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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Jun 10. 2022

나의 행복일지

1
“자주자주 행복하세요.”

2년 전부터였나. 메일을 쓰거나 카톡을 마무리할 때 나의 인사는 수신자의 행복을 기원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누군가는 상대방이 무탈하기를 혹은 삶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나는 이 메시지의 수신자가 행복감을 자주 느끼기를 바란다.

사실 이 인사말의 방점은 행복하라는 게 아니라 ‘자주’라는 빈도에 있다. '행복감이라는 건  헬륨가스를 가득 머금은 풍선 같은 것이라 잠시라도 눈길을 떼면 이내 날아가 버리고 만다'라는 나의 깊은 믿음이 내재되어 있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볼 때든 아니면 기가 막힌 풍경을 보면서 감탄을 하든, 그때 찾아오는 행복은 ‘왔구나’하고 자각하는 순간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한동안은 나에게 주어진 일말의 행복을 누리려고 안달복달 한 적도 다. 떨어지는 벚꽃을 볼 때. 바위산 뒤로 넘어가는 노을을 볼 때. 그럴 때마다 나는 당장의 행복감을 어디에 보관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행복에 끊임없이 집착했지만 행복감을 오래도록 누리는 노하우는 여전히 익히지 못했다. 이제는 그 빌어먹을 풍선이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작아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행복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복의 정체는 실시간으로 늙어가면서 느끼는 찰나의 기쁨.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근본 없는 춤사위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라는 기원 앞에 ‘자주’라는 말을 구태여 두 번이나 붙인다. 행복이라는 건 이를 악물고 힘껏 쥔 대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니, 잦은 빈도라도 행복감이 찾아오라는 기원이다.

행복의 엉덩이가 원체 가벼운 탓인지 조금의 틈만 나면 훌쩍훌쩍 떠나버리고 만다. 그리고 행복이 머물던 그 빈자리는 다른 것들이 웅크리고 앉는다. 행복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허탈함, 공허함 같은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런 쓰레기 같은 감정을 맞닥뜨릴 때마다 사무치는 괴로움을 느낀다. ‘고작 몇 초의 행복을 누렸다고 나에게 이런 시련을?‘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때로는 행복을 느끼는 게 두렵기까지 하다.


2
며칠 전 이누이트인들의 감정 해소법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화가 나면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는 이누이트인들은 화가 풀릴 때까지 끝도 없이 펼쳐진 얼음 평원을 걷고 또 걷는다고. 그들은 화가 다 풀리면 멈춰 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집을 등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던 길이 화를 삭이기 위한 길이라면 돌아오는 길은 뉘우침과 용서의 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일화를 접하곤 이누이트인들의 유별난 화풀이법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온갖 잡생각을 풀어놓고 말았다. 막상 화가 난다고 상을 엎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얇게 입었으면 어쩌지. 걷다가 북극곰이라도 만나면, 근데 그게 또 한참 동안을 굶주린 놈이면 어쩌지. 돌아올 때 화가 식으면 또 얼마나 추울까. 나 같으면 일분 만에 추위에 화가 꽁꽁 얼어붙어 집으로 기어들어가겠는데, 하는 식의 잡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요즘에는 나도 무작정 걷는다. 화가 날 때만 그런 것은 아니고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싶을 때(거의 매일) 밖으로 나선다. 동네 어디로든 정처 없이 거닐다 보면 하루에 이만 보를 걷게 되는 날도 있다.

직접 걷고 나서야 깨달은 건 망령처럼 늘 내 주위를 서성이던 잡생각이 조금은 사그라든다는 거다. 대신 그 빈자리를 걷는 동안 마주친 풍경과 인상적인 기억 몇 조각으로 채운다. 이누이트의 분노해소법, 그러니까 걷는 행위가 구리고 불쾌한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에 특효약인 걸 몸소 알았다.

하루 종일 바라보던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꽂아두고 걷기 시작하면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내밀한 생각들, 정체를 숨기고 있던 감정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전전두엽을 통통 두드리는 것만 같다. 값비싼 서울 아파트 사이로 흐르는 개천 옆을 반쯤 달리듯 걸으면서 ‘햇살엔 세금이 안 붙어 참 다행이야’ 같은 간질거리는 가사를 들으면 지금의 삶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나에게 있어 걷기란 일상 속에서 행복을 추출하는 행위, '보장된 행복'을 부르는 의식이다.


3
최근까지 내가 누리던 보장된 행복 중 하나는 <나의 해방일지>였다. 누군가의 글로 빚어진 가상의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작은 해방을 향해가는 몸부림를 보며 나도 덩달아 해방감을 느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는 구씨에게 하루에 딱 오분만 행복하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오분이야말로 현실적으로 행복감을 쟁취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했다. 미정이 또한 구씨를 온 마음으로 추앙했을 것이기에. 적당한 시간이 아니라 분명 하루에 행복할 수 있는 최대치를 상정했을 거라고 믿어서다.

여하튼 나는 구씨를 향한 미정이의 기원처럼 하루 딱 오분만 행복감을 채우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있는 기쁨, 없는 안도감을 죄다 끌어모아 하루에 딱 오분씩만 행복해 보기로. 거창한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오십 원짜리 동전 같은 짤짤이 행복들을 긁어모아 소소하게나마 행복감을 느끼기로. 맛있는 원두를 내려  만든 아아를 마시는 행복. 출근길에 랜덤재생한 멜론에서 최애곡이 흘러나와 솟는 행복. 며칠 전 이제 막 합정역을 지나는 출근길에서 ‘오늘 하루 더 힘을 내라’는 기관사의 안내방송에 감동하는 행복. 그런 짤짤이 행복들을 부지런히 긁어모으다 보면 오분을 훌쩍 넘기는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

일에 허덕이느라 새로운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 날이래도 괜찮다. 화가 잔뜩 오른 이누이트인의 심정을 상상하며 무작정 걷기, 부모님과 갔던 여행 사진 들춰보기, 인센스가 타들어 가는 동안 빈백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멍 때리기, 에어컨을 켜두고 전기요 속에 쏙 들어가 눕기, 온기 가득한 풀칠 품앗이를 읽고 또 읽기… 내게는 보장된 행복이 이렇게나 잔뜩 있으니까.


요즘 나의 최우선 목표는 무시로 다가오는 행복의 모가지를 가능한 오래도록 그리고 힘껏 움켜쥐는 거다. 나훈아 아저씨가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 내듯이, 나는 잠깐 머물다 가는 이 행복들을 가득 안고 마음껏 즐기리라. 이게 내가 꿈꾸는 작은 해방이자 나의 생존 동력이다.

이 글 한 편을 쓰는 동안 7분쯤 되는 행복을 건졌다. 하루의 목표치를 훌쩍 넘긴, 차고 넘치는 행복이다. 나는 내일도 온종일 행복들을 찾아 하루를 촘촘하게 채울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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