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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밤은 빠르게 저문다

키링 다이어리 20 - 라오스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by 석류



따로 간판이 없는 카오소이 가게. 처음엔 모르고 지나쳐가기도 했다.



방비엥에서 까오삐약이 제일로 유명하다면, 루앙프라방은 단연 카오소이다. 이름처럼 된장이 듬뿍 들어간 짭짤한 쌀국수. 꽝시까지 함께했던 봉수와 준호가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낍을 사용해 모두에게 카오소이를 쐈고, 그 호의에 걸맞게 한 그릇을 뚝딱 비운 나. 라오스에서 먹은 것 중 처음으로 싹싹 그릇의 밑 부분까지 비운 음식이었다.



“언니가 다 먹는 거 처음 봐요.”



라오스 여행에서 유일하게 전부 다 클리어한 카오소이. 버무려진 된장소스속에 고기들이 숨어있다.


흡입하듯 카오소이를 후루룩 먹어버린 내 모습이 신기했던지 주빈이가 말했다. 나도 내가 신기했다. 가리는 음식은 없지만, 위장이 크지 않아서 다 비우는 음식은 드물었으니까. 그 정도로 맛있었다. 아직도 루앙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카오소이일만큼.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베트남으로 떠났고, 나는 주빈이와 수정이와 함께 숙소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쐰 후 일몰을 보러 움직였다. 날씨가 좋아서 일몰이 잘 보일 것 같다. 푸시산의 일몰은 얼마나 황홀할까 싶어서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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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산은 야시장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올라가는 계단이 많아서 힘들었다. 성산일출봉을 오를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보기보다 힘든 코스. 꼭대기까지 오르고 나니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탈진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일몰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푸시산에서 바라보는 메콩강.
푸시산에서 바라본 루앙프라방. 마을의 모습이 아름답다.


푸시산의 정면은 큼지막하게 메콩강이 흐르는 모습이 보이고, 뒤편은 옹기종기 레고 블록처럼 모인 마을의 전경이 보였다. 기대했던 일몰은 구름에 가려져 붉은빛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탁 트인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루앙에 와야 할 핑계도 덕분에 하나 더 생겼고. 다음번에 루앙에 오게 되면 그때는 꼭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의 자태를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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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방송에도 나온 만낍 뷔페. 이름은 만낍이지만, 가격은 만 오천낍이다.



푸시산에서 내려와 저녁을 해결할 겸 야시장에 들어섰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들을 그릇 하나에 담아 먹는 만낍 뷔페에 도전. 이름은 만낍이었지만 정작 가격은 만 오천낍이었다. 각자 그릇을 들고 음식들을 담는데 딱히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 없어서, 나는 과일류로 그릇을 가득 채웠다. 입맛을 잃었는지, 과일들도 잘 넘어가지 않아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만약 누군가 내게 만낍 뷔페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딱 가성비만큼이라고. 만 오천낍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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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으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느낌인데, 어느새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여유를 갖고 움직이고 싶었다. 그래서 늦잠을 자기로 했다. 애들도 다들 잠이 부족했는지, 늦잠을 자자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덕분에 라오스에 와서 처음으로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쾌거를 이루었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점심시간이었다. 애들은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고 싶다고 했고, 도보를 좋아하는 나는 자전거를 빌리지 않고 도보로 움직이기로 했다. 루앙에 오기 전 미리 봐 두었던 로젤라라는 가게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는데, 애석하게도 로젤라는 저녁만 장사를 하는지 다섯 시에 연다고 적혀있었다. 우리처럼 점심을 먹기 위해 로젤라로 온 외국인 무리도 닫힌 로젤라를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이 로젤라는 저녁 타임으로 패스. 로젤라 대신 왓씨앙통도 볼 겸 왓씨앙통 근처에 자리한 까오삐약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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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쭉한 국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을 까오삐약.



방비엥의 까오삐약집과 다르게 루앙의 까오삐약집은 누룽지를 넣어먹는 점이 달랐다. 국물의 맛도 달랐고. 방비엥이 해장 느낌의 국물이라면, 이곳의 국물은 닭백숙을 먹는 것처럼 걸쭉했다. 걸쭉한 국물을 한 가득 들이키고 나니 속이 든든해졌다. 뱃속이 든든해졌으니 소화를 위해 다시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었다. 배를 한 번 문지르곤 자리에서 일어나 왓씨앙통을 향해 걸었다. 자전거를 타고 먼저 앞서가던 아이들은 내가 혹시나 뒤처질까 봐 최대한 내 보폭에 맞춰 달려주었다. 그 사소한 배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둘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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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씨앙통의 트레이드 마크, 생명의 나무 모자이크.
왓씨앙통에는 이런 곳들이 여러군데 있다.
규모가 커서 둘러보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온통 금빛 천지였던 왓씨앙통.


왓씨앙통은 규모는 컸지만, 더 웅장할 것 같다고 예상한 내 생각보단 소소했다. 마치 성당에나 있을 법한 글라스데코식의 알록달록한 조각들은 미술시간이 생각나서 귀여웠다. 그러나, 금빛으로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니 섬뜩했다.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나름대로 그림들을 머릿속으로 해석하며 보다 보니 등골이 오싹했다.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적나라한 제사의 모습이라니. 이 그림을 그려 넣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림들을 그려 넣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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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씨앙통 구경을 마치고, 아이들은 자전거로 루앙을 한 바퀴 돌겠다고 했고 나는 시크릿라군에서 함께했던 은주 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은주 언니도 루앙에 넘어와 있다고 했기 때문에. 야시장의 초입 부분에서 은주 언니를 만났다. 더워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은주 언니가 에어컨이 빵빵한 카페를 소개시켜줬다. 사프론이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1층은 오픈형으로 되어있었지만, 2층은 에어컨을 틀어놔서 닫힌 형태였다. 2층에 들어서자 확연하게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습기에 찌든 공기가 아닌, 쾌적하고 시원한 바람이 가득한 공기가.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에어컨도 시원했지만, 메콩강변 앞이라는 위치 또한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한창 은주 언니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저녁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들과 함께 로젤라에 가기로 했던지라 은주 언니에게도 함께 할 건지 넌지시 의견을 물었더니, 이미 선애 언니와 저녁을 먹기로 했단다. 선애 언니에게 물어보고 오케이 하면 합류하겠다고 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더니, 다행히도 다들 액티비티를 함께 했던 만큼 아는 얼굴들이어서 선애 언니도 흔쾌히 로젤라로 오겠단다. 로젤라 오픈 시간에 맞추어서 만나기로 하고, 은주 언니는 숙소로 가고 나도 잠시 쉬다가 와야겠다 싶어서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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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에서 마지막 저녁을 해결 했던 로젤라.



로젤라와 숙소가 가까운 곳에 있었던 터라 오픈 시간에 맞춰 로젤라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언니들이 왔다. 각자 다른 메뉴를 시켜서 맛보기로 하고, 주문을 했다. 로젤라의 트레이드마크라는 그린 커리, 스테이크, 레드 커리, 볶음밥, 팟타이. 음식들은 어느 하나 튀는 맛없이 다 무난했다. 음식보다 비어라오병이 더 많이 비워지고 있을 때쯤, 나는 즐겁지만 조금은 외로워졌다. 내일이면 다들 한국으로 떠나버리고, 일정이 반 이상 남은 나만 라오스에 남게 되니까. 라오스에 오기 전, 낮엔 혼자여도 밤에 맥주나 한 잔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웬만한 일정을 여럿이서 함께하니 욕심이 생겼다. 이대로 계속 여행이 끝날 때까지 누군가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욕심. 아마, 오늘이 지나면 다들 일상으로 돌아가 사진으로만 라오스를 추억하며 지내겠지. 나에게는 아직 현재 진행형인 여행이라 추억으로 남기기엔 시간이 더 필요한데 말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들은 그저 웃고 떠들며 이 시간들을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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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마치 출석체크라도 하듯이 어제와 같이 야시장에 갔다. 다들 기념품을 사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루앙을 추억할 키링을 찾아 헤맸는데 야시장의 규모에 비해 키링을 파는 곳은 생각보다 적었고 종류도 다양하지 못했다. 결국, 키링 사는 걸 포기했다. 여행 막바지에 비엔티안으로 넘어가니 그때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쉬워도 특색 없는 키링을 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기념품 쇼핑을 마친 후 언니들은 숙소로 먼저 돌아가고, 우리들도 야시장에서 안주거리를 사들고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숙소로 향했다. 이제까지의 밤과 다르게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깊숙이 박힌터라 괜히 기운이 빠졌다.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맥주만 힘없이 마시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아이들의 눈빛에는 걱정 감이 어렸다. 며칠 동안 동고동락하며 두 사람에게 누구보다 정이 많이 들어버려서 정말 헤어지기 싫었다. 그러나, 떠날 사람은 떠나야 하니 보내야 한다. 내 마음도 모른 채 아쉬움만 가득한 루앙프라방의 마지막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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