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입니다

남도여행 #1 - 전남 영광

by 파주

걱정했다. 하필 영광과 무안이라서. 아니나 다를까 여행지에 다다르니 아재 개그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여기에 오다니
전남 영광입니다

뻔한 말장난에 실소를 품는 것도 잠시, 괜한 경쟁심이 솟는 바람에 더 몹쓸 말장난으로 받아치고 말았다.


그런 개그는
전남 무안하네요


입사 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2016년 가을, 전남으로 첫 번째 출장을 떠났다. 햇병아리 여행기자에게 주어진 특명이래야 패키지여행에 따라가 무난한 사진과 적당한 글감을 구해오는 게 고작이었을 테지만, 세상 모든 일이 중책처럼 느껴지는 수습기자인지라 나이가 세 곱절은 족히 되는 일행을 비장한 표정으로 따라나섰다. 여행이 일이 되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굴비


역시나 먹거리의 고장다웠다. 영광 법성포의 한정식집에서 시작한 여행은 풍성했다. 지역 대표음식인 굴비에 게장, 홍어삼합, 각종 밑반찬이 오르니 밥상에 공간이 부족해 매운탕을 뒷전으로 밀어둬야 할 지경이었다. ‘진짜배기 굴비’를 맛 보여주겠다는 여행 가이드님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짭조름한 보리굴비부터 구수한 김치까지, 어디에 젓가락을 갖다 대어도 만족스러웠던 식탁에는 남도음식의 자부심이 엿보였다. 후식으로 쥐어준 모싯잎송편으로 입가심을 하고 나면 ‘남도는 무조건 식후경’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그 유명한 영광 굴비. 아무리 기대해도 실망하지 않을 맛이다


서해바다와 산 사이에 끼어 있는 탓에 법성포의 여름은 무덥고, 겨울엔 혹독한 추위가 찾아온다고 했다. 사람이 살기엔 힘들지만 굴비를 말리기엔 최적의 조건인 셈이다. 특유의 건조 기술과 전통 염장 비법이 수백 년의 세월을 거쳐 전해 내려와 지금의 ‘영광 법성포 굴비’라는 브랜드를 지켜왔다.


제목없음_13.jpg 총 거리가 5.61km에 이르는 굴비길. 굴비의 성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덕분에 법성포에는 굴비 식당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다. 상수동 카페거리처럼, 굴비 거리가 따로 없다고 생각할 즈음 안내도를 발견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굴비길 중심부였다. 5.61km에 이르는 생태탐방로를 보고 있자니 법성포는 가히 ‘굴비의 성지’라 불릴 만했다.



법성포의 시퀀스를 따라서


하지만 진짜배기 성지는 따로 있었으니 다음 행선지인 법성포였다. 법성포는 그 이름 자체에 백제불교의 최초 도래지임을 내포한단다.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인도 승려 마라난타를 가리킨다.


불교의 전래 경로가 분명한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백제의 불교 전파는 동국대학교의 학술 고증을 통해 최근에서야 밝혀졌다. 명승 마라난타가 서기 384년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최초로 발을 디뎠다는 이곳은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개발돼 여행자들이 찾아들고 있다.


제목없음_6.jpg 언덕에 올라 바라본 법성포의 전경


<알쓸신잡 2>에서 유현준 교수가 영주 부석사를 두고 말했듯이,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로 가는 길목에도 일종의 시퀀스가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숲으로 꼽힌 숲쟁이 꽃동산이 그 시작점이다. 동산 초입에 들어서면 형형색색으로 만개한 꽃이 여행자를 반긴다. 굴비와 불상만을 기대하며 영광을 찾은 이들에게 주는 깜짝 선물인 셈이다. 양쪽으로 펼쳐진 꽃동산과 영광 앞바다의 풍광을 눈에 담으며 여유롭게 언덕을 오르면, 금세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에 이른다.


제목없음_8.jpg 꽃동산 말미에 우거진 숲을 지나면 이색적인 모양의 탑원과 마주한다


꽃동산 말미에 우거진 숲을 지나면 이색적인 모양의 탑원과 마주한다. 원불교 간다라 양식을 취한 백제불교의 흔적들은 조계종에 익숙한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불상을 보호하듯 구성된 탑원은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에서 가장 멋스러운 볼거리다. 특히 유려한 형상의 불탑은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이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불상은 개성 있는 얼굴로 제각기 멋을 뽐내고 있다.


제목없음_9.jpg 낯선 얼굴을 한 반가사유보살상


간다라 색채를 가득 머금은 불상들을 렌즈에 담고 있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마치 강아지인 양 다리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고양이의 이름은 ‘백제’. 이곳의 명물이란다. 마땅히 주인이 없다는 해설사의 설명과 달리, 백제는 털이 뽀얗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왔다. 주변을 빙빙 돌던 놈은 일분이 채 되지도 않아 눈도장을 다 찍었다는 듯 미련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를 배회하는 길고양이 백제라니, 법성포 사람들의 작명 센스는 풍경만큼 낭만적이었다.


제목없음_10.jpg 법성포의 명물인 고양이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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