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사 시대 구분의 딜레마 아는 척 하기 (4편)

음악적 현실과의 괴리

by 돈 없는 음대생

음악사 시대 구분은 후대 비평가의 주관적 판단과 독일 중심의 경직된 목적론적 틀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왔다. 실제 예술의 흐름은 세대 간 충돌과 개인적 미학의 혁신으로 복합적인 변화를 보이지만, 경직된 시대 구분은 이러한 흐름을 경계 안에 가두거나 ‘과도기’라는 편의적 틀로 축소시킨다.


대표적인 사례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바흐 가문의 동시대적 양식 충돌이고, 다른 하나는 드뷔시의 시대적 위치이다. 두 사례 모두 연대의 연속성과 양식의 변화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며, 음악사적 경계가 실제 예술적 흐름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함을 보여준다.




바흐 가문의 동시대적 양식 충돌


서양 음악사에서 ‘바로크 시대의 끝’은 관습적으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사망 연도인 1750년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 연대는 실제 음악적 현실을 반영하기보다는 학문적 편의를 위한 인위적 구분에 가깝다. 1750년 전후의 유럽에서는 서로 상이한 미학과 양식, 사회적 배경이 한 시공간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으며, 이를 단일한 시대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바흐의 후기 작품들, 특히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1742–1750)과 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 1747)은 당대의 새로운 경향을 따르기보다는 바로크 대위법의 원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회고적 양식이었다. 그의 음악은 복잡한 폴리포니, 견고한 통주저음, 그리고 정서론(Affektlehre)에 기반한 통일된 감정 표현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17세기적 미학의 완성이자 종결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에, 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는 이미 전혀 다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궁정에서 활동하며 감정과다양식(Empfindsamer Stil)을 정립했다. 그의 음악은 북독일 프로테스탄트의 내면적 금욕주의와 계몽시대적 이성의 긴장 속에서, 극적이고 주관적인 정서의 즉각적 표출을 추구했다. 갑작스러운 셈여림 변화, 예측 불가능한 화성 전환, 단속적인 모티브(Motiv)의 사용은 감정을 단순히 장식으로 처리하지 않고, 청중이 음악 속에서 바로 체감할 수 있는 정서적 긴장과 반응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음악적 태도는 아버지 J. S. 바흐의 객관적 통일성과 정서의 일관성과 대비되며, 개인의 내적 경험과 감정이 음악적 중심으로 부각되는 새로운 미학적 경향을 보여준다.


한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는 런던의 시민사회와 국제 음악 시장 속에서 갈랑 양식(Style galant)을 구현했다. 그의 음악은 명료한 선율적 라인과 단순한 화성 반주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복잡한 대위법 대신 청중이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우아함과 균형감을 추구했다. 이러한 미학은 훗날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고전주의의 문법으로 이어졌다.


핵심은 이 두 아들의 혁신적인 양식, 즉 감정과다양식과 갈랑 양식이 아버지 J. S. 바흐의 만년의 바로크 양식과 1730년대부터 1750년까지 동시대에 공존했다는 점이다. 1740년대 라이프치히에서는 J. S. 바흐가 바로크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었고, 같은 시기 베를린에서는 C. P. E. 바흐가 주관적 감정의 새로운 표현을 탐구했으며, 런던에서는 J. C. 바흐가 고전주의 형식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사 교육은 이를 단순히 ‘바로크’와 ‘고전주의’라는 두 구획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C. P. E. 바흐와 J. C. 바흐의 음악은 ‘과도기적’ 작곡가의 작품으로 격하되고, 그들의 독립적인 미학적 가치와 혁신성은 ‘빈 악파(Wiener Klassik)’ 발전의 부차적 단계로만 다루어진다. 결국 바흐 가문의 사례는 연대 중심의 시대 구분이 실제 양식의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복잡한 음악적 현실을 편의적 범주로 단순화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드뷔시의 시대적 위치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의 음악은 시대 구분의 틀 자체를 무력화하는 대표적 사례다. 그는 통상적으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즉 낭만주의 후반으로 분류되지만, 실제 그의 음악은 벨 에포크(Belle Époque)의 감각과 인상주의(Impressionnisme), 상징주의(Symbolisme) 문학의 정서를 담아 낭만주의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낭만주의가 기능 화성(Functional Harmony)의 극한적 확장과 치밀한 주제 발전, 형식적 긴장감을 통해 서사적 감정 표현을 추구했다면, 리하르트 바그너에 의해 기능 화성은 이미 조성이 붕괴 직전까지 확장되었고, 이것이 낭만주의의 최종 형태였다. 그러나 드뷔시는 이 낭만주의의 목적론적 발전을 거부하고, 음악을 서사적, 건축적 구조의 표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소리 그 자체’의 감각적 아름다움에 집중했다.


그의 음악은 화성 체계와 형식 구조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병행 진행, 온음계, 5음 음계 등을 활용하여 으뜸음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화성을 오직 음색과 색채 표현의 수단으로 삼았다. 또한 고전, 낭만주의적 엄격한 박자와 리듬 대신 자유로운 박자 변화와 유동적 템포를 사용하여 음악에 몽환적이고 유연한 분위기를 부여했다. 그의 피아노곡 달빛(Clair de Lune)과 오케스트라곡 목신의 오후 전주곡(Prélude à l'après-midi d'un faune)은 완결된 형식보다는 순간적 감각과 색채의 표현을 우선시하며, 낭만주의적 목적론을 벗어난 새로운 음악적 세계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드뷔시는 연대상으로는 낭만주의에 속하지만, 양식적, 미학적으로는 이미 벨 에포크와 인상주의의 음악적 언어를 실현하고 있었다. 그를 낭만주의 말기로 분류하면 그의 혁명성이 축소되고, 20세기 현대 음악의 시발점으로 분류하면 연대적 기준이 제한적임이 드러난다. 음악사는 편의상 그를 ‘낭만주의와 현대 음악의 과도기’, ‘20세기 음악의 선구자’로 분류하며, 연대와 양식, 사조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바흐 가문의 사례에서 바로크와 고전주의 양식이 한 시대 안에서 동시에 존재했듯, 드뷔시는 낭만주의 전통과 20세기 현대 음악의 새로운 양식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두 사례는 연대 중심의 시대 구분이 음악의 실제 흐름과 양식적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함을 보여주며, 다양한 음악적 흐름과 혁신을 단순한 틀로 처리하는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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