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신은 믿지 않아도 휴일은 철석같이 믿는 21세기. 여기 연휴 첫날에 자발적으로 출근한 직장인이 있다. 무려 4일간의 연휴가 막 시작했건만 그는 고향에 가거나 침대에 드러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대신 노트북을 싸 들고 회사로 갔다. 대관절 무엇이 그를 텅 빈 사무실에 불을 밝히고 모니터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들었나. 그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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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음 표면에서 가장 흔하게 관측되는 감정은 자기연민이다. 적정량의 자기연민은 스스로를 탓하는 걸 방지해 주는 일종의 면역체계 역할을 해주지만, 자기연민이 지나치게 증식해버리면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여기거나, 급기야는 인스타에 눈물 셀카를 올리게 되는 등 사람이 영 밥맛이 되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눈물 셀카 전문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자기연민이 느껴지는 상황에선 재빨리 한 발 뒤로 물러선 다음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그의 눈가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턱엔 수염이 수북하다. 위험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게 아니라 위험이 있는 환경을 슬쩍 피하는 것임을 충분히 알 법한 액면가다. 이 늙어가는 직장인이 남들 다 쉬는 연휴에, 혼자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앉아서, 궁상을 떨고 있는 이유가 자기연민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닐 것 같다. 자기연민은 일에서 비롯된 현상일 뿐 일을 하게 된 원인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자기연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그거 로봇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로봇은 연휴에 일해도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진 않을 테니까. (아닌 게 아니라 사무실 구석에 놓인 서버 컴퓨터들은 괴로운 빛 하나 없이 묵묵히 돌아가고 있다.) 인간이 연휴에 자발적으로 출근하는 원인을 찾기 위해선 마음의 조금 더 깊숙한 곳을 들여다봐야 한다.
< 누군가 연휴 첫날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인간인가? >
<…자기연민 반응에서 양성이 나왔으므로 인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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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억을 뒤져본 결과, 일을 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데에 도움이 될만한 데이터를 몇 개 찾았다. 그는 과거에 일을 하는 이유를 답해야 하는 상황을 종종 겪었다.
몇 달 전. 어느 회의실에서. 옷차림이 단정한 걸 보아하니 면접을 보는 중 같다.
“지원자님에게 일이란 무엇입니까?”
“제게 일은 돈을 버는 수단에 그치지 않습니다. 일은 제 인생 그 잡채(MZ세대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입니다. 일하는 시간이 하루 중 차지하는 퍼센테이지를 한 번 보십시오. 저는 '워라밸'이라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덕업일치'라는 말을 신봉합니다.”
면접관에게 하는 말이므로, 거짓일 확률이 매우 높은 부정확한 데이터지만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위의 진술에선 일에 대한 두 갈래의 주류 사고 방식-'워라밸'과 '덕업일치'-에서,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워라밸'에서 일은 수단이다. '덕업일치'에서 일은 ‘인생 그 잡채’다.
그는 스스로를 일에 인생을 바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덕업일치파'라고 소개하고 회사에 들어갔다. 그가 연휴에 일하는 이유는 국가가 정한 공휴일보다 회사와 맺은 구두계약이 더 우위에 있다고 판단해서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데이터. 점심시간이다. 그는 회사 동료와 함께 밥을 먹고 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회사가 뭐가 좋아서?”
“회사가 좋거나, 회사가 잘해줘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제가 하기로 정한 거라 하는 겁니다.”
회사 동료에게 한 얘기이므로 허세가 섞였을 가능성이 큰 부정확한 데이터지만, 이번에도 주목할 만한 점은 있다. 이 대화에는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잔혹한 존재 조건에 정신승리를 거두기 위해 인간이 발명해 낸 사고방식이 녹아들어 있다. 인간은 영원히 산 위로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존재다. 이 형벌에서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은 돌 굴리기를 좋아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슬로건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정도가 되려나. 오직 인간만이 선택을 통해 인생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
그는 어쩌면 이 오래된 이야기의 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피라미드 이래로 인간이 이뤄낸 모든 위대한 업적들은 죄다 끊임없는 바위 굴리기의 결과라고 믿으며, 지금 연휴에 출근해서 자판을 두들겨대는 지금 이 순간을 과거의 위대한 역사들과 동일선상에 끌어다 놓을 줄 아는 야심가인가?
그리고 또 다른 데이터. 언젠가 그의 애인이 물었다. “일 그렇게 해서 뭐 하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완벽한 야심가 테스트는 통과하지 못한 셈이다. 야심이란 사랑을 희생시킴으로써 완성되는 법, 애인 앞에서 멈추는 야심이란 허무가 깃든 쭉정이일 뿐이다.
이 사례들을 종합해 보건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인생 시간의 대부분, 스스로 짊어진 의무 혹은 자유, 좀 오바하면 문명의 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 즉 허무다. 이 단어들을 재조합해 보면 일의 정체에 대한 제법 재밌는 아포리즘을 뽑아낼 수 있다.
일은 의미다. 또한 의무다. 하지만 허무다. 의무란 말은 어쩌면 ‘의’미와 허’무’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왜 인간은 의미와 허무 사이에 문명이라는 위태로운 탑을 쌓아 올려야 했을까? 연휴에 일을 하면서까지? 그냥 행복한 보노보로 남아 무화과나 찾으러 다니지 않고서?
<연휴 첫날, 누군가 사무실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등을 긁고 있다. 털이 많다. 그는 인간인가, 보노보인가?>
<허무 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으므로,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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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연민을 무릅쓰며, 또 허무를 애써 무시하며, 그는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하고 있다. 화면을 자세히 보자. 화면엔 커다란 달력이 떠 있다. 그는 달력에 블록을 생성하고, 그 블록 안에 무언가 체크리스트를 생성하고, 블록의 길이를 늘렸다가, 잠시 고민하고, 블록을 드래그해서 달력의 다른 자리에 가져다 둔다. 달력엔 블록들이 그렇게 점점 쌓여만 간다. 그는 일정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정 관리를 도와주는 프로그램들을 우리는 ‘생산성’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일정 관리야말로 생산성의 적이다. 컴퓨터는 일정 관리를 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그냥 일을 한다. 인간은 왜 일정을 따로 빼서라도 일정을 관리해야 하는가? 이유는 단 하나, 불안해서다.
불안이야말로 문명의 동력이라고 주장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아주 먼 옛날, 유난히 근심 걱정이 많던 보노보는 무화과를 충분히 찾지 못할 것이 늘 걱정이었다. 주당 30시간 미만을 투자해 먹고사는 데 충분한 무화과를 구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걱정이었다. 그는 예측 가능성을 원했고, 위험을 통제하길 원했기에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주당 근로시간은 급속도로 늘어났고, 무화과 따기에 최적화된 하드웨어엔 골병이 찾아왔지만 불안한 보노보는 멈추지 않았다. 엄청나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 보노보의 후손들은 스마트폰, 우주선, 에어프라이어를 발명해 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했다. 그래서 연휴 첫날에 근사한 카페에 가서 초콜릿을 사 먹는 대신 사무실에 출근해서 캘린더에 체크리스트를 입력한다. 예측 가능성을 위해서. 먼 옛날 그의 선조가 무화과를 찾으러 여유롭게 초원을 거니는 대신, 수확이라는 예측 가능성을 위해 땡볕에 허리를 숙이고 일주일에 60시간 이상 쟁기질을 해댔던 것처럼. 그는 결국 불안해서 연휴에 출근했나 보다. 불안이 전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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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핸드폰에 무언가 알람이 온다. 알람을 확인한 그는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 연민과 의미와 의무, 그리고 허무를 지나. 캘린더 위로 드리워진 불안도 겅중 뛰어넘고서.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어느새 그는 회사 로비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 같다. 이윽고 누군가 회전문을 밀고 들어온다. “배달이요”
자리로 돌아와 비닐봉지를 끄르는 그의 얼굴은 환희로 빛난다. 신이 난 나머지 혼잣말에 곡조를 붙여 흥얼거리기까지 한다. “법카는 못 참지” 은박지를 벗겨내자 티라미수 케이크가 자태를 드러냈다. 그의 회사는 휴일에 출근 시 법인카드로 무언가 맛있는 걸 사 먹을 수 있다. 티라미수를 한 입 떠서 먹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음. 이 맛이야”
이제 우리는 그가 출근을 한 이유를 파악해 낼 수 있다. 법카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틀린 명제다. 자기 연민 때문에 출근했다는 것도, 일의 의미 때문에 출근했다는 것도, 불안 때문에 출근했다는 것도 비슷한 연유로 틀린 명제다. 그가 출근 한 이유는 이 모든 것의 총합이다.
그가 티라미수를 한 입 떠먹고 뱉은 ‘이 맛이야’는 케이크가 맛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만, 동시에 인생의 어떤 묘를 마주친 감상으로도 들린다. 층층이 쌓인 티라미수는 여태껏 우리가 통과해 온, 연휴에 출근한 직장인의 마음의 단면에 완벽히 대응되므로.
겉표면엔 자기 연민처럼 매캐한 코코아가루가 흩뿌려져 있다. 그 아래엔 삶에서 의미를 발라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듯한 달걀노른자와, 달콤한 정신승리를 상징하는 설탕, 문명의 가장 오래된 전리품 중 하나인 치즈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내 섞여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풀어져 크림이 되어버린다. 크림 아래엔 불안에 쉬지 못하는 우리네 육신 같은, 커피에 푹 절여진 스펀지케이크가 있다. 그리고 맨 밑엔 그럼에도 세상을 좋아할 수 있게 만드는 이유, 삶의 다른 모든 구질구질한 면을 타고 흘러 가장 깊은 곳에 고인 일말의 즐거움이 있다. 그 에센스는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향기를 뿜어내 삶을 먹음직스럽게 포장해 낸다. 이 모든 것의 총합, 티라미수가 아니고선 절대로 직장인을 연휴 휴일에 출근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연휴 첫날, 누군가 회사에 출근해 법인카드로 티라미수를 사 먹고 있다. 그는 인간인가?>
<…맛있겠다.>
연휴에 출근한 직장인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나. 티라미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