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없는 노후를 위한 점진적 과부하

by 무학의통찰

1. 집중을 깨뜨린 하이톤의 난입

귀가 눈을 흔드는 순간이 있다. 카페의 정적을 비집고 들어온 하이톤의 웃음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평온하던 내 집중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갑작스러운 난입이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것은 내 눈이 익숙해진 질서를 보란 듯이 깨뜨리는 풍경이다. 짧게 친 머리에 투박한 워커를 신어 남성성을 흉내 낸 이와, 그 곁에서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여성성을 강조한 이. 종종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흔하지는 않은 그들이 만드는 선명한 대비는 호기심을 넘어, 내 머릿속에 관계의 문법에 대한 질문들을 던져놓는다.


2.'여자끼리의 사랑'에 왜 다시 남자가 필요할까

남자라는 존재를 거부하고 여자와의 사랑을 선택했다면서, 왜 그들은 다시 남자의 모습을 빌려오는 것일까. 한 명은 왜 다시 전형적인 여성의 역할 안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것일까. 낡은 남녀의 역할 분담을 그대로 베껴온 듯한 그들의 풍경을 보며 나는 내심 묻고 싶어진다.


3. 이름을 붙여야만 안심하는 나의 좁은 서랍

하지만 이내, 그 원피스의 가벼움 뒤에 숨은 마음을 가만히 읽어본다. 그것은 어쩌면 남성이라는 성별이 가진 위협이나 권위는 솎아내고, 그들이 독점해 온 ‘든든함’이라는 열매만 취하고 싶었던 영리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혹은 세상이 온통 ‘남과 여’라는 두 칸짜리 서랍으로만 설계되어 있기에, 그 틀을 흉내 내야만 비로소 사회라는 스크린 위에 ‘안정적인 연인’으로 비칠 수 있다는 어느 소수자의 서글픈 타협이었을까.


4.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낡은 레이더

그러나 이런 분석 끝에 마주한 것은 타인의 진실이 아니라, 내 인식 체계가 얼마나 좁고 낡았는가에 대한 자백뿐이다. 나는 지금 그들의 실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뇌가 미리 짜놓은 ‘편견의 그물’에 걸려든 조각들만 읽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 일상에도 수많은 동성 연인이 스쳐갔겠지만, 겉모습이 평범했던 그들은 내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직 이렇게 ‘남녀’의 구도가 선명한 커플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내 뇌가 여전히 “사랑은 서로 다른 성별이 만나야 조화롭다”는 고정관념에 찌들어 있다는 증거였다.


5. 사고의 유연함? 3대 500은커녕 헬린이였다

나조차 세상이 정해놓은 ‘중년 남자’라는 틀을 거부하며 나만의 길을 걷고 있다고 자부해 왔지만, 그 오만한 믿음은 커플의 옷차림 하나에 속절없이 부서진다. 스스로를 유연한 사람이라 믿어왔던 다짐이 실은 얼마나 표리부동한 것이었는지를, 내가 믿었던 상식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머릿속 ‘해석의 매뉴얼’이 두꺼워지는 과정이다.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며 판결을 내리고 싶은 유혹, 그 관성에 저항하며 생각의 탄력을 유지하는 일은 몸의 근육을 키우는 것보다 훨씬 가혹한 ‘점진적 과부하’를 요구한다.


6. 해석의 메스를 버리고 '무지의 예의'로

세상의 이유를 전부 깨닫기에 나는 아직 부족한 것투성이다. 카페를 나서며 나는 타인의 생을 단순하게 넘겨짚으려 했던 내 시선의 가벼움을 뉘우친다. 이제 나는 그들의 관계를 분석하며 넘겨짚는 대신, 그저 ‘해석할 수 없는 그들만의 생동감’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물어보기 전에는 절대로 닿을 수 없는 타인의 수만 가지 사연을 존중하는 것, 그 ‘무지의 예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내가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 할 진짜 수양의 첫걸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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