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이라는 이름의 퇴화

AI 시대의 생각 근육

by 로벨리아

편리함이라는 진화가 가져온 역설적인 퇴화

인간의 몸에는 '흔적 기관'이라는 것이 있다. 과거에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지만, 환경이 변하면서 쓰임새를 잃고 흔적만 남은 부위들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랑니'다.


불을 발견하기 전, 인류는 질긴 생고기와 단단한 뿌리채소를 거칠게 씹어 삼켜야 했다. 이를 위해선 크고 튼튼한 턱뼈와 어금니가 필수였다. 하지만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하며 식감은 부드러워졌고, 거친 저작 활동은 줄어들었다. 인류의 턱은 점점 작아졌으며, 결국 가장 늦게 돋아나는 사랑니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우리에게 고통만을 안겨주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쓰지 않는 것은 퇴화한다는 자연의 법칙은 이토록 정직하고도 잔인하다.


생존을 위한 사냥에서 '생존을 위한 스트레칭'으로

신체의 퇴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과거 인류에게 '움직임'은 곧 '생존'이었다. 사냥감을 쫓아 벌판을 달리고, 열매를 따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행위 자체가 삶이었다. 그들에겐 '따로 시간을 내서 하는 운동'이나 '스트레칭'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신체 활동이었으니까.


그러나 현대인은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사냥을 나가는 대신 배달 앱을 켜고, 이동을 위해 걷는 대신 자율주행 차에 몸을 싣는다. 신체를 쓸 일이 사라지자, 우리는 역설적으로 생존을 위해 '부자연스러운 노력'을 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퇴화해 가는 근육을 붙잡기 위해 비싼 돈을 내고 헬스장을 가고, 굳어가는 관절을 펴기 위해 의식적으로 스트레칭 시간을 확보한다. 몸이 너무 편해진 대가로, 우리는 몸을 지키기 위한 '의도적인 고통'을 선택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AI 시대, 뇌는 '지적 사랑니'가 될 것인가

더 무서운 사실은 이제 이 퇴화의 칼날이 인간의 '지성'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대학가에서는 AI가 작성해 준 과제가 논란이다. 방대한 자료를 읽고, 핵심을 파악하며,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엮어내는 고통스러운 '사고의 과정'을 AI가 단 몇 초 만에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과제를 하나 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먼지 쌓인 책들을 뒤지고, 수많은 텍스트를 읽으며 정보를 '소화'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단련되었고 생각의 근육은 깊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AI라는 '지적 믹서기'가 모든 정보를 부드럽게 갈아서 내놓는다. 우리는 씹을 필요도 없이 그저 삼키기만 하면 된다.


거친 음식을 먹지 않아 턱뼈가 작아지고 사랑니가 퇴화했듯, 스스로 깊게 생각하는 법을 잊은 우리의 뇌 또한 퇴화의 길을 걷게 되지는 않을까?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이라는 지적 근육이 사라진 자리에, AI 없이는 한 문장도 스스로 쓰지 못하는 '지적 흔적 기관'만 남게 될까 두렵다.


의도적인 불편함이 필요한 이유

퇴화는 '편리함'이라는 달콤한 덫에서 시작된다. 몸이 편해질수록 근육은 약해지고, 머리가 편해질수록 지성은 얕아진다. 사랑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우리가 가진 기능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다면, 환경이 주는 안락함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육을 위해 무거운 덤벨을 들듯, 우리의 뇌를 위해서도 '의도적인 불편함'이 필요하다. AI가 요약해 준 결과보다는 두꺼운 원문을 직접 읽어보는 수고로움, 검색 한 번에 정답을 찾는 대신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는 인내심. 이러한 지적 스트레칭만이 우리를 '생각하는 인간'으로 남게 할 것이다.


수만 년 뒤의 후손들이 우리의 뇌를 보며, "과거 인류는 직접 생각을 했었다지?"라며 사랑니를 보듯 안타까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당장, 우리 안의 생각 근육을 깨워야 할 때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