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신론자다. 그래서 사고에서 겨우 살아남아 목숨을 건진 사람들, 질병의 고통 속에서 가족과 눈물의 이별을 하는 사람들, 화재 참사로 사지가 절단된 채 눈을 뜨자마자 엄마에게 "나를 왜 살렸어"라고 울부짖는 아이들을 보며 "희망을 주소서, 용기를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자칭 종교인들에게 늘 묻는다.
"당신들의 신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왜 이런 고통과 시련을 주는지 가서 물어봐라."
누군가는 내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죽음과 이별 앞에서 "신의 뜻이었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할 깊은 뜻이 있다, 더 큰 쓰임을 위해 데려가신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을 볼 때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탈을 쓰고 내뱉는 '개 같은 소리'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고통의 본질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신앙 체계를 지키려는 비겁한 회피일 뿐이다.
이 질문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이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종교가 생긴 이래 끊임없이 던져온 합당한 질문, 즉 '악의 문제(The Problem of Evil)'다. 신이 전능하다면 왜 악을 방관하는가? 신이 선하다면 왜 아이들의 절규를 외면하는가?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이 질문에 그 어떤 메이저 종교도 올바른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것이 종교의 역설이자 명확한 한계다.
영화 <미션>을 보면 두 명의 신부가 등장한다. 평화와 무저항으로 신의 말씀을 대리한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과 불같은 성격으로 칼을 든 멘도자(로버트 드 니로). 방식은 달랐지만 그들 모두 본인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행동 없이 성전 안에 숨어 침묵만 하는 것은 종교인의 선택지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종교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적인 장면들 앞에서, 창조주의 권능과 아름다움만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일갈하고 싶다. 이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용기와 능력이 없다면,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당신들의 모든 행위는 순수한 종교가 아니라 그저 '친목질'과 '돈벌이'에 불과하다고.
어떤 종교든 '절대자의 존재'라는 전제만 빼면 그 가르침들은 지극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들이다. 하지만 섬기고 경배해야 할 절대자가 위치하는 순간, 그 모든 가치는 인간이 아닌 신을 향해버린다. 종교가 정말 인간을 향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내부에서 신이 사라져야 한다.
영화 <맨 프롬 어스>에서 1만 4천 년을 산 주인공은 예수였던 시절을 회상하며 말한다. "나는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도리와 지혜를 말했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신비주의로 덧칠하고 신격화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쌓는 철옹성을 만들었다.
이런 과정은 지금도 반복된다. 기술, 우주, 외계인, 혹은 채식주의나 동물보호 같은 이름으로 시작된 사상들도 사람들의 욕망이 투사되고 지배 권력의 니즈와 맞물리는 순간, 또 다른 형태의 배타적인 종교가 되어버린다. 끼리끼리 모여 돈을 탐하고 생각이 다른 이를 배척하며 권력과 결탁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자 지독한 숙명일지도 모른다.
괴물이 되어가는 종교들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부처의 마지막 유훈에서 찾을 수 있다.
"너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마라."
나는 오늘도 예수쟁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나,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극단주의자들이 배려 없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꼬박꼬박 묻는다.
"신을 믿는 당신들, 도대체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이오!"
대부분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오겠지만, 나는 묻기를 주저할 생각이 없다. 가짜 신의 등불을 끄고, 오직 인간이라는 이름의 정직한 등불을 켠 채 이 비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 그것만이 수천 년간 이어진 종교의 기만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고통받는 인간의 곁에 서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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