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서서 새치를 몇 가닥 뽑다가 문득 큰 슬픔이 찾아왔다. 어린 시절 뉴스에서 보아온 인터뷰이의 머리가 대부분 희끗희끗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삼국지 속 유능한 인물의 시그니처가 백발이었기 때문일까. 내게 있어 흰머리는 곧 전문가의 상징이었는데. 거울 앞에 있는 더벅머리 아저씨에게선 어떠한 전문성도 기대할 수 없어 보였다.
정수리 모공 곳곳에서 점점 더 많은 수의 흰머리가 솟아나고 있건만. 전문성이라는 건 어디에서도 튀어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하는 일이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기도 하고. (내가 가진 자격증이라곤 장롱면허뿐!) 어떤 일을 맡아서 할 때마다 매번 처음 하는 업무처럼 어렵고 위태로운 느낌이었다.
전문성을 떠올리며 터져 나오는 슬픔은 곧 ‘나이를 먹은 만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물론 나이가 든다고 전부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듯, 회사를 오래 다닌다고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일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저 양반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을 늘 목격해 왔다. 그리고 이제는 당장 내가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되고 있구나 하는 공포가 찾아왔다. 내세울 만한 전문성 없이 연차만 뒤룩뒤룩 찌우고 있는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때마침 역할기술서를 쓰라는 회사의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구성원의 성장을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여기는 이 회사는 연말연초마다 한 해의 계획과 함께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정의하라고 한다. 일 년 전에 내가 뭐라고 적어냈던가. 벌써 서너 번쯤 한 일인데도 가물가물했다. '중요 문서'라고 이름 지은 폴더를 뒤적여 작년에 적은 엑셀 파일을 켰다.
‘직무 및 역할 정의’란에는 내가 썼음에도 낯설고 알쏭달쏭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연초에는 나의 역할을 ‘메시지를 매력적인 콘텐츠로 빚어내는 일’이라고, 같은 해 연말에는 ‘전달하고 하는 메시지를 정제하여 콘텐츠에 담아내는 일’이라고 답했다. 요약하자면 내가 정의한 에디터의 역할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콘텐츠라는 형태에 담아내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비장한 각오로 적어둔 말이지만 솔직히 메시지고 콘텐츠고 너무나 추상적인 말뿐이었다. 되려 내가 내린 에디터의 정의를 보고 난 뒤 더 큰 혼란만 찾아왔다. 에디터란 무엇인가. 에디터로 일하는 나는 또 누구인가.
N년차 에디터인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이런 생각덩어리를 머릿속에서 저글링 하고 있자니 작년에 온라인에서 있던 일화가 떠올랐다. 러닝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온라인 리추얼 모임에 참여한 첫 날, 노트북 앞에 모인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자신에 대해 말할 때는 저마다의 러닝 경력을 자랑하듯 드러냈는데, 10년차 러너부터 올해부터 달리기 시작했다는 새싹 러너까지 달리기 경력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중에는 오늘부터 뛰기로 했다는 풋내기 러너도 있었다. 여태껏 살면서 제대로 뛰어본 게 오늘이 처음이라고 밝힌 그 사람은 자신의 무경험을 부끄러워하기보다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에 설렘을 한껏 드러냈다.
당장 오늘이 첫걸음이래도 스스로를 러너라 칭할 수 있는 자신감.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하는 순간부터가 출발선에 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무엇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한 게 꽤 오래전의 일이다. ‘에디터’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한 것 또한 언제 적 일인지 모르겠다.
역할기술서 제출 마감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다. 이번만큼은 ‘콘텐츠’나 ‘메시지’ 같은, 나조차 그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단어들로 내가 하는 일을 정의하지 않으려 한다. 하루 8시간 이상, 주5일 일하는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치열하게 묻고 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