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이 정도면 운명이다
그는 전기기사다.
그를 처음 만날 때 나는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였다.
사는 지역, 회사, 다녔던 학교... 국적까지 우리는 다르다. 그래서 우리를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다.
"두 분 어떻게 만나셨나요?"
중국요리를 잘하는 엄마가 김밥집에서 일을 하신다.
그리고 그 김밥집 단골손님 중 한 명이 그다.
어느 날인가 엄마가 다른 단골손님에게 말을 걸듯이 그에게도 말을 걸었다.
"니는 아가 몇 살이고?"
그렇게 시작한 대화로 엄마는 그의 나이, 가족 구성원... 월급까지 파헤치고 넌지시 그와 나에게 작업을 걸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만나보지 않겠냐고. 그는 그의 방식대로 음료수 한 박스를 엄마에게 사드리며 좋게 봐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엄마는 거절을 알아채지 못하고 한 주만 더 생각해 보라고 대시했다. 월급을 단골집 이모에게 말해준 남자면 내 기준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한 달 동안 거절한 나에게 엄마는 울화통이 터졌다.
"니는 엄마 말 한 번 들어준 적이나 있나?"
그렇게 우리는 마지못해 연락하게 되었다. 만남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주중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았다. 한창 코로나 시국이라 10시까지 영업제한이 있을 때었다.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면서 내 성격에 맞지도 않은 화장부터 멈췄다. 한창 개량한 한복바지에 빠져 있어서 '소개팅'하기로 한 날도 나는 한복 바지에 운동복 반팔을 입었다. 편한 복장을 입어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고 나는 정말 있는 그대로 '소개팅'을 나갔다. 고맙게도 늦게 퇴근하는 나를 배려해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는 나에게 그는 약속시간 정시에 전화를 걸었다. 나중에 그에게 들은 얘기지만, 빨간 한복바지, 굵은 여자 목소리에 그는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취향이 참 독특하다. 둘 다 기대 없이 만난 저녁치고 대화는 계속 이어져갔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 한잔 하자는 그의 말에 커피까지 마셨다. 카페에서 그는 가족에서 느끼는 갈등과 고민을 털어놨다. 나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많았던지라 연인이 아닌 또 한 명의 찐친이 생기겠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그의 친구 두 명이 우리의 약속 장소 근처에서 그가 빨리 끝나고 합류하도록 기다렸는데 결국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갔다. 우리는 10시까지 대화를 했고 첫 만남 이후 그에게서 바로 문자가 왔다. 주말에 또 보자고.
마침 주말에 문래동에 갈 일이 생겨서 문래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정이 일찍 끝난 나에게 그도 우리가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와서는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달라는데 부끄럽고 낯이 간지러웠다. 두 살 연하인 그에게 내가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아기자기한 가게 앞을 걸으며 우리의 대화가 끊기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러다 오디오가 겹쳤다. 주먹부터 내밀며 가위바위보! 하자는 그에게 나는 웃음이 빵 터지면서 반해버렸다.
이틀 후 세 번째 만남도 나를 배려해서 지하철을 타고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로 와줬다. 식사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그가 다니는 회사로 돌아가서 운전해서 집으로 가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회사까지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회사 아래 도착하자 그는 내리지 않고 사귀자고 고백했다. 주말에 사귀자고 고백하려던 참이라 나는 고백받는 것이 조금 어색했지만 기분 좋은 오글거림이었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연애 6개월 만에 동거를 했으면, 동거 9개월 후 혼인신고를 했고, 혼인신고 1년 후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가 된 지금 여전히 함께 시간을 보내면 유쾌하다.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그 청년 뭐가 맘에 들었어? "
"밥 먹고 입 닦은 휴지는 테이블에 절대 안 버려, 나갈 때 쓰레기통에 버리더라."
김밥집 장사 10년 넘게 해도 이렇게 야무진 청년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중국요리를 더 잘하는 엄마가 김밥집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나의 인연을 찾아주려고 그랬던 것인가 보다.
이 정도면 우리는 결국 이어질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