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파스칼라티하우스 1/3

Beethoven Pasqualatihaus

by 돈 없는 음대생

위치: 오스트리아 빈

가격: 0€ (첫째주 일요일)

방문일자: 2023년 2월 5일


베토벤 파스칼라티하우스(Beethoven Pasqualatihaus)는 빈의 1구 묄커 바슈타이(Mölker Bastei) 언덕 위에 위치한 집으로, 베토벤이 가장 오랜 기간 머물던 곳이다.

거주 기간과 배경


1804년부터 1815년까지 약 11년 동안 간헐적으로 머물렀다. 베토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자주 이사하기로 유명했으나, 이곳만큼은 예외적으로 오랫동안 애착을 가졌다.
요한 폰 파스쿠알라티 남작은 베토벤의 열렬한 후원자였으며, 베토벤이 잠시 다른 곳으로 이사했을 때도 그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방을 비워두었다고 전해진다.


주요 창작품


교향곡: 4번, 5번(운명), 7번, 8번
오페라: <피델리오>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
바이올린 협주곡


위치적 특징


당시 빈을 둘러싸고 있던 성벽(Mölker Bastei) 위에 지어져 있다.
링슈트라세 건설 당시 빈의 옛 성벽들이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이 집이 있는 구역은 다행히 파괴되지 않고 남았다.


현재의 모습


현재는 빈 박물관(Wien Museum)의 분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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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재능은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Sein Talent hat mich in Erstaunen gesetzt; allein er ist leider eine ganz ungebändigte Persönlichkeit)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812년 테플리츠(Teplitz)

프란츠 클라인(Franz Klein)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라이프 마스크(Lebendmaske Ludwig van Beethovens), 1812년, 석고상

프란츠 클라인(1779-1840)이 베토벤의 흉상을 만들기 위해 이 마스크를 제작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베토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양쪽 콧구멍에 작은 관을 삽입했는데, 작곡가가 질식할 것 같다고 느껴 과정을 반복해야만 했다.

이 라이프 마스크는 이후 안톤 디트리히(Anton Dietrich)나 카스파르 폰 춤부슈(Caspar von Zumbusch)와 같은 조각가들이 베토벤 흉상을 만들 때 모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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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클라인(Franz Klein) -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812년(1941년 제작), 흉상

빌리 카우어(Willy Kauer)가 1941년에 제작한 프란츠 클라인의 1812년 흉상 복제품이다.

조각가 프란츠 클라인(1779-1840)은 빈 미술아카데미 공부 외에도 빈 병리학 박물관에서 해부학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조각, 특히 초상 흉상에서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특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직접 제작한 라이프 마스크를 바탕으로 만든 이 흉상은 매우 사실적인 베토벤의 모습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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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사버 잔트만(Franz Xaver Sandmann) - 슈트라이허 피아노 공장의 홀(Saal der Streicher’schen Klavierfabrik), 1840년경, 채색 석판화

G. 란(G. Lahn)의 그림을 바탕으로 했다.

이 그림은 1837년 웅가르가세(Ungargasse) 27번지에 세워진 새 홀의 모습이지만, 다섯 개의 큰 아치형 창문이 있는 옛 홀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 베토벤은 자신이 매우 아꼈던 슈트라이허 피아노로 옛 홀에서 자주 연주회를 열었다.

피아노 제작자로 유명한 나네트 슈트라이허(Nannette Streicher)와 그녀의 남편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운영하던 거처이자 공장, 그리고 그 내부에 슈트라이허 홀(Streicher-Saal)이 있었다.

베토벤은 나네트가 만든 피아노를 사용하며 더 넓은 음역대와 강한 음색을 요구했고, 이러한 요청은 슈트라이허 피아노의 기술적 발전으로 이어졌다.

1812년, 슈트라이허 부부는 웅가르가세 27번지 자택 내부에 약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사설 연주 홀을 열었다. 베토벤은 이곳을 자주 방문해 동료들의 연주를 듣거나 자신의 작품을 논의했다.
훗날 프란츠 슈베르트의 가곡들과 젊은 시절의 프란츠 리스트가 이곳에서 연주하며 이름을 알렸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건물은 19세기 말에 헐렸고, 현재 건물 외벽에는 이곳이 슈트라이허 부부의 집이었으며 베토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념판이 설치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베토벤이 교향곡 9번 ‘합창’을 완성한 집(웅가르가세 5번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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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안톤 바우어(Joseph Anton Bauer) –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809년경, 석판화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의 그림을 바탕으로 요제프 안톤 바우어가 제작했다.

이 베토벤 초상화가 주는 편안하고 거의 쾌활한 인상은 작곡가의 정통 초상화들 사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원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1788–1853)가 제작한 드로잉이 담긴 스케치북에서 유래했다.

이 드로잉들은 빈의 저명한 의사 요한 바티스트 마르파티(Johann Baptist Malfatti, 1775–1859) 가족의 친구들을 기록한 것이다. 요한 마르파티는 베토벤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의사였으며, 그의 조카 테레제 마르파티에게 베토벤이 1810년에 청혼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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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핀 다임 백작부인(Josephine Gräfin Deym, geb. Brunsvik), 연필화 사진 복제

H. C. 로빈스 랜던(H. C. Robbins Landon)의 저서 『베토벤』에 수록된 사진 복제본이다.

베토벤은 1799년부터 헝가리의 브룬스비크(Brunsvik) 가문, 특히 프란츠, 테레제, 조세핀 남매와 친분을 맺었다. 테레제와 조세핀은 빈에 있는 요제프 다임 백작의 집에서 베토벤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조세핀은 1799년 요제프 다임 백작과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이 사망한 뒤, 조세핀은 자녀들 때문에 자신을 깊이 사랑했던 베토벤과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1810년 크리스토프 폰 슈타켈베르크 남작과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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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에밀 그림(Ludwig Emil Grimm) – 엘리자베트(베티나) 폰 브렌타노, 1809년, 에칭

베티나 브렌타노는 1810년 빈에 있는 이복 오빠 프란츠 브렌타노를 방문하기 위해 왔다. 프란츠 브렌타노는 베토벤의 경제적 문제를 여러 차례 도왔다. 이 기회를 통해 베티나는 베토벤을 알게 되었고, 파스칼라티 하우스로 그를 방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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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 피아노를 위한 바가텔 가단조 WoO 59

(Bagatelle für Klavier a-Moll WoO 59), 1867년 출판(작곡 1810년), 악보 및 서적

출처: Neue Briefe Beethovens. Nebst einigen ungedruckten Gelegenheitscompositionen und Auszügen aus seinem Tagebuch und seiner Lectüre, 루트비히 놀 편집, 1867년

베토벤 연구가 루트비히 놀(Ludwig Nohl)은 1867년에 베토벤의 피아노 곡 「엘리제를 위하여」를 발표했다. 그는 현재 분실된 것으로 여겨지는 친필 악보를 직접 보았다고 밝혔다. 해당 악보에는 1810년 4월 27일이라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다. 놀은 악보 상단에 베토벤의 필체로 ‘엘리제를 위하여(Für Elise)’라는 헌사가 적혀 있었다고 전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오랫동안 의문을 남겼다. 베토벤의 주변 인물 가운데 이 곡을 헌정받을 만한 ‘엘리제’라는 이름의 여성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놀은 이 원고가 베토벤이 마음을 두고 있던 테레제 폰 드로스딕, 즉 결혼 전 성이 마르파티였던 테레제의 유품에서 나왔다고 언급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놀이 헌사 문구를 잘못 읽었으며, 원래는 ‘테레제를 위하여(Für Therese)’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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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 피아노를 위한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레오폴트 라두(Leopold Radoux) – 노(老)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der Ältere), 1773년, 캔버스에 유채

작곡가의 할아버지인 노(老) 루트비히 판 베토벤(1712–1773)은 플랑드르 메헬렌 출신으로, 17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본(Bonn)의 궁정 음악 감독을 지냈다. 그는 손자가 세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평생 할아버지를 깊이 존경했으며, 1801년에 이 초상화를 빈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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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지우스 회펠(Blasius Höfel) – 루돌프 대공(Erzherzog Rudolph), 동판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막내아들인 루돌프 요한 요제프 라이너 대공(1788–1831)은 1804년경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1809년 3월 1일, 루돌프 대공은 킨스키 공작, 롭코비츠 공작과 함께 베토벤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했다.

개인적인 친분은 그가 1819년 올뮈츠의 대주교로 임명될 때까지 이어졌으며, 이후에도 서신을 통해 관계가 유지되었다.

루돌프 대공은 황제 프란츠 2세의 동생으로 호프부르크 왕궁에 거주했다.

킨스키 공작은 빈 1구 프라이웅 광장에 위치한 킨스키 궁전에 머물렀다. 이 건물은 현재 경매장과 행사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롭코비츠 공작은 알베르티나 미술관과 호프부르크 왕궁 인근의 롭코비츠 궁전에 거주했으며, 이곳은 현재 연극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롭코비츠 가문은 보헤미아에 뿌리를 둔 귀족 가문으로, 프라하 성 단지 안에도 궁전을 두고 있었다.
루돌프 대공이 대주교로 임명된 올뮈츠는 모라비아 지역의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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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헤르만 파이퍼(Carl Hermann Pfeiffer) – 프란츠 요제프 막시밀리안 롭코비츠 공작
(Franz Joseph Maximilian Fürst Lobkowitz), 1799년, 점각 동판화

롭코비츠 공작(1772–1816)은 1796년부터 베토벤의 여러 기악곡을 연습하던 자체 오케스트라를 유지했다. 베토벤은 그를 관대한 후원자로 여겼으며, 교향곡 3번 「에로이카」와 1807년 삼중 협주곡 op.56 등 중요한 작품들을 그에게 헌정했다. 1809년, 롭코비츠 공작은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과 합의하여 베토벤에게 매년 4,000굴덴을 지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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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 피아노 삼중주 내림 나장조 op.97
(Klaviertrio B-Dur op.97), 1811년, 초판본 표지 복제

이 피아노 삼중주는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었다. 초연은 1814년 4월 11일 자선 음악회의 일부로 열렸다. 베토벤이 피아노를 연주했고, 이그나츠 슈판치히가 바이올린, 요제프 린케가 첼로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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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 피아노 삼중주 op.97 (대공)


카를 쉬츠(Carl Schütz) – 빈 콜마르크트 거리의 풍경, 1819년, 채색 동판화

아르타리아 출판사는 과거 ‘Zum englischen Gruß’라는 이름의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이후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빈 1구 콜마르크트 9번지에 1901–1902년에 지어진 건물이 서 있다.

현재 이 건물 외벽에는 프리데리크 쇼팽이 빈에 머물 당시 이곳에 거주했다는 표식이 남아 있다.
아르타리아는 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의 작품을 주로 출판했으며, 빈을 방문한 젊은 쇼팽의 작품에도 관심을 보였다.
1829년 쇼팽이 빈에서 데뷔할 무렵, 그의 초기 작품들이 이곳을 통해 논의되거나 유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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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요제프 나이들(Johann Joseph Neidl) – 니콜라우스 2세 에스테르하지 공작
(Nikolaus II. Fürst Esterházy), 점각 동판화

1807년, 베토벤은 요제프 하이든의 소개로 에스테르하지 공작의 의뢰를 받아 C장조 미사곡 op.86을 작곡했다.

하이든은 니콜라우스 1세 에스테르하지 공작과 약 30년 동안 함께 일했으며, 그 손자인 2세와도 관계를 이어왔다.
건강 문제로 하이든이 미사곡 작곡을 이어가기 어려워지자, 베토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스테르하지 공작은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고,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이 일 이후 베토벤과 에스테르하지 공작의 관계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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