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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팸트리 Sep 18. 2019

퇴계 가문의 500년 혈연

퇴계 가문의 500년 혈연

출처: https://blog.naver.com/hasingi/80132600072

퇴계가 외아들 준과 손자 셋을 두었다. 맏손자 안도는 44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둘째 손자 순도는 30세에 세상을 떠났다, 셋째 손자 영도의 둘째 아들 억을 맏손자 안도의 후로 입양시켰다. 퇴계의 장증손 억이 42세로, 억의 맏아들 명철[퇴계 장현손]이 37세로 세상을 떠나 아들이 없었다. 

퇴계는 외아들을 두었고 손자 몽재 안도 이후 수세를 내려오면서 모두가 수를 못하였다. 


이고의 아들 수겸의 배위는 참봉 홍상문의 딸 부계[부림]홍씨이다. 상문은 목재 홍여하의 아들이다. 여하는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로 일컬어졌다. 여하의 아버지 호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다. 호의 종증조부 언방은 문과에 사가독서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절개가 있어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다. 언방의 아버지 귀달은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


이수겸의 맏아들 세덕은 장릉참봉, 내섬시 봉사, 의금부 도사를 거쳐 단성 현감으로 나갔다. 백성들에 대해 온화한 원으로 행정을 잘하여 명성이 사방으로 퍼졌다.  배위는 처사 홍경의 딸 남양홍씨이다. 홍경은 이조판서 우원의 아들이다. 남양홍씨는 경북 순흥[두곡, 띠띠물]에 세거했다. 우원은 형조판서 가신의 손자이다. 가신의 둘째 아들 영은 우정. 우관, 우원, 우량을 낳았다. 우정은 홍석, 정양, 심장세, 강흡과 함께 태백오현으로 일컬어진다. 우정의 후손에 선비들이 많고 현대 인물로 10,11대 국회의원에 무임소 장관을 지낸 홍사덕을 비롯하여 국세청 징세조사국장 성범, 고교장 성인, 음대학장 춘선, 박사 교수 사만과 남선, 문필가 동선, 승목[외무고시], 승기[사법고시], 의사 혜준, 대흥물산 사장 사기, 의학박사 피부과 의원장 우선, 기술연구원 원선, 은행 차장 사흥 등이 있다.


이수겸의 둘째 아들 세헌은 통덕랑이다. 배위는 의병장 유승현의 딸 전주유씨이다. 승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를 지냈다. 승현은 이인좌의 난 때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양가의 사돈이 모두 의병대장이 된 것은 고금에 드문 일이라 하겠다. 유승현의 아들 도원이 동생 장원과 함께 영남 퇴계학파의 종사로 이름을 날렸다. 승현의 후손에 석학이 쏟아졌다. 아들 범휴와 손자 정문이 학행이 뛰어났고 증손 치엄, 치유는 사서 삼경에 정통했다. 현손에 건호, 정호, 기호가 학행이 있으며 5대손 연구, 연린, 연근 등 글 잘하는 선비가 무리로 나왔다. 현대 인물로 공보처장관 유혁인, 한솔그룹 사장 유화석, S오일 사장 유호기 등이 있다.


이수겸의 맏딸은 해저 의성김씨 단사 김경온에게 출가했다. 단사는 관찰사 김성구의 손자이다. 단사 김경온은 단사협에서 학문을 닦고 있던 중 어사가 지나가다 조정에 천거하기를 “단사협에서 은거하여 만권의 서적을 읽었다.”고 하였다. 단사 후손에 문천 희소가 나왔다. 그는 이상정 문인으로 사서오경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닭실의 석학 이재 권연하의 학문을 일찍 깨우쳐 주었다. 그 동생 희락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고 우수는 문과하여 예조참의를 지냈다. 글 잘하는 선비로 철수, 난영, 화영, 뇌식, 석림, 창기 등이 있다. 뇌식은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현대 인물로 검사 호영이 있다.


이수겸의 셋째 딸은 해평 전주최씨 수인에게 출가했다. 수인의 선조 현과 산휘 부자는 명망이 높은 영남의 인물이다. 현은 호가 인재이며 학봉 김성일과 한강 정구에게 글을 배우고 문과하여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학문과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아들 산휘는 유효립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사공신 3등에 올라 하사 받은 전토와 노비를 모두 반환하여 칭송을 들었다. 병자호란 때 의병대장으로 문경에 있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단기로 상경하여 임금에게 고하고 돌아오다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그 행위를 갸륵하게 여겨 부조지전의 은혜를 내렸다. 아버지 시호는 정간이며 아들 시호는 효헌이다. 해평 전주최씨는 경주최부자 집, 덕천동 청송심부자 집과 함께 영남 3대 부호이다. 경주 최씨가 12대 진사에 12대 만석꾼이며 덕천동 심씨는 9대에 2만석을 한 반면 전주최씨는 해평평야에서 한때 6만석을 한 집이며 400년 동안 부호의 자리를 지켰다. 이수겸의 외손자 최광벽은 문과에 병조참판을 지냈다. 외손자 광옥, 광악, 광익, 광직은 모두 학행과 행의로 일컬었다. 최수인 후손에 현대 인물로 수출입은행 상무 종악이 있으며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있는 이가 환, 순, 경호, 시호 등이 있고 의학박사 종국, 외과의 광호, 동아일보기자 맹호, 회사이사 선호, 박사로 산림종합건설회장 종두, 산림건설 사장 종일, 공영토건 차장 경, 건축사 찬, 외무고시 합격자 승호 등이 있다.


이수겸의 넷째 딸은 안동권씨 현령 권정택에게 출가했다. 정택은 경북 봉화 닭실[유곡] 충재 권벌 후손이며 창설재 권두경의 손자이다. 권두경은 갈암 이현일의 문인이며 우담 정시한의 문인이기도 하다. 그는 닭실 문중의 대명사 “하당 창설”의 주인공이다. 하당 권두인과 창설재 권두경이 문명을 떨쳐 영남 사림이 추중하여 붙인 애칭이 “하당 창설”이다. 권정택의 후손에 의병대장 성대 권세연이 배출되었다. 세연의 손자 상규는 당대 유림의 거두이다.


이세덕의 아들 귀응은 동몽교관을 거쳐 주부, 감찰을 지내고 하양현감, 비안 현감을 지냈다. 귀응의 배위는 순천박씨 별검 성준이다. 성준은 충정공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이다. 세덕의 셋째 딸은 광산김씨 성익에게 출가했다. 성익은 후조당 김부필의 적은집 부륜의 후손이다. 성익의 아들 시찬은 제자백가서에 통달했다. 저서가 19책이 있다. 시찬은 외조부 세덕의 묘갈명을 썼다. 이세덕의 넷째 딸은 의성김씨 김한동에게 출가했다. 그는 해저 입향조 팔오헌 김성구의 증손이며 단사 김경온의 당질이다. 한동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임금이 영남 인재에 대해 물을 때 우의정 채제공이 “김한동이 제일이다.”고 했다.


이수겸의 둘째 집 손자 귀몽[세헌의 아들]은 통덕랑이다. 귀몽의 배위는 의성김씨 택동의 딸이다. 택동은 팔오헌 김성구의 증손이며 한동과는 6촌간이다. 택동의 후손에 인물이 많이 나왔다. 희성, 두명, 건수 등이 문과에 급제하고 희교, 희용, 재전, 익수, 우림 등 글 잘하는 선비들이 나왔으며 홍기, 정진, 창백 등 건국공로 훈장을 받은 이가 배출되었다. 특히 문정공 김우옹 집으로 양자간 김창숙이 이집 후손이다. 김창숙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과 성균관대 창립초대 총장을 지내며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이지순은 수겸[귀응의 아들]의 증손이다. 희릉 참봉을 지내며 그 고장에 흉년이 들자 봉급을 풀어 구휼했다. 지순이 무후하여 수겸의 둘째 아들 세헌의 증손 휘령[세헌-귀몽-승순-휘령]으로 입양계대 했다. 휘령은 생가로 공조참판 만익, 목사 만유의 숙부가 된다.


이휘령은 호가 고계이다. 동몽교관을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다. 185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휘령의 배위는 권사주의 딸 안동권씨이다. 사주는 닭실 안동권씨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사주의 적은 집들이 번성했다. 사주의 숙부 정근의 후손에 만석꾼이 났다. 진사 권철연과 권상경 부자가 그 주인공으로 학행에 재물이 넘쳤다. 상경의 종손자 원기가 과기대 총장과 과기처 차관을 지냈다. 철연의 숙부 칭하의 증손 두환이 문학박사에 서울대 교무처장을 하고 있다. 정근의 적은 아들 사계 후손에 국연, 노섭이 학문이 깊으며 노섭의 조카 정기가 중앙일보 인사국장에 공영토건 인사상무를 지냈으며 정기의 매부 강증원은 강원산업 대표이사를 지냈다.

휘령의 셋째 손자 중인은 학행이 있다. 중인의 배위는 김석규의 딸 선성김씨이다. 석규는 호가 치암이다. 치암은 경북 영주 이산 우금 출신이다. 문절공 김담의 현손 윤의의 둘째 아들 우익은 삼판서 고택에서 분가하여 우금에 자리 잡았다. 우익이 문과하여 영원군수에 이어 안동의 제독관을 지냈다. 1620년 이괄의 반란 때 의병대장을 지낸 뒤 한성부서윤에 이르렀다. 우금에서 사마시에 합격한 이가 30여명, 문과 급제자 8명이 나왔다. 선성김씨 [우금]은 연안김씨 마을 [머름이], 함창김씨 마을 [신내]와 함께 인물, 재산이 울성해서 [반서울]이라는 칭을 들었다. 영남의 명망 있는 학자 강좌 권만이 당대 인물로 첫손가락을 꼽은 운학재 김한주가 우금에서 나왔다. 김석규는 현감 낙주의 손자로 백가서를 섭렵했다. 그는 영남 만인소를 올릴 때 소수 이만손에 이어 부소수로 활약했다.


중인의 아들 영호 또한 글하는 선비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중인의 조카 상호와 그 아들 원영이 학행이 있다. 영호의 아들 가원이 현대 한국 한문학계의 태두로 퇴계학연구원장, 유도회총본부위원장, 연대교수, 단국대교수 등을 역임했다. 


휘령의 현손 원태는 문행이 있으며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원태의 아들 동준, 동보, 동신, 동승이 진성이씨 현대 가문 상계 종파의 주역들이다. 동준은 인천제철사장, 대한양회사장을 역임하고 세계적인 퇴계학연구원을 설립 이사장으로 활약하고 있고 동보 동신 동승도 함께 참여하며 종사를 돌보고 있다. 동승은 서울대 독문과 교수를 지냈다. 


휘령의 5대손 동은은 동준의 종백씨이고 퇴계 15대 종손이다. 동은은 맏아들 돈환[근필] 둘째 아들 정희[삼보 컴퓨터 부사장]를 두었고 딸 하나는 재령이씨 대종손 이문흠[삼보 컴퓨터 회장]에게 또하나는 의성김씨 학봉 종손 김종길[삼보 컴퓨터 사장]에게 출가시켰다.


이수겸의 동생 세헌의 아들 귀몽은 아들 여섯[종순, 이순, 명순, 사순, 승순. 연순]을 두었다. 종순과 이순은 학행이 있다. 이순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참판 이정규가 경학에 깊고 행실 있는 선비로 이순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이순은 효릉 참봉, 선공감 봉사, 금부도사를 거쳐 은진현감을 지냈다. 명순의 아들 휘규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 청주목사, 동래부사 등 6고을을 살고 동부승지를 지냈다. 


이순의 아들 휘병은 호가 소계이다. 휘병은 1855년 장헌세자의 추존을 요구하는 영남 만인소의 소수가 되었다. 휘병의 아들 만손은 호가 돈와이다.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국왕에게 가납되자 안동지방 유림에서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이 때 예조참판을 지낸 늑암 강진규가 상소문을 썼다. 늑암은 조부 송서 강운과 과재 성근묵에게 글을 배워 시와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조부 송서 강운이 이재 권연하, 복재 강건, 신암 이만각을 가르친 영남의 종사이다. 조부의 가르침을 받은 늑암[역암]은 대원군이 신임하는 예조참판이다. 위정척사의 뜨거운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 영남 유림의 절규를 가장 잘 표현할 문장가의 적임자로 강진규가 선정된 것이다. 그리고 소수는 인품이나 학문, 덕행에서 만인의 사표가 될 사람으로 이만손을, 부소수는 우금 선성김씨 석규를 각각 뽑았다. 이만운, 이만유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그일로 인해 이만손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귀양을 갔다. 휘병과 만손 부자는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양대 소수로 명성을 날렸다. 종순의 손자 만호, 만손의 아들 중택, 만손의 조카 중흥, 중흥의 조카 병호, 명순의 손자 만숙과 만원, 만원의 손자 욱호 등이 학행이 있다.

이성철은 상계 종파의 적은집이다. 성철은 억의 둘째 아들이며 명철의 동생이고 수겸의 종조부[생가 조부]이다. 성철은 목릉참봉을 거쳐 산음현감,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병으로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배위는 장사랑 정기덕의 딸 청주정씨이다. 기덕의 부친은 전이다. 전은 김성일, 유성룡, 구봉령에게 글을 배웠다. 전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도사에 임명되었다. 성리학에 잠심하면서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전의 조부 사성은 호가 지헌이며 어려서 김언기, 구봉령에게 글을 배우고 17세에 이황에게 글을 배웠다. 유일로 천거되어 현감을 지냈다. 전의 후손에 내성이 경학에 밝고 주자학에 깊어 문명이 높았다. 사성 동생 사공 후손에 현대 인물로 자유당 원내 총무 정문흠이 있다. 사공의 동생 사신은 김성일, 유성룡, 구봉령에게 글을 배우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무찌른 공으로 선산군수가 되었으며 학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사신의 아들 칙은 학행이 뛰어나 암행어사의 천거로 제랑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사신의 동생 사의 후손에 탁은 호가 매계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을 지냈다.

이성철의 맏아들 고는 종가의 봉사손으로 입후했다. 성철의 둘재 아들 절은 세 아들 수태, 수대, 수인을 두었다. 수인과 세정 부자가 학행이 있고 세정 후에 만로가 문과하여 정언을 지냈다. 수대 후에 운호, 성호가 학행이 있으며 목호는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이성철의 셋째 아들 실은 온화하며 후덕했다. 배위는 의성김씨 현감 학배의 딸이다. 학배는 학봉 김성일의 형 명일의 후손이다. 학배는 표은 김시온 문인이며 생원으로 태학에 유학했을 때 성균좨주 송준길이 “성균관 선비로는 김학배가 가장 뛰어납니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그는 문과급제하여 고성현감을 지냈다. 성균관에 경서 교정청이 설치되어 이단하, 김만중, 박신, 홍도 등과 함께 교정관으로 일했다.


이수연은 실의 아들이다. 수연은 밀암 이재의 문인이다. 중신들이 경연에서 주청하여 익찬이 제수되었다. 그는 퇴계의 학문을 정리하여 [퇴계선생속집]을 편찬했다. 56세로 별세했다. 수연의 배위는 통덕랑 응하의 딸 풍산유씨이다. 응하는 서애 유성룡의 현손이다. 


이세윤은 수연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적성현감을 지냈으며 벼슬에서 물러나 초가 삼칸에서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장인이 죽으면서 준 재산 문서 한 상자를 받지 않았다. 세윤의 후손 중찬은 문과하여 부정자를 지냈다.

이휘재는 수연의 현손이다. 휘재는 호가 운산이다. 1827년 생원시에 장원하고 1842년 경산현령으로 문회재를 창건하여 선비들의 학문을 크게 권장하였다. 그는 안성군수, 청풍부사를 지내고 안렴사 서당보의 천거로 홍주목사가 되었다. 홍주의 고을원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홍주에 공덕비가 섰다. 병인양요 때 군사를 모집하라는 어명을 받고 예안에 나가 모병을 하여 공을 세웠다. 그뒤 호조참의,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했다. 고향 용계에서 성리학 연구에 잠심하였다. 의례변절을 정선하였으며 후진을 양성했다. 휘재의 아들 만시[군수], 손자 중린, 증손 원호 모두 학행이 있다. 휘재의 적은집에 은순, 만정, 중봉 등이 글하는 선비들이다.

이수택은 수연의 동생이다. 수택의 후손에 귀발, 휘각, 만상, 만여 등이 학행이 있다. 


이신철은 성철의 동생이다. 신철의 증손 세백은 문과하여 승의랑을 거쳐 전적이 되었다. 임금이 그에게 내구마를 한 필 주며 돈령도정을 제수했다. 세백의 고모부로 청대 권상일이 있다. 세백의 후에 중섭이 글잘하는 선비이다.


이상은 퇴계의 맏손자 안도 이후, 즉 퇴계 종파인 상계파의 인물을 대략 훑어 본 것이다. 족보상으로는 종파, 염촌파, 강산정파, 병암정파, 계상파, 항곡파, 하산파, 칠창파, 염계파 등으로 나누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 모두를 합쳐 편의상 상계파로 묶어 본 것이다.

퇴계 가문의 큰집 상계파를 일별해 본 결과 한양의 문중 8강이나 최고 문형 4대 가문, 충청도 양반 은진 송씨 가문, 호남의 행주기씨 가문을 둘러본 감회와는 천양지차가 나고 있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들 가문에 어깨를 겨루어 내놓을 것은 퇴계 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 한양에서부터 호남에 이르는 명문 대가 들에서 그렇게 흔하게 보던 상신, 판서를 상계 종파에서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변변한 참판 한 자리도 못했다. 한양의 명문세가들이 가문 마다 뽐내는 화려한 자랑거리 하나 없다. 한양의 영화와 명예는 죽령과 조령이라는 높디 높은 고개에 걸려 넘어 오지를 못했다. 한양의 명문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다. 문물, 풍속, 언어, 습관, 음식이 다른 인물이 사는 별세계가 펼쳐졌다. 

바로 동방 유학의 이상향이 탄생한 것이다. 포은 정몽주로부터 점필재 김종직을 거쳐 정암 조광조를 통해 퇴계 이황에서 꽃핀 도학의 도원경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인, 의, 예, 지, 신의 종합 예술품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 

진성이씨 퇴계 가문의 의인파 파조는 퇴계 둘째 손자 이순도이다. 

이영철은 순도의 하나 뿐인 손자이다. 그는 선현의 가르침을 받아 부귀영달을 원하지 않았다. 천거로 교관이 제수되었다. 

이재건은 영철의 아들이다. 통덕랑을 지냈다. 배위는 현감 유원지의 딸 풍산유씨이다. 원지는 서애 유성룡의 장손이다. 원지의 호는 졸재이다. 어려서 조부 서애한테 배우고 나중에 숙부 수암 진에게 배웠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 이홍조와 함께 활약했다.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했다. 뿐만 아니라 역학, 천문, 지리 , 예악, 음률, 의학, 상수에 까지 두루 밝았다. 유원지의 후손에 인물이 쏟아져 나왔다. 병조판서 상조, 예조참판 태좌, 대사간 치목, 우부승지 진한, 대사간 지영, 승지 도휘, 공조참의 광목[모두 문과급제자임] 이외 글 잘하는 선비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원지 손자 유후장이 유명하다. 후장의 호는 주일재이다. 그는 조부 원지, 족숙 세명, 목재 홍여하에게 글을 배웠다. 퇴계의 도학이 서애 성룡으로부터 그의 셋째 아들 수암 진을 통해 맏손자 원지에게 전해지고 원지의 손자 후장에 이르렀다. 임여재 유규도 유명하다. 규는 원지의 현손이며 후장의 종손자이다. 규는 지중추부사 강항에 의해 경학으로 천거되고 상신 채제공에 의해 또다시 천거되어 도정의 벼슬까지 지냈다. 규 역시 제자백가서에 통하고 음양, 산학, 음률, 역상에도 밝았다. 이황의 학문이 성룡, 진, 원지, 후장을 통해 규에 이르렀다. 그는 퇴계의 학풍을 크게 신장시켜 이름을 떨쳤다. 원지 후손에 건국공로 훈장을 받은 이로 소우, 시보, 시훈 등이 있다. 현대 인물로 국회의원 유돈우, 주일대사 태하, 육군준장 창우, 신세계백화점사장 한섭, 농협중앙회이사 시동 등이 있다.


이재건은 무후하여 끝에 동생집의 셋째 아들 수증으로 입양계대했다. 재건의 동생 양도 무후하여 끝에 동생집의 맏아들 수홍으로 입양계대했다. 양의 동생 경도 무후하여 집의 둘째 아들 수항을 입양시켰다. 영철의 세 아들이 모두 후사가 없는 것을 넷째 아들 집이 8남 2녀를 낳아 세 명의 형집 대를 이어주었다. 집은 의인 진성이씨 가문의 큰 대들보 역할을 했다.


이집은 자가 백생이며 호는 수월헌이다. 집은 서애 현손 유일재 유후장의 문인이다. 그는 헌릉참봉을 거쳐 화순, 삼가의 현감을 지냈다. 이인좌의 반란 때 이수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세술은 양의 손자이다 양은 영철의 둘째 아들이다. 세술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현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는 관찰사 정옥의 딸 청주정씨이다. 옥은 약포 정탁의 후손이며 경북 예천에 세거하는 약포 가문의 종손이다. 정탁은 이황의 문인으로 좌의정을 지냈다. 탁은 경학에 정통하고 천문 , 지리, 병법에도 통했다. 탁의 아들 윤목은 호가 청풍자이다. 경사는 물론 예악, 병형, 음양, 율력에 두루 통했다. 그는 초서로 당대 제1인자이다.


이구석은 세술의 둘째 아들이다. 호는 반와이다. 경산과 영산의 현감을 지냈다. 젊을 때 길을 가다가 숲속에서 아이가 비명을 질러 가보니 문둥 병자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아이 간을 내 먹으려던 참이었다. 사연을 들으니 흉년에 굶주린 어미가 돈을 받고 그 아이를 그들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구석은 그 값을 치르고 길거리집에 맡겨 키우게 했다. 그 아이가 자라서 구석의 집 노역을 자청했으나 굳이 물리치고 노자를 주어 돌려보냈다. 기호지방의 남인 학자로 당대 유림의 종장인 성재 허전이 구석의 묘명을 지었다.


이수항은 경의 아들이다. 경은 영철의 셋째 아들이다. 수항은 호가 산후재이다. 그는 경술로 천거되어 감역에 제수되었다. 가학을 이어 받아 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았다. 퇴계 [문순공 실기 도산급문록 사칠통변연원록부주] 등의 편저를 남겼다. 수항의 아들 세택은 학행이 있다. 세택의 넷째 아들 구호는 통덕랑이다. 구호의 배위는 참판 이헌묵의 딸 여주이씨이다. 헌묵은 회재 이언적의 후손이다. 언적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이다. 헌묵은 영조조에 문과하여 도승지를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헌묵의 숙부 순중 후손에 외무부, 문공부, 체육부의 장관을 지낸 이원경이 나왔다. 헌묵의 적은집[의택 후]에 코오롱 초대 회장 이원만, 2대회장 이동찬, 3대 회장 이웅렬 3대가 나왔다. 세택의 셋째 아들 구록의 딸은 참판 유태좌에게 출가했다. 태좌는 서애 후손이며 원지의 6대손이다. 세택의 동생 세탁은 생원에 현감이다. 세탁의 동생 세명은 처사이다. 세명의 배위 의성김씨는 열행으로 복호를 명받았다.


이수항의 둘째 딸은 풍산 김씨 첨추 김서필에게 출가했다. 서필은 학사 김응조의 후손이며 정의 아들이다. 학사 김응조는 대현의 아들이다. 대현은 8형제를 두었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중 5형제[봉조, 영조, 연조, 응조, 숭조]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고금에 드문 일이라 하여 그들이 사는 동네 오릉동을 오미동으로 고치게 하고 마을 어귀에 경상감사로 하여금 봉황려라는 문을 세우게 하였다. 5형제 중 영조와 응조가 현달하였다. 망와 영조는 이조참판을, 학사 응조는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의 기강을 하도에서는 한강 정구가, 윗녘에서는 망와 학사 형제가 붙들어 세웠다.”고 하였다. 김서필의 아버지 정은 170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천 군수로 나갔을 때 민가 600여호와 공청 수백칸이 불탄 사건에 대해 뒷수습을 잘 하였다. 이조판서 민진원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표리 한 벌을 하사 받았다. 그뒤 강릉대도호부사로 나가 삼백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을 돌보았다. 감사 이복명이 그의 치적을 조정에 알리기를 “김정의 치적이 도내에 제일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숙마 한 필을 하사했다. 서필의 증손 종태는 병조참판에 올랐다. 종태 후손으로 현대에 부산고속 이사 장환, 서울지하철차량사무소장 맹수가 있다. 응조 후손으로는 육군대장 김재창을 비롯하여 공군소장 진섭, 공군준장 병탁, 박사 교수에 중대, 두산산업이사 천섭, 장학관 재영 등이 있고 재헌의 배위 고교장 이영애, 정춘의 시부 내무차관 이상룡, 진섭의 딸 미영 부군 박사 김영주 그리고 영주의 부친 박사 운태, 재호의 배위 송혜숙 혜숙의 부친 석탄공사안전본부장 송재규, 순희의 부군 박사 교수 안병렬, 천섭의 여동생 의학박사 애수 부군 산림조합중앙회장 차종태 등 풍산김씨는 여성쪽의 사회 진출이 많다. 이것은 응조 집에 한한 현상만이 아니다. 풍산 김씨 가문 전체를 보면 그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봉조 후손에 수필가 및 교수인 진섭의 딸 옥교 부군 박사 쌍용양회사장 김채겸, 옥교 동생 문자 부군 교수 배한경, 의학박사 만섭 딸 선자 부군 변호사 서재웅, 대판흥업은행이사 흥섭 딸 일희 부군 재일본거류민단부단장 김시현. 숭조 후손에 대검검사 완섭의 아들 박사 교수 재영의 배위 약사 김혜규 그리고 혜규의 부친 대법원장 김병로, 혜규의 동생 의학박사 가미, 대검검사 완섭의 딸 영자 부군 서울공대 학장 이양. 영자 동생 달생 부군 박사 고려대 부속병원장 신흥수 흥수 부친 의학박사 신필호, 달생 동생 영옥 부군 공학박사 홍승우, 영옥 동생 양미 부군 서울법대교수 이태로, 보사부국장 하섭의 딸 재남 부군 박사 육군소장 대한적십자병원장 박성대, 부산부시장 병순의 딸 경옥 부군 육대교수.....등등이다. 이집 여성쪽 사회 진출을 다 열거하려면 하룻밤을 지새워도 부족하기에 여기서 그친다. 풍산김씨 오미동과 오록의 딸네들 데려가면 잘 산다는 이야기 나올만하다. 그렇다고 남성쪽이 기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풍산김씨 명성은 거슬러 올라가 인조대왕을 놀라게 하고 500년을 한결같이 영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동순은 구천의 아들이며 구천은 수증의 손자이고 수증은 영철의 맏손자이다. 영철은 의인 파조 순도의 장손이다. 이휘부는 동순의 아들이며 승지 중태의 조부이다. 호는 치응이다. 영릉참봉을 거쳐 단성현감으로 나갔다. 세금을 깍아주고 어려운 백성을 돌보며 선비를 기르고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생사당을 지었다. 그뒤 영천군수로 나가 수재민 800여호를 구휼했으며 두 번째 수해를 당했을 때도 경비를 내놓아 제방을 복구했다. 사람들이 그 제방을 [이공재]라 불렀다. 이어 삼척부사로 나갔을 때 논밭 300여결이 유실되고 360호가 떠내려 갔다. 이 때도 자비를 보태 복구하였다. 그리고 묵은 폐단을 깨끗이 씻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기려 [만세청풍]이라 돌에 새겼다. 


 [다]

이영도의 아들 기는 앞에서 이야기 하여 영도의 손자 희철로 넘어간다. 희철의 후손이 하계의 주력부대이다. 희철은 찰방의 벼슬을 할 때 이웃집이 염병으로 온 식구가 다 죽고 어린 딸 하나만 남았다. 그는 그집이 장례를 치루게 돌봐 주었다. 


이수약은 희철의 손자이다. 그는 7남 5녀를 낳아 하계를 번창시킨 주인공이다. 참봉을 했으나 사후 아들 세사가 지중추부사가 되어 이조판서의 증직이 내렸다. 조선조 말엽 영남의 대학자 서산 김흥락이 묘명을 찬했다. 배위는 처사 강자의 딸 진주강씨이다. 강자는 이오당 강흡의 아들이다. 흡은 심장세, 홍석, 정양, 홍우정과 함께 태백오현으로 일컬어졌다. 강흡이 5남 1녀를 낳고 손자 13명에 손녀 3명으로 후손이 번창하여 영남의 명문이 됐다. 강흡의 딸이 하계로 출가하여 7남 5녀를 낳았으니 청출어람하는 다산의 복을 지녔다 할 수 있다. 강흡의 후손은 방대해서 한꺼번에 다 이야기 할 수 없다. 단지 흡의 셋째아들 자의 후손만 보기로 하자. 자의 증손 윤의 집이 강흡 가문의 노른자위이다. 이 집은 영남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집으로 서너 손가락 안에 든다. 참판이 귀한 영남에 양대 참판이 난 집이다. 윤이 문과하여 관찰사이고 윤의 손자 시환이 삼산재 김이안의 문인으로 경술이 뛰어나 천거로 세마가 되었다. 좌의정을 지낸 남곡 송근수가 그의 행장을 지었다. 시환의 아들 태중이 문과하여 병조참판을 지내고 태중의 아들 건이 문과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영남에서 동인이 쇄락한 뒤 부자나 형제가 참판을 한 집은 몇집 되지 않는다. 관찰사 윤의 증손, 현손 대에 부자 참판이 났으니 영남이 떠들썩했다. 이수약의 장인 강자의 후손에 현대 인물도 만만치 않다. 박사에 고려대교수 영남대 학장 면희, 면희 아들에 아주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신영 그리고 신영 배위 부친 제일은행장 정규황, 신영 동생 축협 중앙회 부장 신홍, 신홍 동생 과학수사연구소소장 카토릭의대 교수 신몽 그리고 신몽 배위 박사 순천향의대 교수 이혜경, 신몽 누나 정애 부군 대원과학대 학장 기주연, 면희 조카 박사 서울공대 교수 신형, 면희 종형 화일토건 감사 영희, 영히 아들 신세기 통신 대표이사 신종, 자의 아들 재광 후손에 국회의원 인권 변호사 신옥 등이 있다.


이세진은 수약의 맏아들이다. 문과하여 시강원 사서를 지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건지산 선영 아래 집을 얽고 성리서를 연구하며 가업을 이었다. 


이세사는 수약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총명하여 10여세에 이미 경사를 두루 섭렵했다. 174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내렸으나 그 때마다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자하봉 아래 만화헌이라는 집을 짓고 음풍영월을 했다. 또 벼슬이 내려 입궐하여 사은 숙배하고 돌아 오니 임금이 “너는 대현의 후예로 번번이 임금의 부름을 어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리석은 신하로 무거운 소임을 맡는 것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조상을 욕되게 하는 죄가 더욱 무거워 차라리 명을 어기는 벌을 달게 받겠나이다.”고 하였다. 그 뒤에도 임금은 판결사, 공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경상감사에 명하여 세찬을 내리고 가의대부에 올렸다. 이어 자헌대부, 정헌대부를 내리고 옷감과 식물을 하사했다. 그뒤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의 벼슬이 내리고 기로소에 들었다. 그가 실제로 관직에 있은 것은 18일 정도이다.

이세진의 후손에 익호, 세호가 학행이 있다. 세진의 동생 세관의 손자 택순이 글하는 선비이고 택순의 손자 만송은 문과하여 정언을 지냈다. 만송의 동생 만백의 아들 중두는 문과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다. 중두의 아들 국호, 필호는 학행이 있다. 만백의 현손은 동봉이다.

 만송의 6촌 만우는 첨추이다. 만우의 아들은 중언이다. 이중언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5적의 극형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한일합방이 되자 향산 이만도의 순국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 여러 날이 지나 숨을 거두었다.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이태순은 택순의 동생이다.

이태순은  대사간, 동부승지, 공조참의 등을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태순의 손자 만덕은 문과하여 정언을 지냈으며 또하나의 손자는 당대의 석학 신암 이만각으로 정재 유치명의 수많은 제자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성 있는 학자이다. 이 3조손은 진성이씨 하계의 주가를 상종가로 올려 놓은 사람들이다. 의인의 병조참판 이동순의 번남댁과 하계의 병조참판 이태순의 초초암댁은 진성이씨 퇴계 가문 중에서도 일류들이다. 태순의 배위는 첨지중추부사 강색의 딸 진주강씨이다. 송서 강운은 태순의 처남이다.


이태순의 맏손자 만억은 통덕랑을 지냈다. 만억의 아들 중묵은 역시 통덕랑을 지냈다. 만억은 진주강씨 대사간 강하규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하규는 송서 강운의 손자이다. 만억은 딸을 잘 키워 의성김씨 서산 김흥락에게 출가시켰다. 서산은 한말에 영남을 대표하는 대학자의 한 사람이다. 학봉 김성일의 종손으로 석학이면서 독립투사인 제자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했다. 서산 제자들은 의병대장 급 인물에 권세연, 이상룡, 김동삼 등이 있고 석학으로 권상익, 이승희 이외 이중업, 송준필, 기대락, 김원식, 김연환 등이 있다.


이야순은 태순의 4촌이다. 야순은 호가 광뢰옹이다. 그는 대산 이상정과 천사 김종덕의 문인이다. 그는 뇌석정을 중건했으며 암행어사 이우재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이 되었다. 성리학 연구가 깊고 예학에 밝았다. 문장이 뛰어나 이태순과 함께 하계의 명성을 치켜 올렸다. 야순의 아들 휘정도 경술이 뛰어나 부자 명성이 높았다. 

이세진의 둘째 동생 세항의 후손에 선구, 현구, 윤석 등이 학행이 있고 병호는 심학과 성리학을 두루 섭렵하여 경북 영주를 대표하는 당대의 석학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세태는 세진의 6촌이다. 세태는 문과하여 참의를 지냈다. 세태의 아들 구경, 구경의 아들 헌순, 구경의 손자 휘장, 구경의 증손 만두, 만규 모두 글잘하는 선비들이다. 만규는 문과하여 교리를 지냈다.

이가순은 지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고 겨우 관직에 18일 있었던 이세사의 손자이다. 

이만도는 호가 향산이다.  만도의 배위는 진사 권승하의 딸 안동권씨이다. 승하는 글 잘하는 선비 재륜의 아들이며 연하의 형이다. 연하는 닭실 안동권씨가 자랑하는 대성리학자이다. 하당 권두인과 창설재 권두경은 시와 문장으로, 이재 권연하와 채산 권상규는 경학으로, 충헌공 권정침과 의병대장 성대 권세연은 충절로, 공조참판 권재대와 병조참판 권영하는 양대 참판 벼슬로 각각 명성을 날렸다. 이상 8인은, 인물이 수도 없이 많은 닭실 안동권씨를 대표하는 충재 권벌의 뛰어난 후손들이다. 이재 권연하는 이만도의 처숙부로 닭실이 아끼는 석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영남 사림의 종사 정재 유치명의 첫손가락을 꼽는 영남의 인물이다. 유치명의 문인은 수백 아니 천여명에 가까운 대군단이다. 경상 좌우도를 휩쓸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서 빼어난 인물이다. 

 이 일에 맏사위 김용환이 나섰다. 용환은 학봉 김성일의 종손이다. 용환은 군자금 모집에 대한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방탕과 기행을 일삼은 것이 나중에 드러났다. 속으로는 오직 조국의 독립에 기여하려는 일념이 굳셌다. 그는 항일 전투에 참여하고 만주로 망명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강제로 귀향당했다. 그뒤 의용단 결성에 참여한 혐의로 경찰에 또 체포되었다.

둘째 사위 유동저도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동저는 의병장 유승현의 후손이요, 정재 유치명의 증손이며 세산 유지호의 손자이다. 그는 안동 청년회에 거금 100원을 기부했고 토론회에 참여하여 국민계몽과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제2차 유림단 사건이 터졌다. 여기에 중업의 두 아들 동흠과 종흠이 관련되어 체포되었다. 연락책 정수기로부터 통보를 받은 종흠은 형 동흠에게 상의하고 대구로 가서 김창숙에게서 권총 한 자루를 받아 돌아 왔다. 종흠은 양외숙부에게 그 권총을 들고 가 군자금을 요구하다 탄로나서 형제가 모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모진 고문을 받고 형은 면소 판결, 동생은 1년 집행 유예에 4년형을 받았다.


[라]

이극철은 하계 파조 영도의 둘째 손자이며 퇴계의 현손이고 학사 김응조의 외증손이다. 1624년에 태어났다. 장인 금시해에게 글을 배웠다. 자질이 순후하고 덕행과 기국이 크며 깊었다. 고산 이유장, 계동 남천호, 난은 이동표와 함께 도의를 강마하고 시구를 창수하여 늙도록 변함없이 정다웠다. 그윽한 맛이 풍기는 8경3곡에서 세 가지 복 연치, 관작, 덕을 한껏 누렸다. 향년이 여든 아홉, 벼슬은 용양위 부호군, 덕은 닭실의 안동권씨 참판 권대재가 노래했다.

“천사 물가 언덕은 대덕군자가 즐기던 곳이다. 재빠르게 벼슬에서 돌아와 이 한가함을 즐겼다. 그 고아한 품격을 갖춘 풍채! 숭상하여서 후인이 감탄하리!”

이규는 극철의 아들이다. 학식에 조예가 깊고 서예에 정묘했다. 한결같이 퇴계의 글씨를 본 받아서 보는 사람들이 한 솜씨에서 나온 듯하다 하였다. 그의 서법이 둘째 아들 수강과 끝에 아들 수휘에게 전수되었다. 그이들은 필법으로 선성 삼필인 매헌 금보, 매암 이숙량[농암 이현보 아들], 춘당 오수영[송재 이우 외손]과 겨루었다. 

이수강은 규의 아들이다. 자는 진숙이며 호는 단구이다. 어머니는 퇴계 문인 지헌 정사성의 후손 황의 딸 청주정씨이다. 장인 함계 정석달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장인 석달은 강의공 정세아의 5대손이며 영천에서 세거하는 연일정씨 가문 출신이다. 세아는 호가 호수이다. 호수는 정종소의 현손이며 윤량의 아들이다. 호수는 여헌 장현광, 지산 조호익, 창석 이준과 교유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포상은 사양했다. 이수강은 뜻이 고결하고 학문을 즐겼다. 단사에 집을 짓고 수석을 벗 삼으며 아우 수훈, 청벽 수연, 단사 김경온과 지묵으로 성현의 글을 강마했다. 사우들이 단구의 학문이 해박하고 정밀하다며 추중했다. 단구는 부인에게 언제나 온화하고 어진 남편이다. 늘 말하기를 “부부란 군자를 시작하는 첫 관문이다. 서로 예의로 함이 마땅한 도리이다. 일찍이 퇴계 선생께서 허부인과 더블어 서로 공경함이 귀한 손님 대접하듯 했다. 이것을 자손의 가법으로 함이 마땅하다.”하였으며 자손들로 하여금 부인을 대할 때 마다 반드시 서로 예배하며 종신토록 공경하게 하였다. 대질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향년이 83세이다. 선성지에는 “공의 뜻과 행의가 고요하고 조촐하며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다. 곧은 마음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가난한 가운데 글을 부지런히 하였다.”고 일컬었다.

이언순은 수강의 증손이며 퇴계의 9대손이다. 그는 호가 농와이다. 1774년 천사리에서 태어났다. 1804년 문과에 급제하여 효릉별검을 거쳐 홍문관에 뽑혀 부수찬, 현풍현감 등을 지냈다. 상고를 당해 복을 마쳤다. 그뒤 수찬, 헌납 등이 제수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했다. 이때 문숙공 채제공이 죄인의 신분에 있어 언순은 사직소에 그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산 한치응은 언순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감탄하기를 “의리의 맹주이다. 귀향하면 향리를 깨우쳐서 사풍을 진작시킬 만하다.”하였다. 이언순은 호서우도에 어사로 나가 아전들의 세미 농간, 뇌물수수, 수령들의 독직, 역관의 마정결손과 역로침탈, 토호의 탐학 등 각종 폐단을 척결했다. 이로 인해 강직하다는 소문이 높았다. 그뒤 공조참의, 동부승지, 춘천부사를 거쳐 이조와 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조정에 벼슬한 지 40년 세 조정을 내리 섬기면서 임금으로부터 살뜰한 대우를 받았다. 만년에 정자 하나를 짓고 서운정이라 이름했다. 퇴계의 “산에 있으면 구름에 깃들이는 학 되기가 원이다.”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아들과 맏손자가 잇따라 벼슬을 하자, 그는 경계하기를 “3대가 같은 조정에 벼슬함은 세상에 드문 바이니 더욱 조심하고 근신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리고 퇴계의 성학십도, 육조소 등을 따로 뽑아 장정을 말끔히 하여 손자에게 주며 “임금을 섬김과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가 여기에 있다.”고 훈계하였다. 1845년에 별세했다. 병조참판 정재 유치명이 행장을 찬하고 공조참판 권재대가 묘갈명을 지었다.


이휘정은 언순의 아들이다. 

이만운은 휘정의 아들이다, 동지의금부사, 겸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경주부윤, 경연특진관,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재 권연하, 긍암 이돈우, 복재 강건, 신암 이만각 등과 도의로 사귀었으며 특히 서산 김흥락과는 형제의 의리로 정의가 투터웠다. 이만운은 의성김씨 학봉 후손 목사 김진화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서산은 김진화의 아들이므로 만운의 처남이 된다. 1886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산 이만도가 행장을, 중재 김황이 묘갈명을 찬했다.

이중건은 만운의 아들이다. 호는 지산이다. 대대로 혁혁한 가문의 주손으로 영지산 아래에서 글을 하고 덕을 쌓았다. 외숙부 서산 김흥락이 이끌어 주는 가운데 선대의 정자에서 학무에 정진하니 계남 4대의 전통을 모두 칭송했다. 지산의 글이 청신하고 사람들의 심기를 밝게 한다 하였다.


이상호는 중건의 아들이다. 호는 남파이다. 모양이 준수하고 기우가 헌걸했다. 천성이 자상했으며 법도가 정연했다. 성실과 신의로 사람을 사귀어 사랑채에 손님들의 신발이 가득했다. 아들 원강은 제일은행 상무를 지냈다. 딸 하나는 국회의원 정도영의 배필이 되고 딸 또하나는 박사에 교수로 학술원회원이 된 이우성의 배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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