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들의 성장통
첫째 아들은 29개월이 되던 시기에 동생이 3명이나 생겼다. 삼둥이 임신 기간에 워낙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들었던 터라 첫째와 맘껏 놀아주고, 사랑해주었어야 했는데 그 시기가 너무 짧아 미안할 뿐이었다. 아직 말도 잘 못하고, 기저귀도 떼지 못한 채 어린이집 종일반에 보내야만 했다.
출산 후에는 3주 동안 산후조리원에 가 있느라 큰 아이와 생이별을 했고, 아이는 그나마 남아있던 아빠와도 지낼 수 없는 형편이라 이 집, 저 집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삼둥이 출산하기 전에 겨우 기저귀를 떼었는데 동생이 태어나고 다시 기저귀를 차기 시작했다.
아이가 변을 잘 보지 않고, 늘 참다가 속옷에 지리는 상황이 초등학교 1학년때까지 지속되었다. 어딜 가나 외출도 쉽지 않고, 늘 변을 지리고 다니는 아이와 옥신각신 하며 삼둥이 육아와 함께 지쳐갔다.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이 문제가 학교생활에 너무 큰 지장을 줄 것 같아 큰맘 먹고 소아정신과에 찾아갔다.
'유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놀이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놀이치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알게 된 OOO아이존을 방문했다. 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은 치료비가 무료였다. 의사의 진단서와 각종 검사를 통해 1년 동안 무료로 모래놀이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상담소장님과 면담을 했다.
"치료를 시작하게 되면 엄마와 같이 올 수 있나요?"
"네, 가능합니다."
"엄마와 자녀가 치료센터에 1:1로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도 치료효과는 50%입니다."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같이 다니는 것만으로도 치료효과가 있다는 게 말이다. 그러나 소장님의 말씀은 바로 현실이 되었다. 첫째가 9살이 되는 해 1월에 치료를 시작했는데, 치료를 시작함과 동시에 유분증 증상이 바로 없어졌다. 치료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매주 화요일 학교 앞에서 첫째를 만나 간식을 먹고 치료센터로 가는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그 시기에 여러모로 매우 바쁜 시기였으나, 첫째와의 약속은 꼭 지키려고 1년 동안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열심히 치료를 다녔다. 아이도 치료센터에 다니는 걸 좋아했고, 특히 치료 선생님을 너무 좋아했다. 1년의 치료를 잘 마치고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나름 표현하며 선물도 했다. 그렇게 큰 아이의 치료는 끝났다.
지금 그 아이는 거뭇거뭇 콧수염이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방문을 닫아버리고, 엄마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첫째 아이에게 바랄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바라는 건 그저 건강하게만 커다오밖에...
2007년 OO위스타트 마을에서 만난 OO이라는 아이가 생각난다. 그 아이는 그 당시 3학년이었는데 센터에 변냄새를 풀풀 풍기며 오곤 했다. 옷을 갈아입히려고 하면 질겁을 하며 도망 다니던 아이였다. 그 아이는 엄마가 없이 할머니가 키우던 아이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 아이가 왜 변을 지리고 다니는지 말이다. 첫째 아이처럼 기저귀를 땔 때쯤 엄마의 부재로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했을까? 엄마가 있어도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나의 아픈 손가락인 첫째 아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