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일하는 김에 놀러 다니기
일정 요약
8월 13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Salzburg)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Ljubljana)
교통: Monatsticket Region Salzburg+Nord + ÖBB Salzburg-Ljubljana
숙소: St. Virgil / Hostel Tabor
일정: 이동 / 친구 / 시내
8월 14일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Ljubljana)
교통:
숙소: Hostel Tabor
일정: 시내 / 미술관 / 갤러리 / 성
혹시 몰라 조식을 먹고 빵을 하나 싸왔다.
언제부턴가 애들이 다들 호텔 조식 때 빵을 만들어 냅킨에 싸서 도망(?) 친다.
잘츠부르크의 성수기 물가를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다시 한번 테무 냄비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빵을 하나 챙겼다.
류블랴나로 가는 기차에서 먹을 생각이었다.
짐을 끌고 중앙역으로 가는데, 또 캐리어 바퀴가 안 굴러간다.
거기다 며칠 전부터 ÖBB에서 계속 메일이 온다.
그라츠 중앙역 엘리베이터 고장, 시간표 변경 등등...
불길한 예감은 대부분 맞다.
Kranj에서 류블랴나 구간은 기차가 안 다녀서 버스로 갈아타고 가란다.
잘츠부르크에서 탄 기차의 상태는 처참했다.
기차도 꼬졌는데 새치기도 하고, 사람도 꽉 차고 난리가 났다.
게다가 에어컨도 안 나왔다.
승무원이 창문 블라인드를 제발 내려달라고 해도 다들 무시한다.
다른 승무원은 찬물을 병 채로 들고 다니며 사람들한테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30분에 한 번 꼴로 3-4병씩 들고 나타난다.
이번에도 역시 불길한 예감.
내 앞에 3명 남았는데 물이 다 떨어졌다.
결국 빌라흐까지 물 한 모금 못 마셨다.
당연하게도 기차는 22분이나 지연됐다.
환승 시간은 15분이었는데, 기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두 정거장 전부터 승무원한테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승무원이 슬로베니아 측에 연락해서 다음 기차가 우리를 기다려줬다.
어느 나라나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거랑 쪽수로 밀어붙이면 이기는 건 똑같다.
갈아탄 기차도 사람들로 꽉 차서 그냥 눈앞에 보이는 빈자리에 앉아서 갔다.
한 시간쯤 지나서 버스로 갈아타라고 한다.
제대로 된 안내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사람들이 우르르 가는 곳으로 따라가서 아무 버스나 탔다.
이쯤 되면 국제미아가 되어 보는 것이 소원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버스 3대가 전부 다 같은 목적지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30분 늦게 류블랴나에 도착했다.
안 굴러가는 캐리어를 들고 10분 정도를 걸어 호스텔에 도착했다.
예약만 해둔 상태라 도시세를 포함해서 카드로 결제했다.
원래는 한인민박을 예약했었는데, 건물 전체에 화장실이 두 개뿐이고 시내에서 멀고, 악기를 보관할만한 공간도 없었다. 게다가 에어컨도 없는 방이었다.
그래서 슬퍼하고 있던 찰나, booking.com에서 갑자기 최저가라면서 이 호스텔이 나왔다.
3인실에 열쇠 딸린 개인 옷장, 시내 한복판, 가격도 20유로나 더 저렴했다.
예약할 때는 분명 에어컨이 있다고 했는데, 파스타만 먹어서 헛것을 봤었나 보다.
방은 또 하필 맨 꼭대기 층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올리고 방으로 들어가니 아직 아무도 없다.
먼저 괜찮은 침대와 옷장을 찜하고 짐 정리를 했다.
드디어 10년 넘게 기대하던 류블랴나에 도착했다.
슬라브어 계열은 da 밖에 못하는 강제 초긍정맨이어서 걱정했는데, 여기 사람들이 영어를 잘해서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
호스텔에서 5분 정도 걸어 나오니, 용의 다리가 나왔다.
내 생각에는 용이 아니라 이무기다.
도시 사이즈를 생각해 보면 용까지 나설 필요는 없지만, 일종의 '신화적 허용' 같았다.
프레셰렌 광장에서 친구를 만나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저녁은 일식집에서 해결했다.
잘 놀고먹고 떠들고 나서 헤어진 뒤, 나온 김에 시내를 조금 더 돌아다녔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걷다가 시청에 도착했다.
류블랴나를 상징하는 흰색과 연두색 깃발이 마음에 들었다.
작은 전시를 보고 나왔더니, 밖이 살짝 어두워졌다.
시내에는 대부분 문을 닫아 볼 수 있는 게 없었고, 입장하지 않고 겉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 위주로 둘러보다가, 류블랴나 성으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했다.
성까지 350m라는 안내판을 믿고 무턱대고 올라갔다.
금방 성에 도착했지만, 탁 트인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입장료까지 내면서 들어갈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성에서 내려왔다.
호스텔로 돌아왔더니 새로운 두 명이 들어와 있었는데, 다행히 아주 착한 바게트 친구들이었다. 의사소통이 되는 문제없는 친구들이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뭐가 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계속 괜찮다가, 하필 성에 거의 다 올라갔을 때, 발가락 밑에 물집이 잡혔다. 그렇다고 다시 내려갈 수도 없어서 계속 돌아다녔더니 발이 난리가 났다.
친구에게 선물을 주고 나니 짐이 아주 약간 줄어들었다.
피곤해서 자야 하는데 너무 더워서 잘 수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창문을 열면 벌레가 들어오고, 닫으면 촉촉한 물만두가 되어버린다.
다음에는 에어컨이 있는 호스텔을 잡던지, 아니면 이 호스텔에 10유로씩 더 주고 독방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못 자고 일어나 호스텔 조식을 먹으러 갔다.
맛이 없고, 먹을만한 게 없었지만, 이 가격에 뭘 더 바라겠나 싶어서 대충 먹고 나왔다.
오늘 계획은 류블랴나 시내 투어.
금~일은 다른 도시들을 갈 예정이라, 오늘 안에 시내를 다 돌아봐야 했다.
자기 전에 구글 지도를 켜고 또 보라색으로 되어있는 박물관, 미술관, 건축물 등을 무작위로 저장해 뒀다. 이를 토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호스텔 근처 현대미술관부터 시작했다.
학생 티켓을 달라고 하니 아무 말 없이 그냥 준다.
2층 특별전시는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1층, 0층은 작품 수만 많고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오히려 문 열기 전 미술관 샵에서 본 플럭서스 잡지가 더 흥미로웠다.
강 쪽으로 걸으며 작은 갤러리인 ZDSLU Galerija에도 잠깐 들렀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한국식 치킨집 시식행사에서 몇 조각 집어먹었다.
양념의 모든 맛이 하나도 안 섞이고 따로 놀아, 순간 내가 대장금인 줄 알았다.
용의 다리를 건너서 ‘Ljubljana WOW’ 설치물도 보고 대성당에 들어갔다.
치사하게 입장료로 3유로를 삥 뜯는데, 동전을 털어내다 보니 2.90유로만 줬다.
내부는 기대 이상이었다. 10센트 더 냈어야 했다.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슬로바키아도 그렇고 슬로베니아도 그렇고, 신생국이라 그런지 도시 곳곳에 작은 동상이 많았다.
큰 특징이 없는 도시 풍경을 채우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자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밀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역사와 정체성을 보여줄 만한 것들은 대부분 거의 국립 박물관·미술관 안에 모여 있다.
도살자 다리를 건너 프레셰렌 광장으로 갔다.
프레셰렌 동상을 보고 나서 분홍색 성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들어갔는데 여기도 돈을 받는다.
미사 시간대에 오면 무료라 시간 체크만 해두고 패스했다 (결국은 못 갔다).
프레셰렌 동상의 맞은편을 보면 그가 사랑했던 율리아가 살던 집이 있고, 지금은 율리아의 부조가 남아있다.
삼중교를 건너서 갤러리 Kresija, 시청 맞은편에 있는 구스타프 말러 동상, 시립 미술관을 둘러봤다.
시립 치고 뭐가 별로 없었다.
강 반대편에도 말러의 동상이 있었다.
필하모니 건물을 밖에서 보고 의회광장을 지나 국립 미술관 쪽으로 걸어갔다.
국립 박물관은 시간과 돈 때문에 생략하고, 오페라하우스 건물만 살짝 보고 지나갔다.
국립 미술관에는 중세 제단화와 벽화부터 19~20세기 작품까지 있었다.
중세 작품들은 다른 나라들과의 차이점이 별로 없었지만 19~20세기 작품은 확실히 달랐다.
입만 산 사짜의 느낌으로는 초기에는 합스부르크 영향이, 후기에는 프랑스 영향이 강해 보였다.
류블랴나 출신 화가들이 오스트리아에서 배워오며 슬로베니아만의 독자적 요소를 더해가는 과정이 보였다.
20세기에는 독일·프랑스 영향을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시도도 있었다.
특별전시인 바로크는 그냥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느낌이 강했고, 다른 작은 Zoran Mušic의 특별전시는 좋았다.
이곳이 오늘 관람 중 가장 값어치 있는 미술관이었다.
티볼리 공원은 시간이 없어 지나치고, 두 번째 현대미술관 (사실 여기가 본관)으로 향했다.
가능하면 전부 다 보고 싶었지만, 시간문제와 체력 문제로 인해 학생티켓으로 상설전시만 보고 나왔다.
두 현대미술관 중 이곳이 좀 더 20세기의 시대, 역사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며 딱히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 로마시대 유적과, 근처의 큰 교회 하나를 구경하고 성 쪽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시립 갤러리 Vžigalica에 들어갔는데, 여름에 끝난 류블랴나 빛 축제 작품 일부를 옮겨와 연장 전시 중이었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마무리가 아쉬운 작품들이 많았다.
그래도 이런 시도와 기회가 있어야 작가들이 성장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중소 국가의 시립 갤러리로서 역할을 잘하고 있고, 50년쯤 뒤에는 충분히 국제적 경쟁력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배권에 있던 나라들에서는, 예술이든 다른 분야든 오스트리아에서 배우고 성공한 뒤 돌아오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해외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배우던 1세대는 힘겹게 버티며 고국에 돈을 보내 사람들의 생활을 조금씩 개선시킨다.
그 혜택을 받은 다음 세대는 좀 더 수월하게 나가 배우고, 그대로 눌러앉는 경우도 많지만, 시간이 지나면 돌아와 자리를 잡는 사람도 생긴다.
이들이 기존의 텃세를 뚫고 새로운 것을 가르치고, 그다음 세대가 그것을 받아 자기만의 것을 더해 발전시킬 때 비로소 세계적 경쟁력이 생긴다.
성으로 올라가기 전, 다리를 건너다 DLUL 갤러리를 우연히 발견해 잠깐 들렀다.
구글에는 이미 문 닫은 시간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열려 있어 얼른 둘러보고 나왔다.
다리 건너편 교회는 역시나 유료라 지나쳤고,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성으로 올라갔다.
전날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시내 반대편 풍경을 보며 걸으니 또 금방 도착했다.
성 티켓은 온라인으로 사면 10% 할인되고, 학생 확인도 없어서 사실상 거의 반값이었다.
전망대인 시계탑에 올라가야 시내가 제대로 보여서 입장권을 끊었다.
무료 테라스에서 보는 경치는 확실히 한계가 있었다.
성 내부에는 작은 역사 전시관, 소규모 무기 전시실, 인형극 박물관 등이 있다.
VR 투어도 티켓에 포함되어 있지만 보지 않았고, 지하에서는 명작들을 빔프로젝터로 쏘아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전시를 하고 있었으나 오래 볼만한 전시는 아니었기에 금방 나왔다.
대부분의 공간은 갤러리나 레스토랑, 또는 행사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은 Tomato Kosir의 전시였다. 이 사람은 분명 씽크빅만 100년 치를 풀었을 것이다.
문을 닫기 전 다시 한번 시계탑에 올라 노을을 바라보고 내려왔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Hofer에 들러 여기서만 파는 초콜릿과 류블랴나에서 먹을 (또!) 파스타 재료를 샀다. 호스텔 공용 주방에서 저녁을 먹고 주말 일정을 세우다 잠들었다.
도시가 작다. 정말 작다. 직접 보면 엄청 작다.
파리랑 비교하면, 메트로 5 정거장 정도 거리면 시내에 있는 웬만한 볼거리는 다 본다.
슬로베니아 티켓 중, 어린이의 경우 나이 제한이 명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학생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명시되어 있지 않다.
물어보지도 않는다.
할머니가 와서 학생 티켓 달라고 해도 줄 것 같다.
일단 물어보고 주면 받고, 안 주면 받아내자.
프랑스 왼쪽부터 폴란드 오른쪽까지 같은 시간대다.
파리에서 바르샤바의 경도 차이는 19도다.
즉 실제로는 1시간 16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실제 체감은 거의 두 시간 정도 차이 나는 것 같다.
서유럽에 있다가 동유럽으로, 혹은 반대로 이동한 경우 시차 없는 시차를 느끼게 될 것이다.
동유럽에서는 유독 해가 아침에 일찍 뜬다던지, 서유럽에서는 해가 늦게 진다던지.
일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