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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팸트리 Dec 24. 2015

허왕후와 가락국의 유전자 특성 전이(轉移)

허왕후와 가락국의 유전자 특성 전이(轉移)

출처: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content/C03010100/view_1621042.jsp

허왕후는 우리나라 역사상 첫 여권주의(女權主義)자이다. 다시 말해 여권신장 운동의 어머니이다. 요즘 흔히 하는 표현으로 코리아 페미니즘의 퍼스트 레이디이다. 대한민국 여성의 권한을 멋있게 신장시킨 한겨례의 모후(母后)이다. 허왕후는 한반도에 바지를 입고 들어온 맹렬 여성이다. 그것도 발을 디디자 말자 훌쩍 벗어던진 여성이다. 그리고 영접 나온 대신들에게 큰 소리 쳤으며 들어와선 수로왕의 마음을 사로 잡고 가락국 백성들의 마음을 꼭 붙들었다.


수로왕은 보트피플 20여명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신귀간이라는 신하가 이 도래인(渡來人)들 20여명 중에 꽃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으며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싣고 왔다고 했다. 그것 말고도 필로 된 비단, 아름다운 옷, 진귀한 애완용품과 신기한 그릇 등 가지가지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수로왕이 아홉 명의 근신을 시켜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와 계수나무로 만든 돛대를 단 아름다운 배로 영접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허왕후는 길을 안내하러 나온 가락국 대신들에게 일갈했다. “ 알지 못하는 그대들을 따라 어찌 따라가겠는가?”라며 응하지 않았다. 유천간 등이 돌아가 이 말을 아뢰니 수로왕이 허겁지겁 유사(有司)를 데리고 그곳으로 행차했다.


수로왕은 이 16세의 당찬 아가씨가 아유타국 공주이며 성은 허씨(許氏)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로왕은 그 처녀를 아내로 맞아드려 장막 궁전에서 합환(合歡)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더 보냈다. 수로왕은 이 왕후에게 폭 빠져 버렸다. 


수로왕이 왕후를 아주 사랑한 나머지 자고 나면 아들이 생겼다. 자그마치 열명을 낳았다. 그리고 둘째 아들에게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했다. 왕후의 간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 유림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얼마 전에 여권 신장 운동가 및 그 관련 단체들의 극렬한 주장에 힘입어 여성 호주제의 법이 천신만고 끝에 국회에서 통과된 것에 비하면 허왕후의 여권 주창(主唱)은 약 2000년을 앞선 것이다.   


수로왕과 허왕후는 서로 무척 사랑했다. 왕이 거문고를 타면 왕후가 옆에서 가야금을 함께 타듯이 정다웠다. 마치 해가 있으면 달이 있고 강이 있으면 배가 있으며 벌이 있으면 나비가 있듯이 음(陰)과 양(陽)이 서로 잘 어울리었다.


허왕후가 죽어 백성들이 국모를 잃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 탄식하며 통곡했다. 백성들은 그 은혜를 고마워한 끝에 허왕후의 행적을 길이 추모하고자 왕후가 가락국에 처음 와서 닿은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천(主浦村)이라 불렀다. 왕후가 별포진(別浦津)에 배를 대고 도두천에 있는 높은 언덕에 올라, 입고 온 비단 바지를 벗어 신에게 선물로 바친 그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였으며 붉은 깃발을 달고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하였다.


백성들은 수로왕과 허왕후의 공덕을 기리기를 “태초가 열리니 세상이 밝았네. 김해 들녘 10 붕(朋)이 엎드려 있는 형상 을 한 구지봉(龜旨峰) 아래 아홉 추장이 7만 5천의 백성을 다스렸네. 아홉 추장과 그 백성들이 모여 노래 부르고 춤추니 구름이 걷히며 푸른 하늘이 열렸네. 혜성 같이 나타난 새 지도자를 그들의 왕으로 모시니 그 이름 수로(首露)일쎄. 교화(敎化)는 위엄이 있고 그 정사(政事)는 자애로왔네. 참으로 하늘이 덕인(德人)을 내어 세상을 위해 질서를 세웠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정일(精一)하였네. 거리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농부는 서로 밭갈이를 돕네. 금과 같은 그 자취 빛나고 옥과 같은 소리 울렸네.”

하늘에서 낸 성군 내외는 수명이 길었다. 수로왕은 158세, 허왕후는 157세에 세상을 떴다. 삼황(三皇) 이래 비교할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은 정치를 잘 하였으며 부지런하고 도(道)를 숭상하였다. 김질왕은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하던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 했다.

수로왕과 허왕후를 사모하여 백성들이 하는 놀이가 있다. 허왕후가 우리 나라에 첫발을 디딘 날인 7월 29일이면 향토의 백성과 관리들이 영(嶺)에 올라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수로왕과 허왕후의 덕을 기리며 즐겁게 놀았다. 건장한 청년들은 말을 타고 망산도로부터 동서로 달리며 마을 어른들은 뱃머리를 바다에 둥실 띄워 북쪽의 포구에서 물놀이를 했다. 이것은 유천간, 신귀간 등의 신하들이 공주 오는 것을 바라보며 임금께 알렸던 옛일의 아름다움을 추모하는 행사들이다. 


우리나라 여성은 역사상 대개 이름이 없다. 그러나 허왕후는 황옥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 하나만 봐도 개성이 뚜렷한 여인이다. 허왕후는 신분이 공주로서 신하와 비복을 합쳐 20여명을 거느리고 항해를 한 여성 함장(艦長)이다. 이국의 왕과 대신을 상대하여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고 설득시킨 아유타국 사절단의 특급 여성 외교관 격으로 가락국에 귀화한 여걸이다. 한국 초대 대통령 영부인 프랜체스카와 같이 외국 여인으로 국모가 된 역사상 아주 드문 자유 연애주의자이다. 바지를 입고 들어온 맹렬 여성으로 적극성이 있고 활달하며 기상이 강한 선진 여성이다. 바다에서 난민과 유랑자로 고기밥이 될 뻔한 처지에서 일약 왕후의 자리에 오른 능력 있는 여인이다. 


허왕후의 후예들은 모두 특성이 왕후를 많이 닮았다. 가락국 후예들은 유랑성이 강하다. 가락국 후예들은 한곳에 기탁하여 살면서 이루는 영남 북부 지역처럼 거대한 집성촌이 발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6가야 지역은 영남 북부 지역 모양 성대한 족벌이 많지 않다. 영남 북부 지역은 군집성(群集性)이 강하지만 이곳 가락국이 주도하는 6가야 지역은 호남처럼 군웅 활거형의 양상을 보였다. 영남 북부 지역은 태백산 아래서 낙동가 하구까지 그 거점을 떠나지 않고 수천년간 지키며 살았다. 그러나 6가야의 후예들인 영남의 남부 지역 사람들은 허왕후의 보트 피플 처럼 유랑을 즐겼다.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한반도 전역을 누비며 살았다. 그들의 활동 반경이 대단히 넓었으며 성격이 자유분방하며 외형적이며 개방성이 무척 강했다. 소위 이들은 해양 세력으로 한반도에 새로 나타난 특이한 집단이었다. 호남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유분방하며 개방적이었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다채롭고 화려했다. 충청도는 백화점에 만 가지가 진열 된 상품을 보는 것이라면 이곳은 만국 박람회의 상품과 세계 각국에서 온 만백성을 관람하는 것 같다. 충청도에서는 정물(靜物)을 보는 것이라면 이곳은 동영상(動映像)을 보는 격이다. 충청도는 젊잖은 흑백 영화랴면 이곳은 총천연색 칼라 텔레비전을 보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 해양 세력의 특성 발현이며 지리산 동부 지역의 폭 넓은 가슴의 포용력이며 지리산 풍운 속에 웅비하는 용이 물을 만난 격이다. 이 지역은 해양의 열풍과 지리산의 풍운이 충돌하는 곳으로 전란이 잦고 권력의 투쟁이 빈번하여 유형 참극이 자주 일어난 곳으로 주민들의 이합집산이 무척 심한 곳이다. 이곳 지리산 동부 지역은 지리산 서부 지역과 함께 태어난 쌍생아이지만 그 특성이 튼튼한 줄기는 같고 창성한 잎은 완전히 딴 판이다. 지리산 서부 지역은 정(情)과 멋과 신바람이 있으며, 재화가 넉넉하고 화려한 반면 지리산 동부 지역은 힘과 빛과 열풍, 해학이 있으며 소박하다. 


허왕후는 한마디로 개성이 굵직하고 생애가 다양했다. 가락국의 후예들은 허왕후의 이 점을 무척 닮았다. 후예들 중에는 행적과 사상이 독특한 영웅호걸이 많다. 이곳은 영웅호걸의 공화국이며 개성이 뚜렷한 도시들의 연방공화국이다. 핍박받는 하층민의 권리를 신장하거나, 신분타파에 앞장서려던 혁명가 둘이 많이 나왔다. 한반도를 주름잡는 걸물들이 무리로 나왔다. 이곳에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펼쳐 보인 조선 천하의 인물들이 득실거렸다. 수로왕이 홀딱 반했던 공주의 미모, 그것을 닮은 아름다운 용모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여성들도 무리로 나왔다. 가락국 대신들의 오금을 못 펴게 한 허왕후의 영특함, 임금과 백성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능력, 그것을 빼닮은 듯한 여류의 정치가, 문장가, 시인, 예술인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이와 같이 이곳은 영남 북부와는 아주 판이한 영남인이 생겼다. 아유타국을 뒤로 하고 망망대해의 파도를 타고 넘어와 가락국의 임금과 백성을 그녀의 품안에 접수한 희대의 여걸, 157세로 그 화려한 인생을 마감한 허왕후의 후예들의 걸출함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반도상공에 우뚝하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삼천리금수강산의 급소를 강타하고 있다.   


허왕후의 다양성 속에는 전투적인 기상, 혁신 사상의 맹아가 엿보인다.  불의와 불운에 항거한 이 지역 사람들의 저항 정신은 지리산의 풍운과 남해로부터 불어오는 열풍의 영향을 크게 받은 탓이다. 이 지역 주민들의 다양성 속에 있는 진보적인 성향, 나아가서 반골 기질과 저항 의식은 사실상 호남 보다 더 무섭고 북방 지역의 용맹성을 압도하는 수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지역의 이런 특성이 2000년 6가야 사람들과 허왕후를 닮았다고 하면 실감하며 수긍하는 현대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할 만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기도 힘드니 더욱 그러하다. 유전자의 특성이 세월이 흘러 다른 특성과 섞이며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변하는 것 중에서 수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리는 것이 분명 있다고 본다. 


6가야의 맹주 가라국은 탈해와의 왕위쟁탈전으로 전투적인 특성을 드러냈다.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홀연히 아이를 배어 알을 낳더니 사람으로 변하여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탈해가 바다로부터 가락에 와 대궐에 들어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의 위를 뺏으려고 왔다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를 명하여 즉위케 하여 장차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들을 안도케 함이니 감히 천명을 어기어 위를 주지 못할 것이고 또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하였다. 탈해가 그러면 기술로 타투어 보자 하니 왕이 좋다 하였다. 


삽시간에 탈해가 매가 되니 왕은 번개와 같이 독수리가 되었고 탈해가 또 변하여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였다. 조금 있다가 탈해가 본신으로 화하자, 왕도 또한 제 모양을 회복하였다. 脫탈해가 이에 항복해 가로되 내가 술법을 다투는데 있어 독수리에 대한 매, 새매에 대한 참새가 되었으나 죽음을 면한 것은 대개 성인이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의 소치이니 내가 왕과 더불어 위를 다툴 일이 아니라 하면서 곧 절하고 나서 떠나가려 하였다. 왕은 그가 난을 꾸밀까 염려하여 급히 주사 5백 척을 발하여 쫓으니 탈해가 계림지계로 달아나므로 주사가 모두 돌아왔다 한다.


이 전설을 통해 그 특성을 살펴보면 가락국을 위시한 가야 제국은 용맹성이 강하고 전술, 전략에 능했으며 위장술이 뛰어났다. 그리고 덕을 사랑했다. 이와 같이 가야 제국은 영남 북부 지역의 한문화권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 해양세력권으로 그 국력이 대단히 강성해서 백제와 일본, 신라의 끈질긴 공격을 받았으나 오랫동안 버틴 영웅들의 연방공화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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