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드의 중2병과 발리우드의 떼춤이 숭고해지는 찰나

by 무학의통찰

반세기에 가까운 긴 세월의 매듭을 짓는 일본 다카시마야 백화점의 폐점 날. 입구에는 마치 시대극의 한 장면처럼 직원들이 도열해 있다. 흰 장갑을 끼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대열로 선 그들은, 멸망하는 왕국을 지키는 기사단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운명의 순간을 기다린다. 점장이 마이크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90도로 허리를 굽혀 정교한 침묵의 각도를 만들어낸다.


진짜 비현실적인 광경은 셔터가 바닥을 향해 무겁게 내려올 때 완성된다. 길을 가던 행인들과 단골손님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더니, 누구도 시키지 않았으나 모두가 주연 배우처럼 이 작별의 서사에 가담하여 경의를 담은 박수를 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셔터가 완전히 닫혀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는 그 찰나까지, 밖에서는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고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고개가 숙여져 있다. 이 집단적인 과몰입과 정교한 20초의 마침표를 지켜보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단 한순간의 낭만치사량을 얻기 위해, 일본이라는 사회는 일상적인 중2병스러움을 기꺼이 견뎌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짧은 사유 안에는 사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창작물에서 감동을 제조하는 기이하고도 정교한 알고리즘, 이른바 '오글거림의 할부 제도'에 대한 관찰이 담겨 있다.


낭만이라는 카타르시스를 위한 오글거림이라는 할부

내가 말한 '중2병스러움'은 단순히 유치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경계를 아득히 넘어선, 지나치게 성실한 연극성이다. 나 역시 그들의 과잉된 비장미를 견디는 것이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주인공이 '동료'나 '인연'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며 주먹을 꽉 쥘 때의 그 오글거림은 웬만한 항마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거대한 장벽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민망하고 작위적인 빌드업을 묵묵히 통과해 마침내 결말에 도달했을 때, 거기서 터져 나오는 단 한 번의 낭만치사량이 그간의 모든 고통을 순식간에 휘발시켜 버린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 찰나의 도파민이 너무나 강렬해서, 방금까지 리모컨을 던지고 싶었던 마음조차 잊은 채 "아, 역시 이거였지"라며 무너지고 마는 것. 이 지독한 가성비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일상의 모든 순간을 기꺼이 연극으로 바친다.


신파, 중2병, 그리고 맛살라

이웃한 국가들이 감동을 정의하고 끌어내는 자세가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한국의 신파가 눈물샘을 강제로 개방하는 감정의 멱살캐리라면, 일본의 중2병은 1%의 진심을 위해 99%의 가짜(연극)를 견뎌내는 정교한 합의다.


인도 발리우드의 뜬금없는 군무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난데없는 밈(meme)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이야말로 감정의 임계점을 돌파하게 만드는 그들만의 완벽한 도파민 분출 프로세스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진심이 코미디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세련미라는 이름의 권력, 쿨함이라는 빈곤

우리는 흔히 할리우드식 매끄러운 서사에는 세련되었다는 훈장을 달아주면서, 인도나 일본의 방식에는 촌스럽다거나 오글거린다며 야박한 평점을 매긴다. 하지만 이 세련미라는 잣대는 사실 대단히 기만적이다. 그것은 감동의 본질이 아니라, 자본과 기술이 정교하게 다듬어놓은 '감정의 가공식품'에 익숙해진 우리의 편식일 뿐이다.


우리가 그들의 방식을 촌스럽다 비웃는 진짜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지나치게 '효율적인 쿨(Cool)함'에 중독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감정의 가성비를 따지느라 오글거림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기 싫어하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 뜨거운 몰입을 회피한다. 민망함을 무릅쓰고서라도 기어이 그 낭만의 순간을 대면하려는 집요함은, 비웃음의 대상이기 전에 그들만의 유효한 감동 문법이다.


취향의 카스트 제도를 거부하며

결국 문제는 주파수가 얼마나 낡았는가가 아니라 나와 맞는 채널인가의 차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면 수준 높고, 발리우드를 좋아하면 수준 낮은가? 이런 인식이야말로 취향의 다양성을 질식시키는 가장 폭력적인 편견이다. 타인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이 될 수는 없으며, 취향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의 감동을 채점하려 드는 오만함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오글거림이라는 통행료를 내고 만나는 그들의 성실한 낭만을 온전히 수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진심은 그 자체로 동등하게 숭고하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결만큼의 감동을 누릴 시스템과 자격이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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