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짱에서의 첫날, 그리고 키링

키링 다이어리 1 - 베트남 나짱(Nha Trang)

by 석류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짱의 날씨는 맑기만 했다. 그러나 내가 베트남에 도착하자 거짓말 같게도 일기예보는 비 표시와 함께 흐려져 있었다. 마치 내가 비구름을 몰고 온 것처럼. 날씨도 날씨였지만, 10시간이 걸린다던 슬리핑 버스도 나를 약 올리듯 여덟 시간 만에 날 나짱에 내려주었다. 도착 예정시간은 오전 여덟 시 반이었는데, 도착하니 새벽 여섯 시 반이었다. 선배네 집에 묵기로 했기에 일찍 가도 되는지, 아니면 근처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연락을 해야 되는지 당황한 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연락이나 해보자 싶어서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금세 답장이 왔다.


‘지금 와도 돼.’


그 순간,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든든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터미널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서 있는 택시에 짐을 싣고 선배네 집으로 향했다. 해는 떠 있었지만 새벽이기에 다들 아직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부지런히 새벽부터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바다와 함께 아침을 여는 사람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한국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아침이 있는 삶이 내 눈앞에 있었다. 부러움에 괜히 마음이 꿀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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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집에 도착하고 얼마 후, 하늘이 맥주라도 실컷 마셨는지 비를 열심히 쏟아냈다. 비 오는 바다를 물끄러미 구경하는데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 ‘내가 나짱을 뜰 때까지 계속 비가 오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내 걱정을 알아차린 걸까. 하늘이 이제 더 이상 화장실이 급하지 않은지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맑아진 하늘과 일기예보를 번갈아보다가 선배의 나갈까?라는 말에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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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0007.JPG 나짱의 바다는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짱에 와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맑은 바다. 비가 내릴 때도 나름의 운치가 있긴 했지만, 맑은 바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너무 아름다웠다. 투명한 블루 사파이어 같은 색감의 바다가 나에게 ‘어서 와. 여긴 나짱이야.’라고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바다에게 대답했다. 그래, 너 짱이야. 너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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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바다는 조금 있다가 더 보기로 하고, 나짱센터에 가기로 했다. 키링을 사기 위해서였다. 센터에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원체 더운 걸 싫어하는지라 에어컨 바람을 쐬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상쾌해진 기분 너머에는 설렘도 피어났다. 어떤 키링이 나를 반겨줄지 기대됐으니까. 첫 번째로 발견한 곳에서 만난 키링은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을 예쁘게 바느질한 키링이었다. 해마와 코끼리가 예뻐서 살까 고민하는데, 선배가 다른데도 키링이 있다고 해서 둘러보고 온 뒤에 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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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가게에서 키링을 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두 번째로 간 가게에서 발견한 키링에게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언제든 꺼내보면 베트남에서 산거란 걸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베트남스러운 느낌의 키링들. 돈 모양의 키링,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 키링, 메콩강 느낌의 키링까지. 이거다! 싶어서 당장 키링을 구입했다. 다른 종류의 키링들도 있었지만 별로 예쁘지 않아서 내 눈길을 사로잡지 못했다. 내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 키링들이 아쉬웠는지 점원이 계속 다른 키링을 추천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신이 추천한 키링을 거들떠도 안보는 내가 야속했던지 점원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시무룩해하는 점원이 안타까웠지만, 사기에는 그 키링은 도무지 끌리지 않았다. 나짱까지 와서 스포츠카 모양의 키링을 사는 건 너무 임팩트가 없으니까.


IMG_0184.JPG 아오자이를 입은 뒷모습이 아름다웠던 키링.
IMG_0186.JPG 환율로 따지면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일 20,000만동 모양의 키링.
IMG_0187.JPG 메콩강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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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링들을 가방에 고이 모셔놓고 바다로 다시 나갔다. 터벅터벅 바다를 걷는데 슬리퍼 안에 스며들어 자글자글하게 밟히는 모래의 느낌이 좋았다. 온몸으로 바다를 느끼는 기분. 입가에 자동적으로 미소가 번졌다. 바다는 다 좋지만, 나짱의 바다는 더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두근거렸다. 아, 사랑에 빠질 것만 같다. 이 바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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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바닷가에 오면 해산물을 먹어야 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저녁으로 선배네 집 근처 해산물 가게에 갔다. 새우 버터구이와 타이거 맥주를 시켜먹었는데 껍질 채 먹어도 부드럽고, 껍질을 벗겨도 버터의 풍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버터구이에 선택을 잘했구나 라고 생각했다. 버터구이가 양이 작아서 이번에는 직접 수족관을 보며 해산물을 고르기로 했다. 메뉴판만 볼 때는 몰랐는데, 세상에. 이렇게 큰 소라가 있다니. 기존에 봐왔던 소라가 미니어처처럼 느껴질 정도로 초대형 소라가 물이 담긴 양동이 안에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소라뿐만 아니라 조개도 부채 크기 정도의 사이즈가 떡하니 담겨있었다. 놀라움에 넋을 잃고 구경하다 배가 얼른 음식을 달라고 졸라서 그나마 익숙하게 느껴지는 홍합을 먹기로 했다. 홍합찜을 시켰는데, 한국에서 먹던 홍합찜과는 다른 색감에 잠시 이질감을 느꼈다. 초록 초록한 느낌. 국물을 살짝 떠먹어 보았는데, 묘한 맛이었다. 이름 모를 향이 입 안 가득 퍼지는데, 그 맛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계속 국물을 떠먹었다. 국물에 비해 홍합의 맛은 한국과 별 다를 바 없었고. 어쨌든 성공적이었다, 해산물 디너 타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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