. 신은 신다워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서 인간도 인간답게 살아라 라는 권유는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래도 신은 인간을 억압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이용한다. 폭풍과 태풍을 이용하여 신에게 매달리게 하고, 뙤약볕이나 가뭄을 이용하여 인간을 자신들의 영역에 가두려고도 한다. 시대도 변하여 이조시대 그 이전에는 기우제나 지우제를 지내면서 신의 마음을 달래며 신들에게 잘 못을 용서바랍니다 라고 정말 진심으로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신이 화를 거두지 않으면 인간은 먹을 수도 없이 죽어가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힘으로도 신의 화에 맞서지는 못하더라도, 신이 화가 나서 망가뜨린 것을 복구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신들도 겁이 날 것이다. 저렇게 인간을 괴롭히고 나면 인간들이 신들을 존중하거나 숭배하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가질 것이다.

그래서 아픈 분야는 서로 피해가는 것을 존중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일 년 내내 폭풍으로 인간을 다스리거나, 가뭄으로 인간을 내내 괴롭히지는 않는다. 사람에게서 배운걸까 화를 계속 내지 않고 분풀이 정도로 끝을 내는 것을 우리는 인지한다. 바람도 폭풍도 가뭄도 사계절 내내 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 대한 타협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신은 인간을 항상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응 것 같다. 사람도 평소에 신을 섬길 때는 아무런 조건 없이, 틈나는 대로 숭배하고 존경과 존엄을 표시한다. 아마 신들도 인간을 자신들을 섬기게 하는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저 정도면 인간이 감수해야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범위를 정해두고 인간에 대한 내리 사랑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신은 인간이 감수해야하는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때에는 인간이 감수 할 수 없을 정도의 큰일이, 세월호 사건이나 이태원 사건 등은 피어나고 있는 아이들을 수백 명 정도를 희생시키고도 마치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반응하지 않고, 이태원 사건도 그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도 눈도 껌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신이 인간에 대한 감수해야할 범위가 너무 가혹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또,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지진으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어도 꿈적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인간은 신이 정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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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을 생각할까]


그러나, 신들도 할 말은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큰일들을 얼마나 많이 막아 주었는지 아느냐하며 서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땅에 인간이 나타나서 현재까지도, 태양이 아침마다 찾아오는 것, 밤엔 달이 떠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 신의 경지임에 틀림없다. 또한 지구가 망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게 한다는 것도 신이 하는 일일 것인데, 인간은 아무도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연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측면에서는 고마움을 모르는 고약한 인간들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신과 인간 사이에 경계가 필요할 거 같다, 즉 서로의 물성을 존중해야한다는 것이다. 신에게는 신의 전체와 가치를 인정하고 그 성질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신은 인간에 대하여 스스로가 정한 범위 밖의 일이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그 중에도 신도 인간도 동시에 가지는 권리와 의무가 되는 사랑에 대해서는 아주 폭넓게 서로를 인정하고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신들에게도 인간에서와 같은 4가지의 사랑, 쾌락을 추구하고 성적인 사랑을 근간으로하는 에로스(Eros)적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혈육의 사랑인 스토르게(Storge)적 사랑, 친구와의 사랑인 필리아(Philia)적 사랑, 신과 사람의 사랑,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Agape)적 사랑을 펼치고 지낼 것이다.

또 이 위대한 사랑들을 신들의 소유가 아닌 인간들에게도 널리 펼쳐 질수 있도록 바랄 것이다. 특히나 인간들에게 이 사랑의 방법은 거의 절대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에로스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가정을 꾸리고 스토르게적 사랑으로 가족을 유지하며, 사회적인 사랑인 필리아적 사랑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아가페적 사랑으로 내가 아닌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완벽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에 따라 각각 사랑의 깊이가 달라 추구하는 방향도 삶의 목표도 달라질 수 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고 사랑을 키움으로써 자신의 삶에 큰 부분을 부여한다. 봄을 사랑하여 봄을 놓치지 않는 사랑으로 씨앗을 뿌리고, 청춘의 계절에서 최선으로 길러 누구나 기대하는 가을에 수확을 기대하며, 겨울엔 새로운 전략을 짜서 다음해의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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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봄 사랑]


신도 가을을 사랑할 것이다. 인간이 가을을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 신에 대한 고마움도 느끼기 때문일 것 같다. 사람은 삶에서 잘못된 일은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자신을 지켜 주고 있는 신을 원망하며 지낼 것이다. 그 아픔은 또 가을이 되면 재발되어 하늘을 쳐다보며, 또 신을 원망하다 외로움에 빠져들고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래서 인간에겐 특히나, 가을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을을 품는 여유를, 결국 신으로부터 배우고 말 것이다. 때로는 신이 죽었다고 믿을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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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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