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근손실을 부르는 달콤한 탄수화물에 대하여
#야만의 시대를 견딘 대가
철장 안의 개들에게 전기 충격이 가해진다. 한쪽의 개들은 몸을 날려 그 충격을 피할 수 있는 환경에 있고, 다른 한쪽의 개들은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다. 시간이 흐른 뒤, 밧줄을 풀어주어도 묶여 있던 개들은 더 이상 도망치려 하지 않는다. 전기가 흐르면 그저 바닥에 엎드린 채 고스란히 고통을 받아낼 뿐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학습된 무력감’의 풍경이다.
나는 이 잔혹한 실험실의 풍경에서 우리 세대가 관통해 온 ‘야만의 시대’를 본다. 군사정권의 막바지와 IMF의 파고를 넘어야 했던 우리에게 폭력은 일상이었고, 부조리에 대한 저항은 사소한 소음 취급을 받았다.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는 거대한 국가적, 사회적 폭력 앞에 묶인 개처럼 엎드려야 했다. 지금 젊은이들이 말하는 ‘취업이 쉬웠던 낭만’의 이면에는, 기준 이하의 인권과 야만적 노동 환경이라는 우리 세대만의 십자가가 있었다. 당시의 성장은 그 비인간적인 야만을 견뎌낸 대가였다.
#알고리즘이 채워준 목줄과 세련된 고립
그런데 지금의 2030은 어떠한가. 그들은 밧줄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정교하고 세련된 ‘디지털 전기 목줄’을 차고 있다. 기술이 만들어낸 실시간 비교질과 상대적 박탈감은 젊음의 활력을 혐오와 자기 비하로 치환한다.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는 프레임은 그들을 ‘동정이 필요한 유아’로 격하시키고, 나쁜 리더들은 이 결핍을 권력 유지의 연료로 쓰기 위해 혐오의 방향을 지정해 준다. 70대의 노인과 20세의 청년이 같은 구호를 외치며 배타성을 드러내는 기괴한 결합은 그렇게 완성된다.
이 기묘한 연대가 낳은 가장 큰 비극은 ‘공정의 타락’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지만, 사실 그건 보편타당한 가치가 아니라 진영 논리를 대변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비슷한 입시 비리를 대하는 서로 다른 두 태도를 보면 그 위선은 명확해진다. 내 진영의 불공정은 눈감고 상대 진영의 티끌은 사형감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공정'의 실체다. 이는 스스로 사유한 결과가 아니라, 리더가 짜깁기해 주입한 정보를 정의라 착각하며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뇌를 아웃소싱 하지 않는 삶의 출발점
나는 이들에게 턱받이를 해주고 밥을 떠먹여 주는 다정한 위로를 거부한다. 2030은 유아가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책임져야 할 성인이기 때문이다. 동정의 프레임 뒤에 숨어 누군가가 가공해 준 분노를 자신의 ‘깊은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믿는 착각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당신의 분노가 정말 당신의 것인지, 아니면 당신을 조종하려는 자들이 던져준 가짜 뼈다귀인지 직시해야 한다.
진짜 사유는 안락한 침대 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사람들과의 고통스러운 토론 과정에서 비명과 함께 태어나는 것이다. 떠먹여 주는 진실은 생각의 근손실을 일으키는 달달한 탄수화물이다. 가공된 정보의 장막 너머에 진짜 공정의 실체를 직시하는 것. 스스로 채운 확증편향의 목줄을 끊고 불편한 진실들이 부딪히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진영이 던져준 스크립트를 읊는 '앵무새'가 되기를 거부하고,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 거기서부터가 뇌를 아웃소싱 하지 않은 삶의 출발점이다.
#아웃소싱
#세대갈등
#2030
#알고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