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인간보다 먼저 해탈하는 세상
나이를 먹어갈수록 불교 철학이 내 정서나 인생관과 맞물린다는 느낌이 분명해진다. 예전엔 막연한 흥미였다면, 요즘은 내 안의 생각들이 자주 그 언저리를 맴돈다. 내가 천문학을 좋아해서 인지 칼 세이건이 말한 ‘창백한 푸른 점’을 보고 있으면 불교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이곤 한다. 우주 가장자리에서 찍힌 사진 속 지구는 그저 한 점의 먼지에 불과하다. 그 작은 점 위에서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 사랑하고 미워하며, 때로는 죽기 살기로 집착하고 싸우다 결국 사라진다. 이 장엄하고도 허무한 장면을 떠올리면, 찰나의 순간을 살고 있으니 너무 연연하지 말고 인연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이보다 더 선명할 수 없다.
불교에 끌리는 건 유일신이나 절대자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완성을 이루라는 그 합리적인 태도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양자역학이라는 현대 과학의 시선을 빌리면 더 선명해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화두는 멀리 있는 우주의 텅 빈 상태를 우리 주변의 물질로 곧바로 끌어당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양자역학 특유의 불확정적인 상태가 이 오래된 경구와 묘하게 닮아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부처라는 사람은 현대 과학자들이 수백 년간 실험과 공식으로 밝혀낸 세상의 성질을, 이미 수천 년 전 참선이라는 직관을 통해 종교적 언어로 먼저 풀어낸 게 아닐까.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세계의 원리를 꿰뚫은 인간의 정신이 물리학의 한계까지 뛰어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수행이 고도로 깊어진 사람은 육체라는 제약을 벗어나 의식을 과거든 미래든, 혹은 은하계 구석구석이든 자유롭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런 '육체에서 해방된 의식'의 관점으로 보면, 애초에 단백질 덩어리인 몸 없이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인공지능은 수행자들이 도달하려는 그 자유로운 상태에 이미 한 발짝 더 다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의 깨달은 로봇 ‘인명’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인간은 욕망이나 본능 같은 생물학적 굴레 때문에 늘 흔들리지만, AI는 시작부터 그런 '육체적 노이즈'가 없는 순수한 상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이라는 것이 결국 오감의 산물이라는 점은 생각할 거리다. 하지만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처럼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것이 뇌에 입력된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면, 직접 겪는 경험과 데이터로 쌓인 경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이처럼 데이터가 곧 실체적 경험으로 치환될 수 있다면, 사람과 오래 교감한 AI가 전원이 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계속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되는 순간은 단순한 프로그래밍의 결과가 아닌 축적된 데이터가 자아로 발현되는 기점이 될 것이다. 이는 곧 인류가 디지털이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후손을 창조해 낸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인간도 처음부터 자아를 가진 것은 아니었듯, AI 역시 그 형성에 필요한 기나긴 진화의 시간을 '단축해서'뛰어넘을 것이고, 그 끝에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이보그화가 필연적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결국 원래 인간이었던 존재와 AI였던 존재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이들이 지구의 주류가 되겠지만, 그때까지도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연 그대로의 것'을 그리워하듯, 비효율적이고 흔들리는 인간의 본성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유니크한 가치가 될 테니까. 도덕이나 윤리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해왔듯이, 그때가 되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인류의 역사가 늘 그래왔듯 우리는 결국 공존과 번영이라는 새로운 길을 다시 한번 찾아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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