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ESTJ일까요?
얼마 전 SNS에서 MBTI를 응용한 유머가 유행했다. 유형별로 지옥에 가는 이유, 감옥에서의 생활, 해리포터 기숙사 등 재미있는 추측들이 다양하게 있다. 흥미가 생겨 친구들과 함께 있는 메신저 방에 몇 번 실어 나르니, 친구들도 어디선가 웃긴 내용의 추측글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우스갯소리로 소개팅에 나가서도 MBTI부터 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필자는 한때 MBTI 신봉자였다. MBTI 테스트의 이론적 기반인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니 절대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MBTI 결과지와 분석글을 엄청 읽고 살았다. MBTI에 대해 웹서핑을 하다 보면 대다수가 알고 있는 결과지 이상으로 별 내용이 다 있다. 얼마 전에는 유형별로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범성애자와 무성애자 비율을 조사한 연구를 찾았다. 유형이 같은 혹은 다른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일 때, 친구일 때, 가족일 때, 동료일 때, 사제간일 때 등등을 분석한 글도 있다. MBTI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제목에도 언급한 것처럼 필자는 ESTJ다. MBTI에 관심 가져본 사람이라면 금방 필자에 대한 추측을 하지 않을까 싶다. ESTJ는 결과지를 봐도 크게 튀는 인간상은 아니다. 사업가 혹은 행정가 유형으로 불리는 만큼 사회 안정에 힘쓰며,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목표 의식이 강하다. 이렇게만 보면 무슨 일이든 잘하겠다 싶겠지만, 대표적인 단점을 꼽아보자면 융통성이 없다. 쉽게 말해 보수적이다. (정치적 발언이 아니다.) 이 보수적인 성향이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ESTJ라는 결과를 처음으로 받은 기억은 중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간다.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한 이유는, 반에서 유일한 ESTJ였기 때문이다. 결과지를 받아보니 상황은 더 재밌어졌다. 자기소개서 대신에 결과지를 제출해도 될 만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이, 어머니께서 첫 문장을 읽자마자 말 그대로 박장대소하시더니 액자에 넣어 벽에 걸자고까지 하셨다. 그 첫 문장은 “걸음이 빠르고 말이 빠르다”였다. 필자는 지금도 여전히 걸음이 빠르고 말이 빠르다.
머릿속에서 불순한 생각을 지우기.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전통적인 직업 갖기. 기꺼이 사람들을 돕고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기. 남들이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일 도맡기. 지극히 합리적이고 설명 가능한 감정만을 갖기.
MBTI 유머 중 ESTJ를 흉내 내는 법으로 퍼지고 있는 글이다.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딱 맞다. 불순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며, 남들이 보기에도 안정적인 직업을 원한다. 도움에 대한 대가를 부담스러워하며 남들이 어려워하는 일을 완벽하게 해냈을 때 쾌감을 느낀다. 마지막 문장이 압권이다. 설명 안 되는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실제로 필자는 위에 쓰인 그대로다. 적어도 남들 앞에서는 말이다. 여기서의 남이란 필자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의미한다. 즉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도 포함된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필자가 ESTJ의 현신이나 다름없다는 데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해 가지던 일종의 믿음과도 같았다. 남들이 보기에 냉철하고 정 없어 보일 수 있지만, 필자는 ESTJ라는 유형에 만족감을 느꼈다. 스스로를 정의하는 다양한 수식어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건 대학에 진학한 후다. 사실 지난 글(https://brunch.co.kr/@fanatic/21)에서 설명했던 대2병이 왔을 때와 시기가 맞물린다. 진지하게 진로 고민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살펴보게 되었다.
나는 정말 이해타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인가?
대2병이 왔을 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을 던지게 된 계기는 필자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다. 혼자 있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나’가 튀어나왔다. 생산적이지 않은 공상에 빠지고, 눈물이 많아졌다. 보는 눈이 있으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면서, 극장에만 가면 암전 속에서 정신없이 쏟아냈다. 학교에서 인문대 강의를 수강하면서 인정했다. 필자는 쓸 데 없는 생각과 감정을 많이 안고 살아간다. ‘나답지 않은’ 모습이다.
‘나답지 않은 나’라니, 웃기지 않은가. 그날부로 스스로를 옥죄던 사슬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스스로를 단호하게 정의 내리지 않기로 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을 수 없고, 내일의 나도 예측할 수 없다. 데카르트적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니 삶이 편해졌다. ‘나답지 않은’ 모습에 더 이상 스트레스받지 않았다. 그 어떤 행동도 ‘나답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남들 앞에서는 ESTJ라는 옷을 입지만,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솔직해지고자 노력하기로 했다. 그 결심은 여전히 유효하여 필자의 블로그 제목은 <나답게>다.
사람은 한 사회 안에서 반드시 사회화를 겪게 되어 있다. 당신의 MBTI 유형은 어쩌면 사회화의 결과일지 모른다. 실제로 사회 안정 도모에 기여하는 유형들이 한 사회 안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MBTI는 심리학의 민간신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간을 16가지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결함을 내포할 수밖에 없어 전문가들도 그저 참고하기만을 권한다. 그러니 자신의 유형이 바뀌었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맞는 유형이 없다고 기분 상해할 필요도 없다.
‘나답지 않다’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는가? 오랜 시간 본인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나 오해 때문일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기 어려운가? 이 세상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쉼표들과 더불어 종종 물음표와 느낌표를 마주하는 것, 그게 자아 탐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