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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메리 Sep 17. 2022

명석한 두뇌에 그럴 리가 있나요


명석한 두뇌에 그럴 리가 있나요


남들이 보면 웃기다 생각하겠지만 어렸을 때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근거? 치사하게 뭘 그런 걸로. 하지만 내게도 작은 희망의 씨앗은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참으로 아득한 시절이지만... 학교 대표로 영재 올림피아드에 나간 적이 있다. 선정 기준은 학년에서 가장 아이큐가 높은 5명. 어린아이가 흥분에 휩싸이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올림피아드에 나간다고?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룰라 춤 연습만 하는 내가? 속으로 오바쌈바. 벌써부터 머릿속에선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두고 저울질. 아닌 척 손을 내저었지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아 나 천재 아니야? 나 진짜 천재면 어떡하지?  



아이큐가 세 자리는 되나요


나이가 들면서 슬슬 현실을 깨닫고... 나이 들수록 자기 비하가 무방비로 나를 공격해올 때가 있다. 공부하려고 책을 폈지만 졸음이 쏟아질 때. 엄마성이 박씨라고 애 이름도 박씨라고 생각할 때. 주차해놓은 지하주차장 위치를 못 찾을 때. 외우는 전화번호가 하나도 없을 때. '갔다 올게'를 나도 모르게 '갖다 올게' 라고 쓰고 있을 때.


머리를 쥐어뜯고 '와 나 진짜 바보아니야' 하다가 어느 날 밤에는 일기를 쓰며 그런 생각을 한적도 있다. 저기요. 이보세요. 아이큐가 세 자리는 되나요?    


현실 직시. 주제 파악.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현실을 깨닫을수록 그만큼 인생이 재미없어진다는데 있다. 난 더 이상 천재가 아니구나. 천재는 개뿔, 난 너무 멍청한 것 같아. 체력은 또 왜 이렇게 안 좋아. 피부도 진작부터 관리 좀 할걸. 나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을까.


스타트업에 있을 때는 명실상부 내가 에이스였는데 대기업에 오니 다들 날고 기는 것만 같고. 내가 부족한 점만 보이고, 그러다 보니 아등바등 사는데도 계속 부족한 느낌이 들어 힘들기도 했다.


풀이 죽은 어느 날.


내가 천재라 믿었던 시절의 룰라 노래를 틀어놓고

정말 쥐어짜듯 온갖 기록을 나열해봤다.



- 초등학교 때 영재 올림피아드 나간 적 있음. 명석한 두뇌, 천재의 탄생!

- 고등학교 때 학교 대표로 국어 경시대회 나간 적 있음. 언어천재, 분당의 주시경!

- 고등학교 때 교지에 웃기는 애로 인기투표 학년 1위 기록. 타고난 유머감각, 예능인의 경지!

- 대학생 때 시 대표로 선발되어 퀴즈대회 나간 적 있음. 상식의 귀재, 르네상스형 인간!

- 대학생 때 사이코드라마 교양수업에서 무당연기로 좌중을 뒤집어놓음. A+? 당연함.

....


대학 때 받은 A+의 기억부터, 직장 생활하며 '잘했다'라고 칭찬받은 모든 순간들, 친구들이 지나가듯 '너 이거 잘한다' 고 얘기했던 기억까지... 어차피 긴 인생 무언가를 배우고 좌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야 하는 게 인생이라면 '아이큐가 세 자리는 되나요?' 라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은 멈춰야만 했다.




천재가 아니고 남보다 뛰어나지 않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 단순한 문장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숱하게 '나 이거 못하네'를 인식하며 살아왔던가. 하지만 살아오면서 분명 '잘한다' 인정받는 일이 있었고 그것을 스스로 기억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오늘도 책을 펼치고 이거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한숨이 푹푹 난다. 답답하고 부족하고 '나는 안될  같아' 하는 좌절감에 휩싸이는 날들.    거야, 해봤자 되겠니, 너무 나이가 들었어...  안의 부정이 나를 갉아먹을 때마다 나는 11살의  흥분감 가득하던 소녀를 불러내 마주할 것이다. ‘못할  같다고? 말도 안돼. 명석한 두뇌에 그럴 리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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