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받아들이는 힘
평범히 무색무취의 일상을 살고 있는 나에게 간혹 이민에 대해 문의해 오시는 지인들이 있다.
이 분들께 내가 먼저 질문드리는 내용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주변인으로 살 각오가 되어 있으신지요?
2) 처음 10년 고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지요?
3) 가족 분들은 같은 생각이신지요?
이 글에서는 첫 번째의 질문에 대해 나의 경험과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민 생활을 하며 겪는 여러 가지의 고충들은 상당 부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것들이 많다. 비록 신분의 문제, 직장의 문제, 내 집 마련 및 경제적 자유와 같은 큰 문제들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손쉽게 해결되지 않을지라도 일반적인 생활의 문제들은 익숙해짐과 적응을 통해 서서히 삶 한가운데에 녹아들게 된다. 그 나라의 말도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익숙해지고, 어느 덧 뻔뻔히 립서비스를 날리면서 상황에 맞는 처신을 하고 영수증 및 문서 기록을 잊지 않고 챙기며 세금 보고 및 예기치 못한 분쟁에 대비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람은 참으로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해결되어도 1세대 이민자의 경우 평생 안고 가야 할 과업과도 같은 고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글의 주제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삶' 이다. 주변인의 사전적 정의는 '둘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아니하는 사람.' 이라고 쓰여 있다. (출처: https://wordrow.kr)
이미 해외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 아닌 타 국가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나 또한 길을 가다 'Go back to your country' 와 같은 혐오성 발언을 들은 적이 있고, 사업부 제품 및 기술을 홍보해 줘야 할 영업/마케팅 사원이 좀처럼 대화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으려 했으며, 직장 동료들과 같은 인간으로서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까지 수 년간의 신뢰를 쌓아가는 시간이 걸리는 등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했고 앞으로도 계속 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태어나 자란 곳 또한 나에게 비 호의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깨닫는 순간이 오며, 이 때 비로소 '주변인' 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현지 회사에서 설계직으로 일하다 한국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가끔 기술 마케팅 보조차 한국 바이어들을 만나는 순간이 오는데, 이 '갑' 의 포지션에 위치한 바이어들을 상대할 때 이들이 나와 같은 1세대 이민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더 여과없이 느낄 수 있어 내면적으로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된다.
비록 나의 제한된 경험에 근거하지만, 1세대 이민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보통 다음과 같다.
1) 부모 잘 만나거나 돈이 많아 해외에 나가 사는 운 좋은 사람
2) 한국에 자리가 없어 힘들게 해외 생활을 하는 불쌍한 사람
3) 양 나라에서 이득을 취하는 기회주의자
4) 열심히 노력해 해외에서 새 삶을 이룬 개인/자유주의자
1) 번의 경우 대체로 실무에서 마주치는 일반 사원급이 많았다. 이들의 경우 '협업'의 과정 동안 자신 내면에 담아두었던 분노를 나에게 표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 번의 경우 좀 더 나이가 있는, 중역 또는 임원급이 많았다. 이민자의 현실을 대체로 잘 알고 있으며 '갑'으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3) 번의 경우 전반적으로 통용되어 있는 정서였던 것 같다. 돈은 다른 나라에서 벌고 자식은 다른 나라에서 교육을 받게 하면서 업무상 필요하니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모양새가 좋지 않게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4) 번의 경우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젊은 세대 및 자녀의 교육을 계획하는 가장들이 많았다. 이들은 현지 정보와 나의 정착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수 많은 이민자들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고, 경제적 상황 및 삶의 방식이 다르다 보니 이처럼 다양한 시선이 생기는 것 또한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한 4) 번의 경우 당사자들 또한 해외에서의 삶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중립적 또는 호의적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 비 호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하다. 결국 시간이 지나 이민 간 곳이 나의 주 거주처가 되는 시점에서 나는 두 나라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환영받기는 힘든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 방식 또한 여러 가지인데, 보통 맞대응 하거나 새로 맺어진 인간 관계 속에서 속풀이를 통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맞대응 하는 경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있겠으나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요즘처럼 사람 사이에 여유가 없고 험악한 사회에 현명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다음은 사색, 운동 또는 음주를 통해 속으로 삭히거나 현지에서 새로 형성된 인간 관계를 통한 속풀이를 하는 방식이 있다.
자기파괴적인 음주를 제외한 사색 및 운동은 좋은 방법이나 인간 관계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경우, 많은 사람이 오고 떠나가며 관계를 맺고 끊는 이민 생활의 특성상 관계가 파괴될 경우 때론 더 큰 정서적 상실감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내가 '주변인' 이 되고, 양쪽 집단의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책 '뇌내혁명' 의 저자인 '하루야마 시게오' 씨가 어릴 적 가족 중 한 분이 돌아가셨을 때 썼다고 하는 방법인데, 저자의 경험에 의하면 막연히 장례식장에 있을 때에는 고인에 대한 추억과 슬픔으로 견딜 수 없었는데, 태어난 이상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가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변인' 이 되는 것을 '당연하다' 고 생각하고 느낀 다음부터 나는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변 상황에 요동치는 일 없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때론 그 상황을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자세, 이민 생활에서의 일상 유지를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이민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께 나는 이 질문을 첫 번째로 드리는 것이다. 주변인으로 살 각오가 되어 있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