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모호함
중년, 보통 40대를 이야기하는 이 나이대는 참으로 모호한 시기인 것 같다. 오래 살았다고 하기엔 애매한 세월을 보내 왔고 20-30대가 주를 이루는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40대는 더 이상 청춘을 이야기할 수 없는 나이이기도 하다.
지금껏 신념을 갖고 살아 왔던 것들에 대한 회의, 그리고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확실히 경험했기에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는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버리자니 고단하게 남은 인생길이 아직 멀다. 차라리 지금까지의 기억이 전부 없어져 버린다면 추진력을 낼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투명한 마음과 시선으로 현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상대하며 열정을 퍼붓던 예전의 모습으로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사람보다는 상황을 더 믿게 되면서 인간 관계에 신경쓰는 것보다 더 나은 상황을 가져오기 위해 힘쓰는 나의 모습은 마치 기계인간과 같다. 이런 태도로 매일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인간관계의 메마름을 안타까워하는 나의 마음은 모순에 가득차 있다.
내가 밥벌이로 택한 현재의 직업으로 과연 얼마 동안이나 잘리지 않고 끈질기게 붙어있을 수 있을까. 이전 직장의 구조조정 경험을 통해 이미 난 조금도 회사 조직을 신뢰하지 않기에 오늘도 다른 스킬을 익혀 보고자 지금의 업종과 다른 곳에 부지런히 원격 근무 이력서를 내어 본다.
젊음의 아이콘인 스타트업은 태생적으로 중년 구직자를 싫어한다. 돈을 더 달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머리가 낡은 사람이라 생각하는지, 여기저기 신경 쓸 일이 많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것 같은지 좀처럼 다음 단계까지 가는 일이 드물다.
중견 기업은 하나같이 경력자를 원한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몸값이 싼' 경력자를. 현 회사의 모 조직에서 레이오프 소식이 들리면 리쿠르터들은 어디서 알았는지 쉴새없이 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한다. 난 대상자가 아니기에 몸값을 후려칠 수 없다는 상황을 알게 되면 이들은 즉시 연락을 끊는다.
언제부턴가 취업 사이트에 올라오는 절반 이상의 공고는 스태핑 회사에서 내는 비 간접/마케팅용 공고임을 알게 되면서 구직자로서 해야 할 첫 번째 숙제는 나를 이용해 돈을 벌어가려는 이 업체들을 걸러내는 일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복잡한 인생길, 신경써야 할 것이 늘어만 간다.
손쉽게 퇴사를 감행할 수 있었던 20-30대와 달리 자발적 퇴사란 이미 선택지에 없다. 지금껏 쌓아 온 애매한 연봉을 지키기 위해 하루의 싸움을 하고, 남은 에너지로 제2의 인생을 계획하는 일을 계속할 뿐... 한 번 올라탄 러닝머신에서 그저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달려야 한다는 마음 외에 별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 달려야 하는지를 묻고 달리면 되었던 젊은 시절에서 이제는 달려야 하기 때문에 '왜'라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이상한 입장이 되었다. 왜 달려야 하는 것인가? 그저 돈 때문인가, 불확실한 현실이 싫어서인가, 아니면 하루하루 발버둥 치는것이 인생의 가치를 찾는 과정이라서?
차라리 지금이 멈출 수 있는 때라면, 앞으로의 삶을 좀 더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말을 하면서 깔끔하게 은퇴한다는 어이없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인생의 4 계절 가운데서도 참으로 애매한, 여름과 가을의 중간 사이에 지금의 나는 서 있다.
따뜻한 봄과 여름의 시절에서 멈춰버린 마음은 서서히 가을을 향해 가는 몸뚱아리를 따라잡을 생각이 없다. 농사가 끝난 겨울의 한적감보다 추수할 일이 많은 가을의 번거로움 앞에 그저 몸뚱아리를 안전한 방향으로 계속 굴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애매한 지성에 애매한 경험, 그리고 애매한 인생의 목표. 공자는 어떻게 나이 마흔에 '불혹'을 이야기했는지 보통의 인간인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공자 정도 되는 사람이 나이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면 나는 육십이 넘어서도 그걸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허탈감과 더불어.
중년이 되면 노련한 완숙미로 인생을 이해하는 때가 오리라 생각했었다. 천만에, 그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뿐인 평범한 인생이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게, '오늘도 하루를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보내었다' 로 마무리지으며 잠자리에 든다.
내일이 되어도 아마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