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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팸트리 Oct 05. 2015

세계기록유산과 족보


 아래의 기사는 대전의 중도일보(http://www.joongdo.co.kr)에 2011년 11월 8일부터 10회 걸쳐 연재된 시리즈 기사입니다. 


1회 : 21세기에 왜 족보인가?  

한국인의 족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방대한 가계기록이다.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 472년간의 국가에 대한 공적인 기록이라면 족보는 한 가문의 사적기록이다.   

역사책에서 볼 수 없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수대에 걸쳐 이어져온 가계기록이 한국족보박물관에 집대성 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를 담은 뿌리공원 성씨조형물은 대전이 뿌리 있는 고장임을 보여주고 뿌리를 보존하고 있는 족보박물관은 전국적 명소다.   

본 시리즈는 전국 족보의 90%를 출판하는 족보 있는 도시 대전을 세계기록문화유산 도시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대전이 왜 족보메카인지를 시작으로 족보박물관과 선비문화, 재미있는 족보의 세계, 족보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전략 등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대전시 중구 침산동 뿌리공원에 있는 한국족보박물관. 평일 하루 평균 3000명, 주말에는 5000명이 넘는 사람 들이 이곳을 찾는다. 대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향토사료관과 대전의 선사문화를 알 수 있는 대전선사박물관에 하루 300명의 관람객이 채 안 오는데 비하면 엄청난 관람객 수다.   

족보박물관의 또 다른 특징은 노년층 관람객이 많다는 것이다. 손자손녀에게 우리 가문의 뿌리를 폼 나게 들려주고자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꼼꼼히 받아 적고 사진도 찍어가며 열심이다. 대전시민보다 외지관람객이 훨씬 많다는 게 족보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주중에는 주로 타 지역에서 관광버스를 이용해 방문하는 중장년층이 많고 주말과 휴일에는 가족단위 관람객이 주를 이룬다”면서 “뿌리공원 입구인 족보박물관에서 족보와 성씨에 대해 공부한 후 자신들의 성씨유래비를 찾아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도 트위터 친구를 맺고 소통하는 스마트시대에 왜 족보인가?   

성봉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족보에 대해 “단순히 누가 누구의 자손이고 그 자손은 어떠하다는 식의 단순 계보적 접근을 넘어 족보는 기존 역사서술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미시사적 관점에서 한 가정이 시대를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료”라고 평가했다. 더 이상 족보를 '죽은 자의 명첩(名帖)' 정도로 폄하해선 안된다는 뜻이다. 더구나 한 집안의 역사책인 족보는 해외 한국학자들에 의해 '가장 한국적인 텍스트'로 평가받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학술자료다. 공적인 역사서술의 빈 공간을 채워주고 묻혀 있던 이야기를 담은 족보의 가치를 재조명할 필요성이 여기 있다.   

'청학동 훈장'으로 유명한 김봉곤(44)씨는 '족보'라는 자신의 책에서 족보를 '살아 있는 어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족보는 내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소중한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문벌을 자랑하는 양반들이나 들먹거리는 전근대적 유산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며 “족보에 적힌 작은 사연은 문중의 전설이 되고 충신, 학자, 효자·효녀 등 족보 행간의 기록들은 '피의 기록'이자 '혈연의 역사'로 계승돼 족보는 죽은 자의 기록이 아닌 살아 있는 집안의 어른”이라고 말했다.   

현전하는 우리나라 최초 족보는 1476년(성종 7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 '성화보'다. 이 집안 출신의 한 정치인은 학창시절 운동을 좋아해 고교 진학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돌다 아버지가 보여준 족보를 본 뒤 이대로 살다가는 가문과 조상에 누가 되겠다는 생각에 제자리를 찾았다고 토로한적이 있다.   

한 집안의 계통을 담은 가계기록이 사람의 인생까지 바꿔 놓는 것을 보면 족보는 더 이상 먼지 쌓인 묵은 기록차원을 넘어 집안의 정신적 지주인 셈이다.   

이에 대해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는 “한 나라에 역사가 있듯 각 가문에는 문중의 역사가 있다”면서 “족보는 뿌리에 대한 가지들의 기록으로 혈연으로 얽힌 이 가지와 뿌리를 찾는 작업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정보통신의 발달과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이 급속히 이뤄지는 현대사회에서 성씨나 족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줄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족보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기록이며 구체적으로는 당시 인물들의 출신지역과 사회적 배경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신뢰도에 따라 다른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성봉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족보가 갖는 역사성과 사료적 가치를 보더라도 족보는 더 이상 특권층의 상징만은 아니다”라며 “최근에는 문헌으로 된 족보 발간과 동시에 전자 족보 내지는 인터넷족보의 발간도 활발해지는 등 기록과 간행방식들만 변할 뿐 족보는 여전히 소중한 가계기록으로 집안을 지키고 이어주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류용환 대전선사박물관장은 “역사에 기록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름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족보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특이한 문화현상”이라며 “우리나라는 일찍이 문자와 인쇄술의 발달로 족보문화도 계승 발전될 수 있었는데 족보를 단순한 가계기록으로만 볼 게 아니라 이를 재평가하고 연구해 인류의 공통의 자산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2회 : 족보의 역사와 체제   

성은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인류가 자기혈통의 뿌리를 기억하고 같은 조상에서 나온 가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것이 성이다. 성씨는 성(姓)과 씨(氏)가 합쳐진 용어로 성은 혈족집단을 말하며 씨는 사는 지역, 곧 본관을 의미한다. 성이 아버지 핏줄을 나타내며 시간에 따른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본관은 어느 한 시대에 조상이 살았던 거주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공간에 따른 연속성이 크다. 따라서 성이 같고 본관이 같다는 두 조건이 성립될 때에만 한 집안의 핏줄이라는 사실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씨는 언제부터 쓰였을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나라이름을 고구려라 하면서 성씨를 고씨(高氏)라 했고 백제의 온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해 성을 부여라 했다고 한다.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3성의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 성씨의 수는 '동국여지승람'에는 277성으로 기록되었고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문헌에 있는 성을 다 포함했기 때문이다. 1960년 실시한 인구조사에는 258성으로 나타났으나 현재에는 귀화하여 창씨를 한 사람이 늘어 2000년 기준 280개 성씨가 있다.   

2008년 효문화뿌리축제 홍보대사로 위촉됐던 하일(로버트 할리)씨는 미국인으로 한국에 귀화해 부산 영도 하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독일 태생으로 한국에 귀화해 첫 공기업 사장에 오른 이참(이한우)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독일이씨의 시조다. 

이러한 성씨관계를 밝힌 것이 족보인데 족보가 처음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곳은 고대 지중해 연안이었다고 한다. 주로 수도사들이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을 그 시초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 중국에서는 육조시대부터 집안의 계보를 만드는 일이 성행했고 송대와 원대에 걸쳐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중국 북경도서관에 있는 가정각본(嘉靖刻本)인데 명나라 때 제작된 것으로 조선 초기 우리나라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족보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조상숭배 의식에서 비롯된 가계전승의 기록은 존재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첫머리에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주몽·동명왕)의 신비로운 출생과 건국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고 추모왕에서부터 17대 광개토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왕실의 계보를 밝히고 있다.   

성봉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건국신화와 왕실계보는 고구려국가의 신성함과 왕실의 존엄성을 자랑하고 추모왕의 후예인 광개토대왕이 특권적 신분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처럼 고대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그들 혈통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과시하기 위한 가계가 전승되다가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처럼 일정한 시점에 문자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족보박물관 3전시실에 있는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동명왕)의 신비로운 출생과 건국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소개한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추모왕을 '천제의 아들'이라고 해 태양신의 자손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어 광개토왕릉비에 새겨진 계보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가계전승기록”이라고 의미를 담았다.    

고려시대에도 일정한 형태를 갖춘 가계기록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물로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본격적으로 가보(家譜)를 갖추게 된 것은 1423년 문화류씨(文化柳氏)가 발행한 영락보(永譜)인데 서문(序文)만 전할 뿐 현존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문헌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족보는 성종 때인 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다. 목판으로 찍어낸 3권짜리 이 족보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중간본만 서울대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돼 있다. 혈통의 귀천과 집안의 위상이 높고 낮음이 신분을 판정하는 기준이 되었던 조선 초기 족보(15세기 중엽)의 특징은 한 집안의 업적을 확대한 계보이며 외손과 친손을 구별 짓지 않았으며 자녀를 태어난 순서에 따라 수록했다는 것이다.   

17세기 후반부터 족보 발간이 활발해졌는데 이 시기 족보는 아버지 쪽 핏줄을 위주로 하며 어머니 쪽은 4대로 한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녀를 싣는 순서도 출생순서가 아니라 남자를 앞에, 여자를 뒤에 싣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점차 서자서녀를 이름 위에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출계(出系·양자를 보냄)에 대한 기록도 구체적으로 수록했고 이름에 항렬자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18세기 들어서면서 족보에서 파(派)가 출현하며 파조를 중심으로 하는 파보의 간행도 시작된다. 조선후기에는 씨족의 분화현상과 조상의 관직에 대한 자랑 등이 결합하면서 파(派)속에서도 다시 파(派)가 갈리는 현상도 발생했다. 이 시기에 '대동보(大同譜)'나 '세보(世譜)' 명칭의 족보들 중에서도 실질적으로는 파보가

상당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족보 간행이 줄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전에 비해 왕성한 족보 발간이 이뤄졌다.   

 이에 대해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족보박물관 자문위원장)는 “1930년대 한국인의 성(姓)은 250개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25개 성이 족보를 간행했을 정도로 대중화됐다”면서 “이는 신분제의 붕괴와 하층인의 성장, 인쇄문화의 발달에 따른 간행비용의 절감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의 족보와 성씨체계의 근본을 위협한 것이 창씨개명이다. 일제는 1939년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해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설정해 1940년 '씨(氏)'를 결정해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은 “족보 발행이 허가제인 당시 상황에서 개명된 이름을 무시하고 본래 것을 넣어 발간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며 창씨나 개씨를 한 성명을 족보에 올릴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 소장에 따르면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족보를 간행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1940년에 61건, 1941년 19건, 1942년 14건, 1943년 3건, 1944년 1건, 1945년 1건이어서 1920~1930년대 왕성했던 족보 출간사업은 창씨개명 후 거의 중단된 모습을 보인다. 정 소장의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인적·물적 수탈이 가중되다보니 문중에서 족보를 발간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도 족보의 맥은 이어져 현재 어느 집안이든 족보가 없는 집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성봉현 연구원은 “사회문화의 변천에 따라 족보의 간행방식도 다양화해 한글세대를 위해 성명을 국한문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딸의 경우 전통적으로 사위만을 기록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딸의 이름을 표제명으로 하고 사위명을 부기한 뒤 이어 외손의 성명이 모두 실리기도 한다”면서 “최근에는 문헌으로 된 족보의 발간과 동시에 전자족보 내지는 인터넷족보의 발간도 활발해지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3회 : 우리나라 대표 족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다함께 시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아! 한집에 모여 자리를 같이하고 한 그루의 밤나무같이 모두가 그의 친족으로서 수족과 같았다. 몇 대를 지나며 촌수가 멀어져 누가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형세의 흐름이다. 그러나 한 몸에서 갈라진 몸이 저 길을 가는 낯모를 사람과 같아질 것이니 식자로서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족보를 왜 만들게 됐는지를 밝힌 이 글은 '의성김씨세보(1553년)' 서(序)다. 서는 족보의 머리에 실린 서문으로 동족이 생긴 내력, 가문의 족보편찬 역사, 편성차례, 족보를 간행하게 된 의의 등을 밝힌 것으로 발(跋)이라고도 한다. 이 서와 발은 보통 자손 가운데 학식 있는 사람이 기술하지만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다른 성씨의 사람이 쓰기도 한다.   

기(記)또는 지(誌)는 시조, 중시조의 사전(史傳), 현조(顯祖)의 전기·묘지명·신도비명·제문·행장·언행록·연보·선조유사 등을 기록한다.   

일찍이 고려 말, 가진 자의 사회적·도덕적 책무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회덕황씨의 선행은 '회덕황씨세보(1956년)'의 '회덕현미륵원남루기'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미륵원은 황윤보에 의해 지어진 원(院·여관)으로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는데 그의 후손들까지 비영리로 운영했다. 미륵원은 또 여행자를 대상으로 구호활동 및 시설의 확장과 함께 사회봉사활동으로까지 확대된 대전지역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 있는 족보는 모든 보첩류(譜牒類)를 총칭하는 개념인데 이 안에는 대동보(大同譜), 파보(派譜), 세보(世譜), 가승보(家乘譜), 계보(系譜), 내외보(內外譜), 만성보(萬姓譜) 등 다양한 하위개념들이 있다.   

 조상의 순서에 따라 그 아래 나눠진 파를 망라해 적은 것을 세보 또는 지보(支譜)라고 하고 자기 직계만 적은 것을 가첩(家牒)또는 가승이라고 한다. 또 자기중심의 직계존속과 직계비속만을 기록한 것을 가승이라고 하고 한 파속(派屬)을 대상으로 한 것은 파보다. 이 파보를 2개 이상 합쳐 편찬한 것이 세보이며 계보는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도표로 표시한 것이다. 

대동보는 성씨의 시조로부터 모든 후손들을 기재한 것으로 워낙 방대한 분량이기 때문에 수십 권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파보는 시조로부터 후대에 갈라져 나온 파시조(派始祖)를 중심으로 그 후손들을 기재해 대개 1, 2권으로 구성된다. 오늘날 집집마다 구비하고 있는 족보의 대부분은 파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간된 족보는 1423년 간행된 '문화류씨 영락보'로 알려져 있으나 그 서문만 전할 뿐 현전하는 최초의 족보는 '안동권씨 성화보'다. 성화보는 1476년 간행된 안동권씨 족보로 목판으로 찍어낸 3권의 책인데 중간본만 전해진다. 당시 중국 연호인 성화연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해서 성화보라 부르는데 아들은 물론 딸과 그 자녀(외손)들을 모두 싣고 있어 아버지 쪽 성씨 자손과 구별하지 않았다.   

자녀는 출생순서로 기록하였으며 양자를 들인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성화보에 실린 안동권씨는 380여명으로 다른 성씨도 8000여명 실려있다.   

 성화보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성화보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이성무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국가에서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 침입을 막은 사람들에게 관직을 남발함으로써 관직세계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자기 가문이 양반으로서 배타적인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1565년 간행된 '문화류씨 가정보'는 총 11책 목판이다. 문화류씨 시조인 차달로부터 19대 자손, 사위, 손자까지 4만2000명의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은 출생 순서대로 되어 있으며 사위를 여부(女夫)라 하지 않고 서(壻)라고 표시함으로써 남성우위시대였음을 보여준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가정보는 명나라 세종대의 연호인 가정년에 만들어졌다 해서 가정보라 부르며 19대 자손 4만여 명에 대한 인적사항을 기록함으로써 당시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안동권씨 성화보'와 '문화류씨 가정보'외에도 1545년 '성주이씨농성서군공족보'가 있기는 한데 이는 이문건에 의해 필사된 것이어서 현전하는 세 번째 오래된 족보는 '안동김씨성보(1580년)'로 본다. '안동김씨성보'의 내용상 특징을 보면 조선전기 족보에서 볼 수 있는 자녀간 출생 순으로 기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손의 경우에는 이 시기 '안동권씨 성화보'나 '문화류씨 가정보'가 외손을 대수에 제한 없이 추적해 수록했던 반면 '안동김씨 성보'에서는 외손을 일체 수록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대해 성봉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동성을 상세히 한 것은 조상을 중요시 여긴 것이고 외손을 간략히 한 것은 근본을 높인 것(詳於同姓以重祖 略其外孫以尊宗)'이라 하여 외손을 일체 수록하지 않은 것은 조선전기 족보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라며 “안동김씨성보는 흔치 않은 보물급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4회 : 재미있는 족보세계   

사가(私家)의 족보편찬은 17세기 접어들면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명문가가 몰락하는 대신 신흥세력이 대두해 족보를 경쟁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때문이다.   

전란으로 인한 재정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공명첩을 팔고 공을 세운 노비에게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게 해주는 군공면천(軍功免賤)이 실시되면서 신분질서가 해이해졌다. 이를 틈타 명문가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족보를 보강했고 신흥세력은 미천한 가계를 은폐하고 가문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족보를 위조하기도 했다.   

성봉현 충남대 연구교수는 “왕실족보와 일반가문의 족보는 그 체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왕실족보가 왕을 중심으로 그 자손의 일정한 대수의 자손만 수록하는데 비해 사가족보는 대체로 시조에서부터 족보를 편찬할 때까지의 모든 자손을 수록한다”고 설명했다.   

또 사가족보는 족보의 형태와 내용 면에서도 성씨와 문중별로 크고 작은 차이를 드러낸다.   

 팔고조도(八高祖圖)는 자신을 중심으로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를 나타낸 것으로 아버지 쪽의 고조부와 어머니 쪽의 고조부를 모두 포함한다. 족보는 시조로부터 아래로 내려오지만 팔고조도는 나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 다르다.   

송백헌 족보박물관 자문위원장(충남대 명예교수)은 “팔고조도는 나를 기점으로 부모, 부의 부모, 모의 부모 등으로 아래에서부터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양으로 고조대(高祖代)까지 작성하는 족도(族圖)인데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조대까지 16명의 조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팔고조도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과 생명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영광김씨 팔고조도는 족보박물관에, 풍양조씨 팔고조도는 향토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외보(內外譜)는 내보와 외보로 구성되는데 내보는 부계 직계조상을 밝힌 것이고 외보는 내보에 나타나는 역대조상의 배우자 하나하나를 대상으로 시조로부터 그 배우자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다.   

1694년 만들어져 필사본이 전해지는 '충주박씨내외자손보'는 시조 박영을 중심으로 친손과 외손을 가리지 않고 14대까지 기록해 박씨보다 타성의 이름이 더 많을 정도다.   

문보(文譜)는 문과 급제자들에 대한 인명록 또는 문사록(文士錄)이며 무보(武譜)는 무과 급제자의 가계를 성관별로 나눠 기록해 놓은 특수보다.   

문보는 각 급제자의 성명, 자(字), 출생연도 및 출신과거의 연도와 과방의 종류를 기재하고 그 아래로 부와 조, 증조, 고조 순으로 8대까지 부계직계를 기록했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조선은 양반관료사회였기 때문에 관직에 진출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 계승하는데 중요한 일이었으며 가문에서 문과 급제자를 몇 명 배출했느냐에 따라 가문의 사회적 지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무보의 체계는 무과 급제자를 전주 이씨를 필두로 각 성씨별로 편찬하고 성씨 내에서는 본관별로 편집했는데 전주 이씨의 경우는 월등히 많으므로 이를 다시 파별로 수록했다. 현재 족보박물관에 있는 무보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덕수이씨 계보에 들어있으며 충무공 이름 옆에 부모 이름이 작은 글씨로 기록된 것도 볼 수 있다.   

폐쇄적인 당쟁상황에서 나온 당색보(黨色譜)인 남보(南譜)와 북보(北譜)도 있다. 남보는 당색이 남인이었던 남인의 주요가계를 수록한 특수보이며 북보는 북인의 계보를 적은 것이다. 방위개념에 따라 오보(午譜)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인을 오인(午人), 서인을 유인(酉人)으로 별칭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성봉현 교수는 “남보는 각 성씨 아래 본관별로 편차했는데 남보에 수록된 성씨 순서는 그 성씨에 딸린 본관수가 많은 성씨부터 수록해 나간것”이라며 “남보와 북보는 족보에 토대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족보라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성을 바꾸는 것은 아버지를 바꾸고 조상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여겨 거의 행해지지 않았으나 본관을 바꾸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본관을 개칭한 대표적인 성씨가 창원공씨인데 공자의 54세손 소(紹)가 1351년 고려와 와서 창원을 식읍(食邑·나라에서 왕족, 공신 등에게 주던 일정한 지역)으로 책정 받아 공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창원을 본관으로 가문을 이어오던 공씨는 조선 정조 18년(1794년) 공자의 후손인 모든 공씨들에게 본관을 곡부로 쓰도록 하라는 왕명에 의해 본관을 바꾸었다. 이런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창원공씨에서 곡부공씨로 바뀐 두 족보 모두가 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세기 경 필암서원 소속 노비와 그 자손들의 인적사항을 족보형식으로 적은 노비보(奴婢譜)는 보물 제587-1호로 원 소장처는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이나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위탁보관중이다. 족보박물관에는 복사본이 있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노비보는 필암서원 사노비(寺奴婢)를 수록한 장부인 노비안(奴婢案)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며 다만 수록방식을 일반 사가의 족보기록양식을 따랐을 뿐”이라며 “일반 노비안이 부자, 혹은 모자관계만 밝히는데 비해 이 노비보는 노비의 자녀를 4대까지 추적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족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족보는 보통 한 집안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책 형태를 말하는데 연산서씨는 1853년에 4장의 오석(烏石)에 족보를 새겨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바위에 굴을 파고 보존했다. 4장의 돌 앞뒷면과 측면에 4500여자를 기록한 연산서씨석보는 족보를 돌에 새긴 독특한 유물로 충남도문화재자료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식을 낳을 수 있어야 족보가 만들어지고 계승될 수 있을 것이란 상식을 뛰어넘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환관(내시)들이 만든 족보도 있다.  

1920년 이윤묵이 편찬한 '양세계보(養世系譜)'는 조선시대 역대 내시들을 성씨별로 분류해 그 가계를 기록했다. 정확히 말하면 족보보다는 내시인명록에 가까운 양세계보는 내시 사이에도 계보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성이 다른 자손(양자)을 입양시켜 자손으로 삼고 가계를 보존했다.   

양세계보를 보면 안씨 아들이 지씨, 지씨 아들이 유씨, 유씨 아들이 정씨처럼 아버지와 아들, 손자의 성이 각기 다르다.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족보박물관에 가면 복사본을 볼 수 있다.   

신분증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족보도 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크게 만든 세계(世系)는 일반족보와 달리 시조부터 할아버지까지 직계조상의 이름만 추려서 기록한 휴대용 족보다. 족보박물관에는 안동권씨세계를 비롯해 밀양박씨세계, 은진송씨세계, 파평윤씨세계, 경주김씨세계 등 다양한 휴대용족보가 전시되어 있다.   

휴대용 족보에 대해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가승(家乘)은 작성한 사람이 자기 가계를 직계에 한정해 밝힌 계보인데 가첩, 가계, 세계도 넓은 의미의 가승으로 주로 휴대에 편리하도록 절첩의 형태로 만들어졌다”며 “과거 보러가는 선비나 보학하는 이야기꾼들이 지니고 먼 길을 가거나 전쟁 중 숙식을 해결하는데 이용하고 시집가는 딸에게 전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5회 : 족보의 세계유산적 가치 

 지난 5월 조선후기 국왕의 동정이나 국정 운영사항을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일성록(日省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 결정된 후 기록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더구나 2월 공주·부여역사유적지구가 차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우선 추진대상으로 선정되자 문화유산이 빈약한 대전시로서는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대전시 류용환 학예연구관은 “지난해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으는 것을 보며 지자체마다 세계유산 열풍이 불고 있다”며 “국내·외적으로 지자체를 홍보하기 위해서는 세계유산만큼 훌륭한 소재가 없기 때문에 문화유산이 부족한 대전의 입장에서는 부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시가 세계기록유산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족보다. 근대족보의 90%를 회상사를 비롯한 대전에 소재한 출판사에서 만들었으며 대전시 중구 침산동 뿌리공원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박물관이 있어 대전이 족보문화의 메카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족보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족보가 처음 기록된 것은 고대 지중해 연안으로 수도사들이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데서 출발하며 중국에서는 6조시대부터 집안의 계보를 만드는 일이 성행했다.   

군주정치나 귀족정치가 실시되던 나라에서 족보는 더욱 발달했는데 고대 아일랜드 왕들의 계보가 구전되었는가 하면 영국 귀족들은 '귀족총람'이라는 14권에 이르는 방대한 귀족 입문서를 만들었다.   

종족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유대인들은 가계를 기록으로 남겼으며 일본은 국가통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황실을 중심으로 '고지키(古事記)', '니혼쇼키(日本書記)', '후도키(風土記)' 등을 기록·편찬했다.   

물론 우리나라 족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책으로 만들어 기록·보존하는 곳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류 학예연구관은 “중국에서는 종보(宗譜), 일본에서는 가보(家譜)라 하는 족보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되고 보존 또한 잘 되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보학(譜學)의 종주국으로 꼽힌다”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실에는 600여 종 1만30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족보가 소장돼 있으며 미국 하버드대에는 우리나라 족보가 모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되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족보의 또 다른 가치는 단순한 가계기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인쇄술의 발달로 족보문화가 계승·발전될 수 있었으며 역사적 기록들이 전쟁으로 소실되거나 도둑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족보는 많은 가문에서 보관 전승되기 때문이다.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족보박물관 자문위원장)는 “족보에는 각 가문과 개인들의 크고 작은 기록들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우리 역사의 빈 공간을 채워주기 충분하다”면서 “더구나 왕실과 귀족 등 특정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 족보들에 비해 우리 족보는 일반인이 그 주인공이며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민족문화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왕실족보 외에도 문과 급제자들을 기록한 문보(文譜), 무과 급제자를 위한 무보(武譜), 남인·북인 등의 계보를 밝힌 당색보(黨色譜) 남보(南譜)·북보(北譜), 노비의 인적사항을 적은 노비보(奴婢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내시들이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여 만든 양세계보(養世系譜), 휴대용 족보, 돌족보(石譜) 등 족보에 기록한 내용과 형태를 통해 기록문화의 표본과 민족문화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앞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1997년)과 직지심체요절(2001년)이 우리나라의 기록문화가 가히 세계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에 이런 기록문화를 각 가문에서 활용 보존한 족보야말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에 손색이 없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우리 조상들은 전쟁 중에도 가문의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휴대용 족보를 지니고 다녔는가하면 족보를 가문의 보물로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왔다”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방대한 가계기록물 족보는 공적인 역사서술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전 세계인의 기록물로 보존활용할 가치가 크다”고 밝혔다.    


6회 : 대전이 왜 족보메카인가? 

  한국의 성씨는 280여 개, 관향본(貫鄕本)은 800여 개, 파를 따지면 3400여 개에 달한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족보의 90%를 대전에서 출판했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평가다. 회상사를 비롯해 농경출판사, 보전출판사, 활문사 등이 대전의 대표적 족보문집 전문출판사다.   

이 가운데 회상사가 족보출판에서는 단연 으뜸이었는데 전국 족보의 70~80%가 여기서 발간되었다고 봐도 손색이 없다. 회상사(回想社)는 박홍구(88) 회장이 1954년 '옛 것을 회상해서 새것을 창조하라'는 이념으로 설립한 족보 전문제작출판사로 대전시 동구 정동 현재 자리에서만 57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대동보 500여 종, 파보 1500여 종, 가승보 900여 종 등 그동안 회상사에서 제작한 족보는 600만부가 넘는다. 소장하고 있는 계보학 자료만도 5만여 권이니 135개 성씨 족보 600여종 1만30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계보학 자료실보다 방대해 명실공히 한국 족보문화의 산실이다. 회상사를 빼고는 족보 메카 대전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성봉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경주이씨 국당공파 파보를 시작으로 1974년 우리나라 첫 양장제본인 덕수 장씨 족보, 방대한 내용의 김해 김씨 삼현파 대동보(37권), 경주 이씨 대동보(34권) 등 회상사에서 발간된 족보는 보학연구의 중요한 자료”라며 “대전에 뿌리공원과 족보박물관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회상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회상사는 자체 글자체를 개발해 박 회장의 호인 춘전(春田)에서 딴 '춘전체'란 이름으로 1996년 특허등록을 했으며 사옥 내에 '회상문보원(回想文譜院)'이란 국내 최초의 족보도서관을 만들기도 했다.   

 회상문보원에는 효령대군일자의성군보(孝大君一子誼城君譜)를 비롯해 4만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가 소장돼 있어 우리나라 족보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는 족보도서관 역할을 한다. 이곳에는 역대 대통령 문중 족보도 있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은 1983년 해평 윤씨 대동보 발간 때 회상사를 직접 방문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75년 고령 박씨 대동보 발간 때 '친화(親和)'라는 친필휘호를 써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연로한 박 회장을 대신해 현재는 박병호 전 동구청장이 사장을 맡고 있는데 박 사장은 “족보가 없는 집은 거의 없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도 자신의 가문 족보를 제작할 당시 회상사를 많이 찾았다”면서 “윤보선 박정희 전 대통령 뿐만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도 당선 직전인 1996년 회상사를 방문했었다”고 회고했다. 박 사장은 또 “지금은 인터넷 등 디지털 기기 발달로 직접 회상사에 찾아와 교정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2000년대 이전만해도 갓 쓰고 도포 입은 노인들이 1주일 이상 회상사에 묵으면서 교정을 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외지에서 와 족보 교정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관과 식당이 아직도 회상사 건물 내에 남아 있어 당시 모습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인쇄산업의 위축은 물론 디지털과 전자족보 발간으로 족보 출판이 현격히 줄어 회상사의 명성도 전만 못한 게 사실이다. 특히 57년간 회상사에서 출판하고 수집한 족보 5만여 점을 자체 도서관에만 보관하고 있어 족보박물관과 뿌리공원과의 연계가 아쉽다는 지적이다. 

 향토사학자 김정곤씨는 “박물관과 도서관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다르지만 족보박물관에 가서 족보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우리나라 유명 족보들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많은 관람객들은 자신의 집안 족보를 직접 찾아보지 못해 아쉬워한다”면서 “이런 점에서 족보박물관이 있는 뿌리공원 내에 '회상문보원'같은 족보도서관이 있어 자기 집안 족보를 열람하면 좋을 것”이라며 연계 필요성을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회상사를 비롯한 족보전문출판사들이 대전을 족보 중심도시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건 사실이지만 박물관과 상업시설인 출판사가 한 공간에 들어가기에는 풀어야할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족보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쇼 케이스 속에 진열된 고서를 바라보며 족보내용을 직접 찾아볼 수 없다는데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심 학예사는 “도서관과 달리 박물관은 수집된 유물의 원형을 보존해야하는 곳이기 때문에 공개적인 족보열람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전이 족보메카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세계기록유산 등재까지 노린다면 뿌리공원과 족보박물관, 회상사 등 족보관련 시설물과 자료를 더 많이 확보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7회. 족보박물관과 효문화 

학생들의 체험학습철 외에도 하루 수천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박물관은 흔치 않다. 우리나라 최고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의 평일 하루 관람객 수가 1만명이 안되고 우리 지역인 국립공주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도 하루 평균 1000명 내외가 찾는다. 

 이에 비하면 한국족보박물관은 평일 하루 3000명, 주말과 휴일에는 5000여 명이 찾으니 웬만한 국립박물관보다 관람객이 많다. 일일이 티케팅을 하지 않으니 정확한 관람객 수 추산은 어렵고 체험학습과 봄가을 나들이 철이면 하루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간다는 게 족보박물관에 근무하는 문화해설사의 말이다.   

문화해설사 조자은씨는 “날씨가 좋은 봄가을이면 주차장에 타 지역에서 온 대형버스들이 즐비하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박물관에 동시에 입장해 해설도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족보박물관은 대전시민보다 외지 관람객이 많기로 유명한데 여기에는 고속도로와 인접한 편리한 교통여건이 한 몫 한다. 대전시 중구 침산동에 있는 한국족보박물관은 경부고속도로 비룡분기점에서 대전남부순환도로를 타고 안영IC로 들어와 시내방향으로 1㎞만 가면 된다. 톨게이트에서 5분 거리인데다 주차비와 입장료가 없어 학생과 가족단위 관람객도 많이 찾는다. 

특히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으로 조성된 뿌리공원 내에 있어 족보박물관에서 자신의 성씨와 족보를 공부한 후 뿌리공원에 있는 관련 성씨조형물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넓은 잔디광장에 문중별로 특색 있게 조성된 136개의 성씨조형물에는 시조를 비롯한 문중의 유래, 문중 대표인물, 후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등이 담겨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학부모들에게는 최고의 체험학습장이다. 

뿌리와 효문화를 차별화한 효문화뿌리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올해 유망축제로 선정돼 올해부터 3년간 매년 5000만원씩 모두 1억5000만원의 지원을 받는다.   

 지난 7~9일 열린 3회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문중퍼레이드를 시작으로 과거시험 재현 '전국한시백일장', 문중명랑운동회, 도전! 뿌리골든벨, 대전 효마당극 '식장산 화수분'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특히 대전의 자매도시인 일본 삿포로시에서 우에다 시장을 비롯한 100여 명의 사절단이 방문해 효문화뿌리축제를 벤치마킹했다.   

여기다 지난 4월 전국 최초로 효문화지원센터가 문을 열어 대전은 뿌리공원과 족보박물관, 효문화지원센터를 갖춘 효문화 선도도시가 되었다. 

지난 효문화뿌리축제에 맞춰 효자효부효행록을 발간한 효문화화지원센터는 효문화확산을 위한 연구조사와 효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정보제공, 프로그램 개발, 초중고생들에 대한 효교육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 동춘당근린공원 세워져 있는 송씨삼세효자비와 효자각 등도 대전이 효도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송씨삼세효자정려구허(宋氏三世旌閭舊墟)'는 3대에 걸쳐 효를 행한 송경창, 송시승, 송유관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서구 갈마동 신공유천 효자정려각(愼公惟天 孝子 旌閭閣)의 주인공 신유천도 대전의 대표효자로 초등학생들의 교재에도 나올 정도다. 

한기범 한남대교수는 “송경창은 왜적이 81세 부친을 해하려하자 온몸으로 막아서다 왜적이 휘두르는 칼에 오른손이 끊어져 피가 땅에 흘러도 왼팔로 아버지를 안고 놓지 않아 부친을 살렸으며 송경창의 손자 시승도 부친이 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받아 부친의 수명을 연장한 효자”라며 “예와 효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세태 속에서 부모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송씨 3세의 이야기와 신유천의 효행은 현대인에게 효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전이 뿌리와 효문화 선도도시로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우르지 못한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우선 대전시는 그동안 중구에서 주관하던 효문화뿌리축제가 올해부터 문화관광부 유망축제로 선정돼 국비 지원을 받게 되자 시로 이관해 시에서 직접 축제를 주최했다. 

올해 뿌리축제는 일정만 이틀에서 3일로 연장됐지 예산도 중구가 주관하던 지난해 4억5000만원에서 늘지 않았으며 참가문중 수도 전년보다 오히려 줄어 문중과 뿌리축제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특히 '즐겨孝 함께해孝'란 주제로 열린 행사들도 세계전통무용, 세계전통 패션&헤어쇼, 품바공연 등 일반축제 프로그램들과 큰 차별화를 이루지 못했다.   

뿌리축제는 대전시가 맡고 족보박물관과 뿌리공원의 관리운영은 중구청이 한다는 것도 문제다.   

뿌리공원이 위치한 중구에서 족보박물관을 건립하기는 했지만 재정자립도가 열악한 자치구가 우리나라 첫 족보박물관을 내실 있게 운영하기는 역부족이다. 족보박물관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족보전문박물관이자 성씨 유래를 담고 있는 뿌리공원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박물관 기능을 대폭 강화해야하고 여기에 대전시의 관심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계명대 동산도서관은 당파를 알 수 있는 독특한 표기법을 보여주는 1606년 진양하씨족보와 퇴계선생을 배출한 진성이씨족보 등 1만4000여 점의 족보를 소장하고 있어 우리나라 최고의 족보전문도서관으로 손색이 없다. 또 2005년 문을 연 배재대 족보자료실도 경주김씨계림군파 대동보와 전의이씨성보 등 1089종 4040권의 족보자료를 보유하고 있는데다 문중과 서울 인사동 고서점 등을 누비며 자료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비하며 족보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족보는 4607점으로 이 가운데 문화재는 한 점도 없다. 대부분의 전시물이 복제본이거나 최근의 자료들이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박물관으로의 위상에는 현격히 떨어진다. 족보 구입 예산도 턱없이 부족해 기증에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봉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대전이 뿌리공원과 성씨조형물, 효문화센터 등 보학과 뿌리에 관련한 인프라는 두루 갖춰졌지만 이를 내실 있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족보박물관의 위상이 더 높아져야한다”면서 “박물관을 유지 운영할 전문인력을 충원하고 문화재급 유물들을 보강하는 인력과 예산투자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8회 : 우리나라 기록유산들 

유네스코는 고문서 등 전 세계적으로 귀중한 기록물을 보존활용하기 위해 1997년부터 2년마다 기록유산적 가치가 있는 유산을 선정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사업은 세계의 기록유산이 인류 모두의 소유물이므로 미래세대에 전수될 수 있도록 이를 보존하고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2011년 현재 문화재청에 수록되어 있는 세계기록유산은 96개국 1대륙 3국제기구에서 238건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에 관한 각종 기록물(1997), 아르헨티나의 리오플라타 총독 기록물(1997), 중국 청왕조의 내각문서(1999) 등이 있다.   

기록유산은 기록을 담고 있는 정보 또는 그 기록을 전하는 매개물이므로 필사본·신문·포스터 등 기록이 담긴 자료와 파피루스·양피지·나무껍질 등 기록이 남아 있는 자료, 그림·지도·음악 등 비문자 자료, 전통적인 움직임과 현재의 영상 이미지 등이 포함된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모두 9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등재함으로써 세계에서는 6번째, 아태지역에서는 가장 많다.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이 1997년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렸고 직지심체요절과 승정원일기가 2001년, 조선왕조의궤와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이 2007년, 동의보감이 2009년, 일성록과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이 올해 등재됐다.   

▲훈민정음='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인 훈민정음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이 당시 사용되던 한자가 우리말과 구조가 다른 중국어의 표기를 위한 문자체계여서 대다수 백성들이 배워 사용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세종 25년(1443년)에 우리말 표기에 적합한 문자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세종 28년(1446년)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했는데 이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했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 음력 9월에 간행된 1책의 목판본으로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이 문자의 음가 및 운용법,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해설과 용례를 붙인 책이다.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국정운' 권1, 6과 함께 1940년쯤 경북 안동의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한 귀중본이다.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다. 조선왕조실록은 특히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경제, 산업, 풍속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며 역사기술에 있어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실록의 기초자료작성부터 실제 편술까지의 간행작업을 직접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으며 실록의 편찬은 다음 국왕이 즉위한 후 실록청을 개설해 편찬했으며 사초는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진실성을 확보했다.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사고의 실록들이 병화에 소실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해 20세기 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해 내려왔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책만 남아 있고 적상산본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했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요절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의 줄임말로 고려 말 백운화상이 75세의 노구를 무릅쓰고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 만든 책이다. 원래 상하 두 권이었는데 현재는 하권만 남아 있고 그것도 첫 장은 없어진 상태다.   

흥덕사의 창건연대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직지 하권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것이다.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됨으로써 기록유산이 해당 국가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직지 하권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승정원은 조선 정종 때 창설된 기관으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고 할 수 있다.   

국보 303호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서 편찬한 일기로 필사본이며 3243책이다.   

이 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기록인 동시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다.   

또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했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원본이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왕조의궤=의궤는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의례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당시 사용된 문서를 정해진 격식에 의해 정리 작성한 기록물이다.   

조선왕조의궤는 1392~1910년 500여 년에 걸쳐 조선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뿐만 아니라, 건축물·왕릉의 조성과 왕실문화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총 3895여 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달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일제강점기 강탈한 조선왕조의궤 3책(대례의궤 1책 및 왕세자가례도감의궤 2책)과 정묘어제 2책을 반환한바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諸)경판=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판)은 8만1258목판에 새긴 대장경판으로 아시아 전역에서는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로 현존하는 판본자료다.   

한국이 13세기에 일궈낸 위대한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불교대장경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대장경(大藏經)은 석가모니가 일생 동안 설법한 경전과 계율, 그리고 그 내용들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이 첨부한 논서, 주석서, 이론서들을 집대성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로 고려대장경은 당시까지 동아시아 지역에 존재하던 모든 불교 경전의 내용을 집대성한 가장 방대한 문헌으로 동아시아 지역 당대 최고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1237~1248년에 제작된 것이지만 훌륭하게 보존되고 있으며 현재도 인쇄할 수 있다. 소장하고 있는 목판의 수량도 8만7000여 장이 된다. 올해는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이 완성된 지 760주년 되는 해다.   

▲동의보감=동의보감은 선조 30년(1597) 임금의 병과 건강을 돌보는 어의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해 광해군 3년(1611)에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에 간행한 의학 서적이다.   

총 25권 25책으로 나무활자로 발행한 동의보감은 허준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16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한의학의 백과사전격으로 동아시아 의학 발전 뿐만 아니라 19세기까지 유래가 없던 예방의학과 국가적으로 이뤄지는 공공 보건정책에 대한 관념을 세계 최초로 구축하는 등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한방의서로 인정받고 있다.   

▲일성록=일성록(日省錄)은 조선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자신의 일상생활과 학업을 돌아보고 반성하기 위해 작성한 일기에서 출발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규장각 관원들에게 명령하여 매일 일기를 작성한 다음 이를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도록 했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일성록은 정조의 개인일기에서 조선후기의 공식적인 국정일기로 전환되었다.   

일성록은 전근대시대의 전제군주 국가에서 국왕이 자신의 정치 운영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향후의 국정 운영에 참고할 자료로 삼기 위해 작성한 일기라는 점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 성격의 기록물이다.   

국보 153호로 2329책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물=가장 최근에 세계기록유산이 된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발발과 진압, 그리고 이후의 진상규명과 보상 등의 과정과 관련해 정부, 국회, 시민, 단체 그리고 미국 정부 등에서 생산한 방대한 자료를 포함한 기록물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큰 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광주에서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피해 보상, 기념사업의 5대 원칙이 모두 관철돼 세계 여러 나라에 좋은 선례가 되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물은 기록문서철 4271권 85만8900여 페이지, 네거티브 필름 2017컷, 사진 1733점 등 2만여 점으로 국가기록원과 육군본부, 국회도서관, 5·18기념재단 등에 소장되어 있다.     

9회 : 세계기록유산 등재 과정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이란 전 세계 민족의 집단기록이자 인류의 사상·발견 및 성과의 진화기록을 의미하는 것이다. 책·필사본 등 문자로 기록된 것과 지도·악보 등 이미지나 기호로 기록된 것, 비문·시청각자료(음악·영화 등), 인터넷 기록물 등이 그 대상에 포함된다. 올해 현재 세계기록유산은 전 세계적으로 238건이며 우리나라에는 9건이 있다. 

세계기록유산은 영향력, 시간, 장소, 인물, 주제, 형태, 사회적 가치, 보존상태, 희귀성 등을 기준으로 선정된다. 

세계 역사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정치, 종교 서적 등 기록유산이 한 나라의 문화 경계를 넘어 세계 역사에 중요한 영향력을 끼쳐 세계적인 중요성을 갖는 경우(영향력·Influence)는 물론 독립운동 등 국제적인 일의 중요한 변화 시기를 반영하거나 인류역사의 특정 시점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두드러지게 이바지한 경우(시간·Time)가 기준이 된다.   

또 세계 역사와 문화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특정장소(locality)와 지역(region)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장소·Place)와 개인 및 사람들의 업적(사람·People), 세계 역사와 문화의 중요 주제를 다룬 경우(대상/주제·Subject/Theme)도 포함된다. 

아울러 야자수 나뭇잎 원고와 금박으로 써진 원고, 근대 미디어 등 형태와 스타일에서 중요한 표본이 되는 경우(형태 및 스타일·Form and Style)와 하나의 민족문화를 초월하는 사회문화적 또는 정신적으로 두드러진 가치가 있는 경우(사회적 가치·Social Value)도 속한다. 

특별히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원상태로의 보존(Integrity)과 독특하고 특별히 진귀한 희귀성(Rarity)이 이차적 등록보조기준이다. 

등재절차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문화재청장이 대상 유산을 선정한 후 매2년마다 3월말까지 유네스코 사무국에 등재신청 서류를 제출하면 이듬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심사한다. 

 국제자문위원회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임명하는 임기 4년의 전문가 14인으로 구성되는데 신청서에 대한 승인 및 거부판정을 하게 된다. 각각의 권고사항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가 이뤄지면 사무총장에게 보고해 승인 요청하는데 사무국은 등재여부를 각 신청서 작성자에게 통보하고 최종 등재목록을 발표한다. 

세계기록유산목록에 등재되었더라도 퇴화되거나 보존상태가 위험한 경우, 또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져 등재기준에 미달하는 경우는 목록에서 삭제될 수도 있다. 

이렇게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보존관리에 대한 유네스코의 보조금 및 기술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홍보와 인식 제고를 위한 세계기록유산 로고 사용 및 유네스코를 통한 지속적 홍보가 가능하다는 등재효과가 있다. 또한 CD-ROM, 디지털 테이프와 오디오 CD 같은 디지털기술을 활용해 세계기록유산을 가능한 많은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어 다양한 홍보활동을 펼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런 이유로 지방자치단체들은 세계유산 등재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일단 등재에 성공하면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 뿐만 아니라 국제기구나 단체들의 기술적·재정적 지원을 받아 유산 보호 사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지역홍보 및 관광객 유치효과도 커 자치단체장으로서는 매력적인 사업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의 경우 등재 전보다 관광객이 7배 늘었고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이 된 하회마을도 등재되자마자 하루 1만여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 북새통을 이룰 정도다. 

대전시 류용환 학예연구관은 “지난해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전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명성을 얻고 관광객이 몰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라며 “대전시도 가장 정교하고 뛰어난 가계기록인 족보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5·18기록물 어떻게 기록유산 됐나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은 모두 9개 주제로 기록문서철만 4271권 85만8900여 쪽에 달한다. 흑백필름 2017컷과 사진 1733점, 영상 65작품, 증언 1471명, 유품 278점, 연구물 411개, 예술작품 519개 등이 포함됐다. 

정부의 계엄포고령 시달과 함께 계엄업무 협조지시, 비상계엄 및 소요사태에 대한 지시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자료는 5·18민주화운동의 배후조종자로 신군부의 군법회의에 회부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판기록과 2004년 무죄선고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와 선언문, 기자들의 취재수첩, 5월일기 등도 역사의 산증언들로 남아 있다. 

함께 등재된 일성록은 대한민국 국보 153호로, 조선후기에 국왕의 동정과 국정의 제반 운영사항을 매일매일 일기체로 정리한 연대기 자료다. 일성록이 한국정부가 신청해 등재를 이뤄낸 데 비해 5·18기록물은 이를 위해 조직된 등재추진위원회라는 민간단체가 추진한 결과여서 그 의미가 더 크다.   

 5·18기록물 등재추진위원회 추진단장이었던 안종철(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조정관) 박사는 “이전에는 옛날 문서만 등재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5·18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으로써 현대사 기록도 가능하다는 기록유산에 대한 기존 통념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등재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기록유산 등재 논의는 2009년 9월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준비과정은 그해 12월에 시작돼 2010년 3월 등재추진위는 유네스코 본부에 관련 신청서를 제출했다. 

관련 기록물이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데다 분량 또한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불과 3개월 만에 5·18기록물 등재신청서가 마련된 것이다. 자료수집과 등재신청서 작성에 안 박사가 결정적 역할들을 해냈다. 

안 박사는 1986년부터 광주현대사사료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5·18기록물들을 직접 수집·관리했으며 광주시청에서도 5·18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자료들을 축적해 짧은 시간 내에 세계기록유산 등재라는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문화재청을 거쳐 정부자격으로 신청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5·18기록물은 추진위원회가 개인자격으로 본부에 직접 신청하다보니 시간이 촉박했고 정부 지원도 어려워 추진과정이 만만치는 않았다. 

기록 원본을 찾기 위해 국가기록원과 국회도서관 등의 동의를 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보수단체들이 유네스코에 찾아가 '광주시민 학살이 북한 특수부대 소행'이라는 내용의 반대청원서를 내는 바람에 한차례 보류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국가자격으로 신청했다면 더 수월할 수 있었겠지만 어려움을 겪으며 배운 것도 많다”는 안 박사는 “신청서 작성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사적 의미'를 밝혀주는 것인데 해당 기록물이 세계 역사와 문화에 무엇을 기여했는지를 잘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 박사는 5·18민주화운동이 필리핀, 버마(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시민들의 노력으로 기록물들이 꾸준하게 지켜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계기록유산이 된 5·18기록물의 향후 과제는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한데 모으는 일이다. 5·18 아카이브작업이 그것으로 현재 광주시는 기록물의 보존관리와 교육자료로 활용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안 박사는 “5·18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데서 끝나서는 안되고 광주가 전 세계인의 민주인권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고 관련 자료를 디지털화해 통합·관리하며 연구도 활성화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광주시는 5·18기록물과 편지, 일기, 사진, 메모지 등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들을 기증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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