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4.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주기
Ep. #4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주기
피아제(Jean Piaget, 1896–1980)는 스위스 출신의 심리학자로, 발달 심리학의 선구자이자 아동 인지 발달 이론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아이들의 학습과 사고 과정이 단순히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아이들이 고유의 속도로 발달하며 각 단계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아들과 함께 수학 공부를 하기 위해 학원 숙제를 풀어가며 아이의 학습 과정을 관찰했다. 나는 미리 숙제를 풀어 노트에 정리했기 때문에, 아이가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바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자꾸만 "그게 아니지..." 라고 말하며 풀이를 거침없이 적고 있었다. 그렇게 말할 때마다 아들이 깜짝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들이 틀린 풀이과정을 적으면 바로 수정하거나 알려주지 않고, 지우개로 잘못된 부분을 지워주며 다시 풀도록 했다. 틀린 과정을 적으면, 지우고, 다시 쓰고, 또 틀리면 다시 지우며 잘 생각해 보자며, 힌트를 주는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아들이 스스로 올바른 답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다.
사실 이 과정에서 나 자신과도 싸워야 했다. 문제를 푸는 방법과 정답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풀이 과정을 바로 가르쳐 주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꾹 참고 기다렸다. 나의 역할은 정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임을 상기하며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했다.
또한, 미분 문제를 풀기 위해서 처음 배우는 미분에 대한 개념 뿐만 아니라, 이전에 배우고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극한의 개념이 다시 필요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웠던 고차방정식의 인수분해 공식도 기억해 내야 했다. 이럴 때는 다시 그 부분을 정리해주며 간단한 예제를 풀어보며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숙제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제 수학II를 풀기 위해서는 단순히 현재 배우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전에 배우고 지나쳤던 기초 개념과 공식이 결합되어야만 새로운 개념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었다.
함께 문제를 풀면서 느낀 점은 다소 의외였다. 아들의 수학적 이해도나 계산 능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계산 실수가 종종 보이긴 했지만, 이는 집중력의 문제나 과속하려는 경향 때문이지, 수학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해력이나 개념은 비교적 탄탄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 방식에서 조급함이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이런 조급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아들의 학습 환경을 돌아보며 문제의 원인을 짐작해 보았다. 아마도 빠른 진도와 이른바 ‘킬러문항’으로 대표되는 어려운 문제들이 원인일 가능성이 컸다. 요즘 학교 시험 문제들은 대체로 난이도가 높고, 빠르게 답을 찾아야 하는 유형이 많다. 이런 환경은 아이에게 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심어주고, 차근차근 사고하며 문제를 풀어가는 능력을 기를 기회를 빼앗았을지도 모른다. 아들은 자신만의 속도로 문제를 풀며 배울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채, 점점 더 강박적으로 답을 구하려 했던 것 같다.
학원에서는 정해진 시간 안에 모든 문제를 풀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며 답을 찾는 시간을 충분히 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학원의 이런 구조적 한계는 이해하기 때문에, 나는 집에서만큼은 아들의 속도에 맞춰 함께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문제를 푸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어지든, 아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과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한 페이지에 불과한 문제를 푸는 데 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아들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를 지켜보고, 그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들은 학원 숙제를 다 해가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특히 숙제의 뒷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어려운 문제들은 아들이 아직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수준이었다. 나는 그 문제들까지 모두 풀기를 강요할 수 없었다. 어려운 문제에 대한 부담감을 주는 대신, 지금은 아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학습을 진행하며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이 시점에서 지나친 욕심을 내어 어려운 문제들을 무리해서 풀게 한다면, 아들은 학습 자체에 흥미를 잃고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의 학습 과정이 단지 성적 향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는 힘을 기르는 여정임을 기억하고자 했다.
결국, 나는 한 걸음씩 아들의 속도에 맞춰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이 성장의 기쁨을 느끼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신감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먼저 지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인내심이야말로 아들이 자기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임을 믿는다. 모든 아이들은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 다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전진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이 서로 비교하며 자신의 아이를 째찍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