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을 KTX를 타고 가로질러갔다. 들판은 어릴 적 내 마음과 너무 닮아 있었고, 목에 방울이 달린 젖 짜는 염소와 새끼들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을 즐겁게 먹고 있었다. 갓 태어난 하얀 아기 염소가 방울을 달랑이며 들판을 헤집고 다니던 모습은 차창에 지나가는 영상 사이로 구름 속 같은 옛 추억을 만끽하게 만들어 주었다. 봄은 잊힌 얘기를 되새김하게 하는 이쁜 염소처럼 다가온다.
저 먼 쪽에서는 옛날에 소가 있을 자리를 트랙터가 움직이고 있고, 가녀린 개울가에는 버들강아지가 봄바람에 넋을 잃고 다가오는 봄을 맞고 있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봄 속으로 달려, 파랗게 자유스러이 춤을 추고 있는 춤꾼들 사이로 치고 들어간다. 누구도 이 벌판에 생명을 틔우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자유스러워서 좋고, 누가 말리지 않아서 좋고, 나의 마음에도 저런 자유가 있었는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다.
빠른 영상 속에서도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보리 이랑이 들어온다. 갓 깨어난 아기 염소처럼 참 곱다. 저 고운 눈은 춤꾼처럼 자유스럽게, 당차게 춤을 추지 못하는데, 비단 체면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농부의 손에 의하여 직접 생명을 틔운 터라 숨결은 고르지만 활발하지는 못하다. 생명을 틔워 준 것에 대한 보답도 해야 할 것이어서 쉽게 몸을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차디찬 뻘밭 속에 처박혀 있던 세월호가 눈에 보인다. 힘을 다해 춤추는 들판의 춤꾼과 얽힌 영상이 지나간다. 갇힌 공간에서의 자유란 무엇이었을까. 비좁은 공간 속에서 자유라는 말을 갖다 붙일 수가 있을까.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등 뒤에서 차갑게 부닥쳐 오는 것을 느낀 생명들에게는 공포 뒤에 무엇이 있었을까.
[금요일엔 돌아오라(팽목), 2019]
아마도 엄마였을 것이다. 또한 넘어가는 숨으로 엄마도 다 못 불렀을 것이다. 움직일 수 있고 자리를 옮길 수 있어야 할 자유가 이렇게 속박되는 것은, 자유에 대한 개념을 잊어버리고, 아예 잃고 사는 어른들 탓이다. 너무 많이 누려 통각조차 없어진 것에 참 할 말이 없다.
우리가 봄을 잃어버렸을 때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으로 지금 생각한다. 어쩌면 생명과 자유는 공존하지 못하는 것으로 가르쳐야 할까? 공존할 수 있다면 그때는 누가 보아도, 느껴도 행복한 세상임에 틀리지 않을 것이다. 꼭, 들을 뺏기고 나서 찾으려면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을 바쳐야 하겠는가. 차라리 자유는 생명의 대가라고, 자유를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지는 않을까.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편리해지고 오늘인지 어제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이 돌아가는 틈새에서 작은 톱니바퀴를 하나 끼워서라도 조금 천천히 돌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 많은 영혼을 별에 재워 놓고도 별을 수치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우리는 과연 누구이며,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가치는 무엇을 바탕으로 일구어져야 하는가. 어째서 저 캄캄한 곳에 피멍으로 얽힌 생명의 주인이 저토록 죄인이 되어야 하고, 우리를 향해 고생 시켜 미안하다고 하는가. 인과응보가 새겨져야 할 세상에서 이를 힘의 논리로 가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사람들은 눈을 보면서 서로의 진실을 인지한다. 꼭 미안하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고운 눈빛을 보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꼭 아이가 집을 나설 때 큰 소리로 인사하지 않아도 그 속에 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아이의 고운 눈은 나의 눈물이 배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예쁜 눈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꼭 두 손으로 용서를 빌지 않아도 고운 눈에 이슬이 내리면 그 진정성을 따라 주어야 한다. 눈은 세상의 창이며, 우주의 창이다. 이런 창을 보고 받아들임으로써 보다 맑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월은 비스듬히 누워있는 저 세월호 만큼이나 답답하다. KTX의 영상이 빠르게 바뀌는데도 세월호에 갇힌 저 자유의 영상은 그 자리에서 내내 맴돌고 있다.
세월을 따라 흐르는 우리의 기억은 치매에 얹힌 것만큼이나 잊혀 갈 것이다.
그래서 봄이 올 때는 봄답게 와야 하나 보다. 적어도 향기 나는 봄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