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Pasqualatihaus
위치: 오스트리아 빈
가격: 0€ (첫째주 일요일)
방문일자: 2023년 2월 5일
금속과 목재로 제작되었으며, 벚나무 기둥이 있는 받침대를 갖추고 있다.
이 괘종시계는 작은 수납장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컬렉션’에서 유래했다.
1894년, 당시 빈 베토벤 협회의 비서였던 요제프 뵈크-나데나우에 의해 빈 시 역사 박물관, 오늘날의 빈 박물관에 전달되었다.
오크재에 암갈색 착색과 무광 처리가 되어 있다.
루이 16세 양식의 서랍 세 개와 수납칸 하나, 황동 손잡이를 갖추고 있다.
이 보면대는 빈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원 교사, 작곡가였던 야콥 돈트의 유산으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베토벤이 사용했다.
야콥 돈트(Jakob Dont)는 19세기 빈에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교육자다.
그의 아버지는 빈 필하모닉의 첼리스트였다.
그는 빈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으며, 요제프 뵘과 게오르크 헬메스베르거를 사사했다. 빈 호프부르크 왕궁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빈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는 야사 하이페츠의 스승이 된 레오폴드 아우어가 있다.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는 1805년 11월 20일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 1판이 처음 무대에 올랐고, 1806년 3월 29일에 2판이 상연되었다.
오페라 「피델리오」에는 모두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1805년의 초판, 1806년의 개정판, 그리고 1814년의 최종판이다.
베토벤은 원래 작품의 제목을 여주인공의 본명인 ‘레오노레’로 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다른 작곡가들의 「레오노레」가 이미 인기를 끌고 있어 극장 측은 제목 변경을 요구했다. 그 결과 여주인공이 남장을 했을 때 사용하는 이름인 ‘피델리오’가 작품의 제목이 되었다.
베토벤은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이 작품을 ‘레오노레’라 불렀다.
이로 인해 초판의 서곡은 「레오노레 서곡 2번」, 2판의 서곡은 「레오노레 서곡 3번」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레오노레 서곡 1번」이 쓰였는데, 이는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었고 학자들이 초기 폐기작으로 오인해 번호가 붙었다. 1807년 프라하 공연을 위해 3번 서곡을 단순화해 다시 썼으나, 공연이 취소되며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최종판에서는 「피델리오 서곡」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은 빈 나슈마르트 인근에 위치한 유서 깊은 공연장이다. 1801년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과 설비를 갖춘 극장으로 평가받았다.
19세기 중후반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를 비롯한 빈 오페레타의 중심지였다. 20세기 후반에는 「엘리자벳」, 「레 미제라블」과 같은 대형 뮤지컬이 공연되며 상업 극장의 성격이 강해졌다.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계기로 다시 오페라 전용 극장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대규모 복원과 현대화 공사를 거쳐 2024년 가을에 재개관했다.
마침 빈에 거주하던 기간 동안 공사로 인해 방문하지 못했다.
파리 대신 그라츠로 갔다면, 첫 연주 무대는 이곳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 1805년 11월 20일 수요일 빈의 황실 및 왕실 특권 테아터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상연됨:
처음으로 상연: 피델리오, 또는: 부부의 사랑
요제프 조늘라이트너가 프랑스어 원작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개작한 3막 오페라. 음악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작곡함.
등장인물 (Personen):
- 돈 페르난도 (Don Fernando, 장관): 바인코프 씨 (Hr. Weinkopf)
- 돈 피사로 (Don Pizarro, 국립 교도소장): 마이어 씨 (Hr. Meier)
- 플로레스탄 (Florestan, 죄수): 데머 씨 (Hr. Demmer)
- 레오노레 (Leonore, 피델리오라는 이름의 그의 아내): 밀더 양 (Dlle. Milder)
- 로코 (Rocco, 간수): 로테 씨 (Hr. Rothe)
- 마르첼리네 (Marzelline, 그의 딸): 뮐러 양 (Dlle. Müller)
- 야키노 (Jaquino, 문지기): 카셰 씨 (Hr. Cache)
- 교도소 간수 (Wachehauptmann): 마이저 씨 (Hr. Meiser)
- 죄수들 (Gefangene)
- 경비대 (Wache)
사건은 세비야에서 몇 마일 떨어진 스페인의 어느 국립 교도소에서 전개됨.
대본(Die Bücher)은 매표소에서 15크로이처에 구입 가능함.
좌석 가격 (Preise der Plätze):
- 큰 박스석 (Große Loge): 10플로린
- 작은 박스석 (Kleine Loge): 7플로린
- 1층 및 1층 갤러리 (Erstes Parterre und erste Gallerie): 4플로린 30크로이처
- 1층 및 1층 갤러리 예약석 (Ersten Parterre und erste Gallerie ein gesperrter Sitz): 2플로린 42크로이처
- 2층 갤러리 (Zweite Gallerie): 2플로린 56크로이처
- 2층 갤러리 예약석 (Zweiten Gallerie ein gesperrter Sitz): 1플로린 30크로이처
- 2층 및 3층 갤러리 (Zweites Parterre und dritte Gallerie): 1플로린 42크로이처
- 4층 갤러리 (Vierte Gallerie): 24크로이처 (또는 12크로이처)
박스석 및 예약석은 황실 및 왕실 국립 극장 매표소에서 예매 가능함.
시작은 6시 30분.
당시의 화폐 체계는 60크로이처 = 1굴덴 혹은 1플로린이었다.
베토벤은 1809년 부터 연간 4천 플로린을 후원받는 조건으로 빈에 거주하였다.
1791년 모차르트 사망 당시 해의 정부의 중상급 관리 연봉이 500플로린으로 기록되어있다.
나만 돈이 없다... 젠장...
루이 레트론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피델리오」 최종판과 「웰링턴의 승리 또는 비토리아 전투」 초연 이후, 베토벤의 인기는 새로운 정점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아르타리아 출판사는 작곡가의 새로운 초상화를 발행했다.
베토벤이 여러 차례 포즈를 취했기 때문에 이 초상은 실제 모습과 매우 가깝다고 여겨졌다. 베토벤 자신도 이 초상을 높이 평가해 여러 장을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이 작품의 제목은 1813년 북부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영국군 총사령관 아서 웰링턴 경을 가리킨다.
베토벤은 처음 이 곡을 요한 네포무크 멜첼이 발명한 기계 악기 '판하모니콘'을 위해 작곡했다.
1813년 12월 8일과 12일 자선 연주회를 위해 대규모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요한 네포무크 훔멜, 자코모 마이어베어 등 여러 작곡가들이 연주에 참여했다.
곡은 드럼으로 시작하며 「Rule, Britannia!」와 프랑스 민요 「Malbrough s’en va-t-en guerre」를 사용한다. 마지막에는 「God Save the King」이 연주된다.
이 작품은 당시의 취향에 부합해 큰 호응을 얻었다.
요한 네포무크 멜첼은 메트로놈의 발명가다.
3중창 ‘좋다, 아들아, 좋다(Gut, Söhnchen, gut)’를 위한 자필 스케치 복제본
악보 파트, 레오노레 서곡 3번(C장조)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 자필 기입이 포함된 표지 복제본
표지에는 베토벤이 파스칼라티에게 헌정한 문구가 적혀 있다.
“그의 친구 파스칼라티 남작에게, 저자로부터.”
하슬링거 출판, 표지 복제본
베토벤은 파스칼라티의 부인 엘레오노레의 사망 3주기를 기념해 이 작품을 작곡했다. 그는 이 곡을 요한 밥티스트 폰 파스칼라티 남작에게 헌정했다.
요제프 베네딕트 폰 파스칼라티는 트리에스테 출신의 의사였다. 1777년에 귀족 작위를 받았고, 1798년에 남작으로 승격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역시 그의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묄커바스타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집을 건축했다. 아들 요한 밥티스트는 부유한 도매상인이자 황실 대리인이었다. 그는 1804년에 베토벤을 입주시키고, 베토벤이 다른 곳에 머물 때도 방을 비워두었다. 1808년에는 집의 지분을 누이의 가족에게 매각했다.
요한 폰 파스칼라티는 베토벤과 평생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