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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이 Feb 24. 2019

당신은 몇 점짜리 일꾼인가요?

노동의 가치? 아니, 당신의 가치.

한참 된 일이지만, '취업 n대 스펙'이라는 것이 인터넷에 나돌던 때가 있었다. JTBC에서 '비정상회담'이 간판 프로그램이던 시절, 취업 스펙을 주제로 다루었던 적이 있다. 취업 성형까지 이야기하며 다들 동의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방송을 보며 필자까지 기분이 씁쓸해졌다.


'취업 n대 스펙'이라는 표현은 유행이 지났지만, 취업 시장의 모양새는 여전하다. 단순히 어림짐작하는 것이 아닌 게, 필자가 현재 취업 준비 중이다. 대외활동이든 취직이든, 지원서 양식은 비슷하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소개서에 어떻게 자소설을 써야 하냐며 한숨 쉴 때, 필자는 경력과 자격증 란에 무얼 쓰냐며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이다. 자기소개서는 칸을 채울 수라도 있지. 경력이라고는 나고 자라며 학교 다닌 것뿐이고, 자격증은 제발 인권도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 인권 되게 소중한데, 왜 몰라 주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필자가 쓴 다이어리를 펼쳐 보면, 프리노트에 써둔 4년간의 대학 생활 계획표가 있다. 지금 보면 학기 다 밀고 1학년부터 다시 살아야겠구나 싶다. 컴활, 한자, 영어, 중국어, 한국어, 한국사, 공모전, 인턴, 연구보조 등 없는 게 없다. 와중에 학점까지 챙기잔다. 꾸준한 운동과 다양한 취미생활은 덤이다. 참 가지가지한다.(여러 가지를 챙기려 한다는, 좋은 의미에서 쓴 말이다.) 종교가 있었다면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자고 쓰여있을 판이다. 대학 생활을 마쳐가는 입장에서 새내기 시절의 계획표를 보고 있노라면, 판타지가 따로 없다.


계획표에 써진 것들 중 무엇을 이루었냐 묻는다면, 컴활이랑 영어 정도다. 솔직히 말해 영어는 어려서부터 시험 영어에 길들여진 탓에 점수를 쉽게 딴 것이지, 절대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컴활은 분명 1급 하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는 실기 공부에 소홀해서 2급을 땄다. 게다가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지인들은 컴활만큼 쓸모없는 게 없다고 한다. 중국어나 열심히 할 걸.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새내기가 있다면, 어학 공부를 적극 권한다. 취업 때문만이 아니라, 언어는 살아가면서 언제 어디서든 쓰인다. 절대 썩혀둘 일 없다.


학점은 챙겼냐 묻는다면, 그마저 평범하다. 쉽게 말해 지금의 필자는 취업하기 글렀다. 취업할 자신이 없어서 취업 준비도 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학교를 다시 다니고 싶다. 어른들이 맨날 학생일 때가 제일 좋다더니, 취직은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알겠다. 역시 학생이 짱이다. 시험 치고 과제하는 게 직장 다니는 것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낫다.(그래도 팀플은 싫다.) 매일같이 취업 미룰 궁리만 한다.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는 둥 잠재력 대신에 잠과 재력을 따로 달라는 둥의 우스갯소리에 마냥 웃지도 못한다. 일을 안 하니까.


청년 실업이 어느 순간부터 해결되지 않는 숙제가 되어 버린 것을 보면,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기회가 된다면 취직하고 싶어 한다. 근로자가 되어 당당한 납세자가 되기를 모두가 꿈꾼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굉장히 독특한 현상이다. 백 년 전만 해도 노동자들은 천하게 여겨졌다. 영국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아들이 없어 재산을 상속받게 된 매튜가 백작이 되어도 변호사로서 계속 일을 하겠다고 하자, 다른 등장인물들은 탐탁지 않게 여긴다. 게다가 인간은 원래 일보다는 휴식을 좋아하는 동물이다. 왜 우리는 본능에 반하는 욕구를 갖게 되었을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대가 잃을 것은 쇠사슬뿐, 그대가 얻을 것은 온 세계이다." 1848년 2월 세상을 뒤흔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 집필한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다. 해당 책을 읽어보지 않았어도 대다수가 알고 있는 문장일 것이다. 이제는 정말 계급이 사라지고, 프롤레타리아들의 세상이 되었다. 문제는 인간에게 계급 사회를 이루는 것이 본능이라는 사실이다. 계급의 자리는 계층이 대신했다. 계층을 나누는 기준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새로운 쇠사슬을 만들어낸 것이다!


계급이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은 적어도 그 존재만큼은 평등하다.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듯, 인간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문제는 법 앞에서만 평등하다.(사실 법 앞에서도 아주 평등하지는 않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사람은 살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여기에 자본주의가 더해지면서 벌어진 일은, 현대식 계급인 계층의 기준으로 돈이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주 많이 벌 필요는 없지만, 너무 적게 벌어서도 안 된다. 돈벌이는 사람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었다.


사회학적으로 계층은 재산, 지위, 신분으로 결정된다. <다운튼 애비>에서 매튜가 계속 일하고 싶다던 직업인 변호사는 지금에 와서는 벌이도 괜찮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전문직이다. 만민이 프롤레타리아가 된 사회에서 우리는 이제 명함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당연히 명함도 없는 백수가 가장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받는다. '취업 시장'이라는 표현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 시장 안에서 인간은 상품으로서 품질 등급이 매겨지고, 이력서는 품질 보증서가 된다. 취업 성형이 과하다고 생각되는가? 애초에 정말 이상한 것은 무얼까.


'대2병'이라는 단어가 있다. 자신을 세상의 주인공으로 여기는 '중2병'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병이다. 수험생은 간판 좋은 대학만을 바라보고 달린다. OO대생이라는 타이틀만을 위해 공부한 학생들 중에 진정으로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고민을 해본 친구가 몇이나 될까. 그 누구도 학생들에게 무얼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 성적으로 어느 대학을 갈 수 있는지만 물었다. 대2병에 걸린 학생들은 앞으로 무얼 하고 살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진다.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다고 여기기도 한다.


필자도 대2병을 겪었다. 그 시절의 필자는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일했다. 평범해서는 그 어느 직장에서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열심히 산다고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았다. 불면증과 식욕 부진으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져 건강 상태가 엉망이었다. 더 엉망인 것은 필자의 정신 상태였다. 매주 병원을 들락날락하면서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체력과 의지력을 탓했다. 이 정도도 못 버텨서 어디에 취업이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고3 이후로 가장 열심히 산 시기인데 말이다.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해결해 주었던 것 같다. 지금의 필자는 당연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취업은 하고 싶다. 하지만 번지르르한 명함을 위해서가 아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고 경험을 쌓으며 노력할 것이다. 물론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 실패자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대단한 직장에서 일하지 않아도, 하고 싶던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예 일을 하지 않아도 사람의 가치는 전혀 깎이지 않는다. 인간의 가치가 노동으로 매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평범한 사람이란 없다. 모두가 각양각색으로 특별하다. 보기에 특별할 것 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소득이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아도, 누군가는 자신을 필요로 한다. 사람은 노동과 상관없이 그 존재만으로 가치를 지닌다. 직업은 그저 자신의 가치가 표출되는 다양한 창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창구는 취미 생활, 봉사 활동, 가족들과의 시간, 친구들과의 만남 등 사람이 하는 모든 활동들이 될 수 있다. 자격증도 필요 없다. 그저 사람이면 된다. 당신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 있는 존재다.


영어 공부를 하다 보면 자꾸만 헷갈리는 네 단어가 있다. invalueable, valueless, priceless, worthless. 접두사 'in-'과 접미사 '-less' 때문에 모두 가치가 없다는 뜻을 가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단어들도 있다. valueless와 worthless는 실제로 무가치하다는 뜻인 반면, invalueable과 priceless는 너무 귀중하여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도 네 단어의 뜻을 확인하고 왔다. 무가치하다는 것과 가치를 함부로 책정할 수도 없다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데, 자꾸만 헷갈린다. 잘못 쓸까 봐 겁날 정도다.


위의 사실들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남들이 모른다고 생각해서 필자가 아는 체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잊는다. 자신이 존재만으로 가치 있는 사람임을 잊는다. 사실 이 글은 자꾸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버리는 필자 스스로를 위한 글이다. valueless하거나 worthless한 것이 아니라, invalueable하고 priceless하다는 사실을 헷갈리지 않기 위한 글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헷갈리지 않기를 바란다.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소중한 당신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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