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노조가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도입을 저지하기 위해 전면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대중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잔인하다. 댓글창 어디에도 노조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없다. 오히려 "로봇은 파업도 안 하고 성실하다", "불량률이 줄어들 테니 환영한다"는 식의 조롱이 가득하다.
여론이 노조를 이토록 싸늘하게 바라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업자득인 측면이 크다. 그간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선한 약자보다는 욕심 가득한 기득권에 가까웠다. 작업 중 유튜브를 틀어놓아 말도 안 되는 불량품을 만들고, 근무 시간을 허위로 기재하며, 식사 시간이나 퇴근 시간 전부터 몰려나가는 모습들. '귀족 노조'라는 오명 속에 쌓여온 도덕적 해이가 로봇이라는 파도 앞에서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물러나 높은 곳에서 이 현상을 내려다보면, 단순히 노조를 욕하고 비웃는 게 능사가 아님을 금방 알게 된다. 지금 댓글로 노조를 헐뜯는 평범한 이들은 마치 자신은 이 거대한 흐름과 무관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AI가 화이트칼라를 먼저 대체할 것이라 공언하던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장 마지막 보루라 여겼던 육체 노동자의 일자리마저 로봇이 위협하고 있다. 댓글로 노조를 욕하는 사람들 중, 이 거대한 대체 행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기업 입장에서 로봇 도입은 생존을 위한 정교한 시뮬레이션의 결과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역설이 숨어 있다. 생산 현장에서 인력이 로봇으로 대체되었을 때, 과연 로봇이 생산하는 그 상품을 누가 구매할 것인가? 로봇은 차를 만들 수는 있지만, 차를 사지는 않는다. 노동자의 퇴출은 곧 가계 소득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사회 전체의 유효 구매력을 급감시킨다. 구매자가 없는 기업은 존재 이유가 없다.
기업이 이런 기초적인 경제적 파멸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은 이미 정교한 해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해답 속에 ‘인간’을 위한 자리가 없을 뿐이다. 기업은 대중의 구매력이 사라진 세상에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구독 경제’와 ‘시스템 독점’으로의 통합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노조의 몰락에 박수를 치는 사이, 기업은 인간 노동이 필요 없는 폐쇄적인 경제 성채를 쌓고 있다.
더 큰 공포는 이 부도덕한 자본을 제어할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데 있다. 쿠팡 사태에서 목격했듯, 독점적 지위를 가진 기업이 시장을 장악한 뒤 벌이는 약탈적 행위를 우리는 통제하지 못한다. 여기에 트럼프 같은 예측 불가능한 권력이 결합하면 상황은 재앙이 된다. 정교한 민주주의와 도덕적 명분을 갖췄던 국가조차 단 한 명의 광기에 의해 깡패 국가처럼 변질되는 것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로봇이라는 신의 도구가 부도덕한 기업과 미치광이 지도자의 손에 쥐어질 때, 시스템은 대중을 보호하는 대신 약탈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
결국 우리가 마주할 미래는 영화 <매트릭스>의 현실판이다. 뒤통수에 USB 포트만 연결되지 않았을 뿐, 우리는 이미 알고리즘과 플랫폼이라는 무형의 포트에 접속되어 데이터를 생산하고 시스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건전지’로 전락하고 있다. 노조의 비명은 어쩌면 인간이 생산의 주체로서 내뱉는 마지막 단명(斷命)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의 수많은 선택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건너뛰고 있다. 노동하지 않고 기계와 공존하며 탐욕 없는 기업과 협력하는 삶은 너무나 나이브한 바람일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노조라는 '얄미운 타자'의 불행을 구경하며 박수를 치는 동안, 우리 자신의 뒤통수에도 보이지 않는 포트가 깊숙이 박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질문은 노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해야 한다. 매트릭스의 전원이 완전히 켜진 뒤에도, 당신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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