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장판 위의 사육사

by 무학의통찰

알고리즘이 던져준 지배의 설계도

유튜브 알고리즘은 극단적일 정도로 무심하다. 방금까지 스테이크 굽는 법을 친절하게 읊조리던 기계음이, 다음 칸에서는 인도 숲길에서 벌어진 외국인 집단 성폭행 속보를 내던진다. 고해상도 액정 위로 픽셀화된 피해자의 비명이 쏟아지고, 사람들은 기겁하며 댓글창에 ‘미개함’이라는 댓글을 단다. 하지만 이 비극은 통제 불능의 광기가 아니다. 수천 년간 조직된 지배의 톱니바퀴가 의도된 궤도를 따라 돌아가며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허가된 폭력 vs 비겁한 사냥

인도의 성폭행은 가해자의 성씨에 따라 그 결이 갈린다. 상위 카스트의 성폭력은 지배를 확인하는 비열한 의식이다. 하층민의 육체와 영혼을 파괴하며 "너희는 우리 발밑의 짐승"임을 각인시키는 정치적 도구로 성범죄를 저지른다. 반면 하층 카스트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벌이는 범죄는 사냥에 가깝다. 사회적·성적 억압을 풀 길 없는 자들이 시스템 밖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저질 미디어의 왜곡된 환상이 집단이라는 익명 뒤에 숨어 벌이는 비겁한 분풀이다.


무지를 자양분 삼은 교수대

지배층은 이 야만을 굳이 교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육은 리스크가 너무 큰 투자다. 하층민이 인권과 평등을 배우는 순간, 그들은 성범죄자가 아니라 체제를 위협하는 ‘정치적 주체’가 된다. 깨어난 하층민은 성폭행 뉴스보다 훨씬 끔찍한 재앙이다. 그래서 기득권은 가성비 좋은 통치 공학을 택한다. 예방 교육 대신,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해자 몇 명을 골라 잡아 교수대에 매다는 전시용 처벌을 택하는 것이다. 정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챙기면서 대중에게는 "개기면 죽는다"는 공포를 주입한다. 무지는 권력을 지탱하는 가장 안전하고 값싼 연료다.


분노의 하향, 저항을 질식시킨 거대한 늪

끔찍한 설계는 인도를 저항이 불가능한 늪으로 만든다. 중동의 독재가 부숴야 할 선명한 '벽'이라면, 인도의 카스트는 수만 갈래로 찢어진 파편화된 감옥이다. 내가 시궁창에 처박혀 있어도 내 발밑에 짓밟을 누군가가 있다는 비겁한 안도감이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분노는 결코 위로 향하지 않고 옆 사람의 멱살을 잡는 데 사용된다. 성자라 칭송받는 간디조차 이 감옥을 부수는 대신 ‘깨끗하게 청소하는 법’을 가르치며 체제에 순응했다. 늪은 그렇게 영생한다.


마천루로 업그레이드된 낡은 사다리

카스트는 이제 자본과 학벌이라는 쌔끈한 비즈니스 정장을 입고 실리콘밸리의 마천루로 자리를 옮겼다. 인도 공과대학(IIT)을 거쳐 미국 IT 기업을 점령한 엘리트들의 성씨를 보라. 그들은 세련된 코딩 언어를 구사하지만, 뇌 밑바닥에선 여전히 상대의 카스트를 스캔한다. 이제 직업은 새로운 카스트다. 같은 회의실에 앉아 있어도 할당제로 들어온 동료를 ‘오염물’ 취급하는 보이지 않는 칸막이는 더 정교하게 작동한다. 낡은 사다리는 부서진 게 아니라 현대적인 사무실 안에서 더 단단하게 보강되었을 뿐이다.


문명이라는 양복, 얇은 장판밑의 진실

문명은 짐승을 길들인 적이 없다. 다만 멀끔한 양복을 입혀 범죄에 따르는 비용을 계산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는 시스템이라는 얇은 장판 위를 교양 있게 걷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 장판 밑에서 꿈틀대는 날것의 본능은 교육이라는 사육사의 채찍 아래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다시 스마트폰을 켠다. 여전히 액정의 푸른빛은 어두운 방안을 서늘하게 비춘다. 인도의 뉴스는 이국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입고 있는 그 얇은 양복의 실밥이 터져나가는 현장 기록이다. 장판이 찢어지고 사육사가 채찍을 내려놓는 순간, 당신 옆에 앉은 교양 있는 이웃이 어떤 얼굴로 돌변할지 당신은 정말로 단언할 수 있는가.


#인도성범죄

#카스트제도

#교육

#문명과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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