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짱. 다음에 또 만나

키링 다이어리 2 - 베트남 나짱(Nha Trang)

by 석류

나짱에서의 둘째 날. 어제보다 하늘이 맥주를 더 많이 마셨나 보다. 아니, 이건 뭐 설사 수준인가? 엄청난 폭우가 새벽부터 쏟아졌다. 비몽사몽간에 열려있던 창문을 닫으려고 다가갔는데, 잠이 와서 몽롱해서인지 잘 닫히지 않았다. 언제 왔는지 내 옆에는 선배가 있었고, 선배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창문을 닫았다. 창문이 달칵- 하고 닫기는 소리에 안심하고 다시 드러누웠다. 아무리 이곳의 아침이 새벽부터 시작된다지만, 비가 새벽에 깨우는 건 반칙이야. 창문을 계속 두들기는 빗소리를 수면제 삼아 다시 나는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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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멎어들 때쯤, 잠이 깼다. 어제와 똑같은 패턴의 날씨.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하늘은 맑았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화창했다. 일기예보에도 해 표시가 가득 떠 있었다. 온전히 맑은 나짱을 하루 종일 즐길 수 있겠구나 싶어서 신이 났다. 오늘의 나의 미션은 바닷가에서 젬베 치며 맥주 마시기. 한국에서 미니 젬베를 들고 온지라 그걸 두들기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상태였다. 어깨에 젬베를 메고 선배와 함께 바닷가로 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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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맑디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는 천상의 기분에 젖어들게 했다.


나짱의 핫한 곳 중 하나라는 세일링 클럽 앞 바닷가 파라솔에 자리를 잡았다. 선배는 물에 들어가고, 나는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틀어놓고 젬베를 쳤다. 내가 바라던 로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행복했다.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파도소리와 화음을 맞춰 젬베가 통통거리는 소리를 냈다. 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내 표정. 지상 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행복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인지. 근 이 년간 이런 느긋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열심히 여행은 많이 다녔지만, 이번만큼의 여유로움은 없었다. 일을 하느라 일정을 짧게 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짱 바다에게 고마웠다. 날 자유롭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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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한 가격에 직접 양조한 맥주를 맛볼 수 있어서 좋았던 루이지안.


해가 저물고, 저녁으로 루이지안이라는 바닷가 앞에 위치한 야외 레스토랑에 갔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네 가지 맛의 맥주. 직접 가게에서 양조한 맥주라고 해서 기대감이 컸다. 파도소리를 벗 삼아 마시는 네 가지의 맥주는 나를 더 들뜨게 했다. 조금씩 맥주 기운이 오를 때쯤, 라이브 공연이 시작됐다. 젬베를 다시 가지고 나올 걸 싶었다. 넘치는 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음악 소리에 맞춰서 뭐라도 두들기고 싶었다. 공연은 너무 즐거웠고, 이곳에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 뭐 있나. 이런 게 바로 행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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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안에서 저녁을 먹고, 중심가 쪽에 위치한 루프 탑 바에 갔다. 내가 이틀간 봐왔던 나짱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곳이었다. 빨간 등이 천장 가득 대롱대롱 매달려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담배연기가 안개처럼 퍼지는 게 마치, 마작을 하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랄까. 아쉽게도 칵테일 맛은 너무도 달았지만, 몽롱한 그 분위기에 녹아드는 기분에 빵빵하게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붕 떠올랐다. 아아, 무언가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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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이라고 불리는 호랑이연고. 베트남판은 내가 생각한 호랑이 연고의 생김새와는 좀 달랐다.


나짱의 마지막 날, 오늘은 웬일로 오전에 비가 오지 않았다. 다들 바다로 나가고, 나는 반미를 먹고 근처의 주스 집에서 느긋하게 머물고 있을 참이었다. 선배가 추천해준 반미가 맛있다는 데를 찾아 헤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배도 고프고 내가 길을 잘 못 든 건가? 싶어서 반미는 우선 접어두고 주변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밀크티와 샌드위치를 시켰다. 얇게 썬 슬라이스 햄과 래핑카우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였는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치즈 맛이 강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주스 집으로 향했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전날 빨갛게 익었던 다리가 따끔따끔 아파오기 시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 근육이 당기는 느낌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약이 필요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호랑이 연고가 스쳤다. 임시방편으로 호랑이 연고를 주스 집 주변의 잡화점에서 구입하고 발랐다. 바르고 나니 땡김은 덜했지만, 파스를 바른 듯 매운 기운이 확 올라왔다. 아직 여행이 많이 남았는데 다리가 이 모양이라 무사히 여행을 잘 마칠 수 있을지 걱정 감이 밀려왔다. 한숨을 쉬며 멍하니 주스를 마시고 있는데, 바닷가에 나갔던 선배가 돌아왔다. 여기 계속 앉아있어 봤자 다리만 아플 뿐 별다른 묘수도 없기에 선배네 집으로 나도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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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네 집에 들어서고 잠시 후, 태풍을 연상케 하는 바람이 불었다. 어찌나 바람이 거세게 불던지 드론을 날리려고 나간다던 선배의 남편은 도저히 날릴 수 없겠다며 드론 날리는 걸 포기했을 정도였다. 바람 때문에 선배와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앉아 있는데, 문득 다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걸 깨달았다. 호랑이 연고의 효과가 발휘된 건지, 아니면 맥주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리가 아프지 않아서 한시름 놓았다. 오늘 밤에 다시 호치민으로 돌아가는 슬리핑 버스를 타기로 했기에,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선배가 ‘오토바이 타고 한 바퀴 돌고 올까?’라고 물어서 단번에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선배의 오토바이 뒷자리. 바람을 가르는 수많은 오토바이의 행렬 속에 그렇게 우리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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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사탕수수를 뽑아내는 건 성능이 좋은 기계만 가능하다고 하다. 아저씨, 제 사진 걸어놔도 되니까 앞으로도 지금처럼 쭉쭉 사탕수수 한 번에 뽑으시기를 바랄게요.


반미를 아침에 먹지 못했다니까 반미 괜찮은 데를 찾아보자며 선배는 계속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려도 괜찮은 반미 가게가 보이지 않아서 사탕수수 주스나 마시기로 했다. 사탕수수를 한창 마시는데 가게 주인아저씨가 내 머리가 특이했던지 사진을 찍어갔다. 하긴, 나도 나짱에서 나 같은 머리를 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핫핑크 색의 머리가 독특하긴 독특하니까.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찍힌 저 사진을 이제 이 가게의 홍보 사진으로 쓰는 거 아니냐며 키득거렸다. 우리 집에 핫핑크 머리가 다녀갔어! 그런 걸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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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만큼이나 음식맛도 일품이었던 LANTERNS. 다음에 가면 또 들르리라 마음 먹었다.


사탕수수 주스를 마시고 다시 선배네 집으로 돌아가서, 선배 남편과 셋이서 나짱에서의 최후의 만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우리가 간 가게는 LANTERNS. 인기가 많은 가게였는지, 웨이팅이 길었다. 긴 웨이팅 끝에 가게에 들어섰는데 웨이팅이 전혀 아깝지 않은 맛이었다. 내가 먹은 메뉴는 파인애플 보트. 파인애플 속을 파고 그 안에 잘 볶아진 고기와 야채들이 들어 가있는 메뉴였다. 어찌나 맛있던지 흡입 수준으로 와구와구 먹었다. 완벽한 마무리. 행복한 저녁. 나짱에서의 마지막을 그렇게 마무리하고, 나는 호치민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안녕, 나짱. 다음에 다시 또 만나자. 그때는 내게 해맑은 표정들만 보여주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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