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세라는 이름의 질주
요즘의 한류를 보면 마치 질주하는 자동차 같다. 이제는 그 관성 덕에 무엇을 해도 사람들이 환호하고 열광한다. 기본 이상의 이미지는 먹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똥을 싸도 사람들이 환호할 것이다"라는 말이 지금의 한류 콘텐츠와 너무 잘 맞는 것 같다.
# 조롱의 시대를 건너온 자부심
나는 이 한류라는 장르가 '어 괜찮네' 하는 단계 훨씬 이전에, 조롱과 무관심이었던 때부터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를 실시간으로 봐왔던 세대다. 그래서 지금의 풍경이 더욱 감개무량하다. 누군가는 지금의 현상에 호들갑을 떨지만, 나는 윤여정 선생님의 말을 빌려 일침을 놓고 싶다. "우리는 늘 좋은 영화, 드라마, 노래와 함께였다. 그걸 너희가 이제 알아봐 주기 시작하는 것뿐이다."
# 거대한 물결을 만든 투쟁의 기록
사실 지금의 거대한 물결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에 맞서 스크린쿼터를 지켜냈던 사람들, 70~80년대의 살벌했던 검열을 피해 창작 의욕을 불태웠던 예술인들의 노력이 모인 결과다. 내수시장도 크고 인재도 많은 중국이 왜 이런 파급력을 만들지 못하는가를 보면, 우리 선배들이 지켜온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 TV 앞 소년의 영혼을 키운 자양분
나의 유년 시절은 TV 속 '주말의 명화'와 함께였다. 비디오테이프도 귀하던 시절, TV로 접한 수많은 영화는 내 인격 형성의 자양분이 되었다. 할리우드의 <구니스>를 보며 모험을 꿈꿨고, 안성기·김수철의 <고래사냥>이나 남궁원·김영철·강수연이 나왔던 영화 <업>을 보며 한국적인 정서와 인과의 서사를 배웠다.
# 상전벽해의 공간에서 마주한 진실
성인이 되어 마주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게 '어떤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화려한 미장센 뒤에 숨겨진 진실을 보는 법을 가르쳐준 영화였다. 영화가 스크린 속 환상을 통해 진실을 묻는다면, 현실의 시간은 우리가 살았던 공간의 변화를 통해 진실을 말해준다. 내가 영화 속 '이야기'에 몰입하듯, 이제는 사라져 가는 우리 곁의 '장소'들에 마음이 머무는 이유다.
그래서일까, 유튜브 채널 '달타냥'에서 70~90년대 영화 속 장소들이 지금은 상전벽해된 모습을 볼 때면 묘한 감정이 솟아오른다. 영화는 그대로인데, 그 영화를 찍었던 실제의 땅들은 이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 청량리, 마천루 숲에 남겨진 기억의 섬
특히 매일 일하며 오가는 청량리역이 그렇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별하고 만났던 그 낡은 대합실의 공기는 이제 목이 아플 정도로 높아진 주상복합 건물들 아래로 흩어졌다. 성바오로병원과 '588' 자리를 대신한 고층 빌딩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은 "여기가 청량리였나" 싶을 정도로 낯설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수산시장과 청과시장, 그리고 철길 옆 재개발 안 된 한 블록 정도에 그 시절의 정취가 섬처럼 남아 나를 반긴다.
# 속도감 너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세상은 숏폼과 쇼츠에 뇌가 절여진 듯 빠르게 돌아가고, 한류는 그 속도에 올라타 맹렬히 질주한다. 하지만 나는 그 화려한 속도감 너머를 본다. 우리가 지나온 험난한 길과, 그 길 위에 남겨진 낡은 골목의 기억들. 그 '알맹이'들을 기억하는 한, 이 질주는 단순히 유명세에 기댄 헛된 바람이 아닐 것이다.
#시간여행
#K컬쳐
#청량리
#헐리웃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