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 디저트 열풍은 이제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민생 뉴스처럼 일상을 파고든다. 어디를 가나 인증샷을 찍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이 보이고, ‘두바이 쫀득 쿠키(두쫀쿠)’라 불리는 과한 밀도의 디저트가 SNS 피드를 점령한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 소란스러운 풍경 너머로, 문득 단맛이 품고 있던 오래된 상징들을 떠올린다.
단맛은 언제나 권력의 선명한 상징이었다. 아랍의 연금술사들이 사탕수수를 하얀 결정으로 바꾸는 제련 기술을 독점했을 때, 설탕은 ‘하얀 금’이자 그 자체로 지배력이었다. 지금의 두바이가 사막 위에 기적을 세우기 훨씬 전부터, 중동의 황제들은 혀가 마비될 정도의 바클라바를 먹고 설탕으로 거대한 성과 조각상을 만들어 전시한 뒤 보란 듯이 부수었다. 그것은 미각의 유희가 아니라 자원의 압도였다. 이 귀한 것을 이토록 무의미하게 낭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그것이 제국이 권위를 세우는 행위였다.
설탕이 나지 않던 땅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부린 사치는 중동의 물량 공세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처절했다. 조선반도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밀을 곱게 가루 내고, 일반 민중은 구경조차 힘든 꿀로 반죽하여 역시나 아껴 먹어야 했던 귀한 참기름을 들이붓고 튀겨낸다. 여기에 쌀 다섯 말을 졸여야 겨우 한 말 남짓 얻을까 말까 하는 조청에 절인 뒤, 마지막으로 귀하디 귀했던 잣을 고명으로 올린다. 약과(藥菓)는 그야말로 사치의 극이었다.
처음에는 이 ‘약’이라는 단어가 사치를 가리기 위한 얄팍한 알리바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쌀 다섯 솥 분량의 귀한 식량을 반나절 넘게 장작불 속의 노동집약으로 뽑아낸 단 한 줄기의 엑기스, 그 조청의 공정을 들여다보는 순간 생각은 뒤집힌다. 그것은 사치를 덮으려던 얄팍한 핑계라기보다, 도저히 과자라는 이름으로는 담아낼 수 없었던 그 지독한 노역에 대한 경외에 가까웠다. 부피를 5대 1로 압축하며 쌀의 생명력을 극한까지 쥐어짜 낸 이 비효율의 결정체를 조상들은 감히 ‘과자’라는 가벼운 이름에 담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수식어인 ‘약’을 빌려 이 사치를 신성화했다. 양반가조차 흉년에는 금지령을 내려야 했던, 계급의 자존심을 건 단맛의 정수였던 셈이다.
수천 년 전 중동의 사치가 ‘두쫀쿠’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시 돌아온 풍경을 보며 현대인의 줏대 없음을 비웃으려던 마음은 이내 멈춘다. 그것은 과거의 약과가 ‘나만 먹을 수 있는’ 수직적 차별화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의 두쫀쿠는 ‘남들도 먹어본’ 유행에 올라타려는 수평적 동조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조상님께 정성을 증명하려 제사상에 약과를 올렸다면, 지금은 불특정 다수에게 나의 좌표를 증명하려 SNS라는 제단에 두바이의 단맛을 올린다.
방식만 바뀌었을 뿐, 단맛을 매개로 나의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평행선을 달린다. 피드는 현대판 제사상이며, 필터로 보정된 두쫀쿠 사진은 소외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제물이다. 설탕은 늘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권력의 도구였을 때도, 신성한 약이었을 때도, 인증을 위한 놀이가 된 지금도 설탕은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린다. 민생 뉴스보다 더 뜨거운 이 유행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입안 가득 욱여넣은 두쫀쿠의 밀도를 사진으로 옮겨 담는다. 그것은 단맛에 대한 탐닉이라기보다, 이 거대한 파도 위에 내가 무사히 올라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성실한 몸부림에 가깝다. 중동의 황제도, 조선의 양반도, 그리고 지금의 우리도 결국 설탕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각자의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선명한 상징을 묵묵히 응시한다. 다음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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