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견디는 방법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 때가 있다. 재앙의 근원은 내 입에서 잘못 나온 말인 경우가 종종 있어, 언제부턴가 직장에서의 질문에는 Yes / No 로만 가급적 간결히 대답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인 이상 말과 행동의 실수가 없을 수는 없으므로 나에게 날아오는 적의의 화살을 계속 막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나면 우선 나 역시 전사의 피가 끓어오르게 되므로 빨리 이 투쟁심을 가라앉히는 일부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쓰는 효과적인 방법은 현재 내가 받는 하루 일당을 계산해 보고 이 중 대부분의 금액은 내가 하는 가치없는 일보다는 조직생활의 불합리함을 참아내는 정신노동에 대한 대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생각하면 딱히 나쁜 것도 아니어서 다시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돌아올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방법에도 한계가 있는데 화살이 계속해서 오랜 기간동안 날아올 경우 정신노동의 대가가 일당보다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서 이 때 현타와 함께 자칫하면 상대방에 대한 적의가 커져 나 스스로도 같은 반응을 하게 될 위험이 생긴다. 예전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라면 술자리를 통해 화해를 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긴 냉랭한 동물의 왕국인 미국 직장이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소송을 당하거나 원한을 사 심한 경우 총을 맞을 수도 있으므로 늘 한결같은 표정과 태도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좋은 방법을 알려 준 사람은 예전 직장의 B 씨이다. 스트레스의 강도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올라갈 때 B 씨는 우선 현재의 상황을 'Strictly Business' 로만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지금 내 앞에서 적의를 뿜어내고 있는 상대방의 얼굴과 언행을 잠시 제쳐두고, 내가 상대하는 것이 이 사람이 아닌 하나의 비즈니스라고 생각해 본다면, 그/그녀가 뿜어내는 화살 또한 내 서비스를 좋아하지 않는 까다로운 고객사의 피드백이라고 느껴지게 되면서 더 이성적으로 상황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방법의 한 가지 단점이라면 기존에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던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나 또한 하나의 인간이고 결코 완벽한 AI가 될 수는 없으므로 기존의 호의가 적의로 뒤바뀐 상황에서 친구였던 상대방의 인간성을 배제한다는 것이 쉬울 리 없다.
다행히 이번 사건의 경우 나는 늘 당사자와 거리를 두고 있었고 직장에서도 업무 외의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으므로 B 씨의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표정 변화없이 듣고 기계처럼 그 쪽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해 보겠다는 말을 반복하자 상대방은 더욱 감정이 고양되어 언성이 올라가는 상황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 상 직장 생활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먼저 표면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경우 결과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양심을 가진 사람인 이상 일단 화를 내게 되면 이후 감정이 누그러졌을 때 미안함을 갖게 되고, 회사 내에서 자신의 평판에도 영향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이번 일의 당사자는 다행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오해했던 부분이 있었다며 짧은 사과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쉽지 않은 하루였지만 어떻게든 마무리를 하고 일당을 챙겼다. B 씨의 조언 없이 나는 이번 상황을 이렇게 넘길 수 있었을까? 다시금 그의 혜안에 감탄하며 내상을 입은 몸으로 달리기를 하러 갔다. 30분 동안 정신없이 뛰고 나니 다시 머릿속이 텅 비워지는 느낌이다. 다음 주에는 어떤 재미난 일들이 있을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잠자리에 들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