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의실패 01: 크리에이터의 대기전력

일상의 실패

by failit
‘새로운 기획서가 필요하겠다. 일단 오늘은 쉬고. 생각해서 다시 만나자.’

마케터, 콘텐츠 기획자, 혹은 제작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발화 상황이나 화자에 따라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뜻하는 바는 같다. 쉽게 말해서 밤새자는 얘기다.





대기전력이란 말, 알아?

컴퓨터나 TV 같은 가전제품에는 대기전력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대기전력이란 말 그대로 대기 중의 예비 에너지다. 전원이 꺼진 TV를 생각해 보라.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활동이나 행동을 취하지 않지만, 언제라도 화면을 송출할 수 있도록 대기전력을 비축하고 있다. 대기전력 덕분에, 우리는 한 번의 버튼 클릭만으로 언제든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 쉬는 동안, 불이 꺼진 TV는 도약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떨까?


인간 역시 다르지 않다. 전원이 꺼진 순간. 깊숙이 잠든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보일 때, 대기전력은 충전된다. 수면을 취하고 멍을 때리면서 신체는 회복하고 뇌는 정리된다. 인간이라는 복잡한 가전제품의 손쉬운 구동 원리다. 다른 모든 가전제품과 다를 바가 없다. 만일 제때 휴식을 취하지 못하면, 인간의 효율성은 급격하게 떨어진다. 램에 무리가 간 컴퓨터 CPU는 실제로 느려지니까. 효율성이 떨어지면 불편이 생긴다. 불편이 생기면 불만이 늘어난다.

그래서 수면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서글프다.

촉박한 마감, 무리한 일정 변경 등, 온갖 변수들이 크리에이터들을 압박해온다. 그리곤 말하겠지. '오늘은 정리하고, 내일 다시 보자'라던가. 혹은 '마감이 당겨졌다, 무리겠지만 부탁드린다’ 하는 말들을. 흘려들으면 문제없어 보이지만, 다시 들으면 대기전력의 축적 시간 따위 가뿐하게 누락된 문장이다. 그게 문제다. 그렇게 모두가 잠드는 시간에, 크리에이터는 잠들지 못한다. 잠들지 못하면 램이, 아니 뇌가 느려지고 성능이 저하된다. 원하는 결괏값도 나오지 않는다.


결국 꼬리물기다. 도시가 잠드는 밤, 크리에이터는 대기전력의 비축에 실패한다. 휴식이 부족하니 잠자기에 실패한다. 잠자기에 실패하니 뇌가 느려진다. 뇌가 느려지니 새로운 콘텐츠 제작도 실패한다. 이해는 한다. 모두가 급하니까. 모두가 더 나은 결과물을 원하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에겐 절실하다. 숙면이라는 이름의 대기전력이.




딱 한 번이면 된다. 딱 한 번만 그 물고 물리는 반복의 흐름을 끊어줄 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오늘도 크리에이터의 밤은 전력 부족이다. fin.



글: 말하는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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