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다이어리 21 - 라오스 방비엥(Vang Vieng)
루앙을 떠나야 하는 날이 되었다. 사실, 루앙에 더 머물러도 되지만 루앙에서 갈 곳들을 다 가보았고 흥을 흩뿌릴 수 있는 방비엥이 그리웠기에 방비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떠나기 전 아직 탁발을 보지 못한 수정이와 마지막으로 탁발을 한 번 더 경험하기로 한 주빈이와 은주 언니와 함께 탁발 타임을 가졌다. 어리바리하게 탁발을 했던 며칠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훨씬 능숙하게 탁발을 하고 행렬들을 구경했다. 고요한 루앙의 새벽 거리를 수놓는 스님의 걸음과 스님들이 받은 탁발을 나누어주길 기다리며 커다란 바구니를 앞세워 앉아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나눔의 미학이란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뭉클하게 다가왔다. 내가 가진 것을 더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것, 그것이야 말로 탁발의 참된 의미리라.
탁발 시간이 끝나고 나니 출출해져서 아침식사 겸 카오소이 가게로 갔다. 이번에도 뚝딱 카오소이 클리어 완료. 아아, 카오소이는 다시 먹어도 진리 그 자체인 것 같다. 언제 먹어도 최고다. 다음에 루앙에 오면 1일 1카오소이를 해야지. 그 정도로 나는 카오소이에 푹 빠져버렸다.
카오소이를 클리어하고 나니 짐을 꾸려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한창 숙소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경쾌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옆방에 머물던 주빈이와 수정이가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본인들의 키만큼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데 괜히 아련했다.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님을 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만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코끝이 시큰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니, 나는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여행 첫 날외엔 원고를 쓰지 못하고 덮어뒀던지라 원고나 써야겠다는 생각에 어제 은주 언니가 소개해준 사프론에 갔다. 시원한 환경에서 작업하고 싶었으니까. 태블릿을 켜고 글자들을 적어 넣는데, 조용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집중이 잘 되질 않아서 나는 틈틈이 카페 앞에 평화로이 흐르고 있는 메콩강을 보러 나갔다. 메콩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기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방비엥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다시 그 꼬불꼬불한 산길을 거쳐 갈 생각을 하니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었지만 방비엥에 가면 외롭지 않을 거라는 강렬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안녕, 루앙. 다음에 방문할 때도 지금처럼 잔잔한 분위기로 나를 반겨주길. 메콩강에게도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고 나는 방비엥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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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비엥에 도착하니 해가 져서 하늘이 시꺼맸다. 방비엥에 아직 머물고 있는 규혁이와 만나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기에, 숙소에 짐을 두고 나오기 위해 숙소로 갔더니 특이한 내 머리색 덕분인지 며칠 전에 머물렀던 사람 아니냐며 숙소 직원들이 모두 다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었다. 예상치 못한 환대에 쑥스러워져서 수줍은 표정으로 짐을 방에 두고 나오니, 원래 들어오는 입구는 잠시 공사 때문에 닫아놓는다고 늦게 들어올 때는 식당 쪽 문으로 들어오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내가 비바에서 놀고 늦게 들어오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다시 또 쑥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짐을 두고 신닷 집으로 가니 규혁이가 손을 흔들었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한국 음식 사진을 많이 보내와서 한국적인 음식이 당겨서 그나마 한국적인 느낌의 신닷에 소주나 한 잔 하기로 했다. 한국은 아니지만 방비엥에서 한국적인 느낌을 내기에는 신닷만 한 게 없다. 신닷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절묘하게도 사쿠라바 프리드링크 타임이었다. 슬슬 여행 경비가 많이 줄어들었던지라 프리드링크 타임은 우리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프리드링크를 받기 위해 사쿠라바로 달려가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아서 여유로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열심히 프리드링크를 마시는데, 어? 나와 같이 방비엥으로 넘어오는 차를 탔던 사람들을 발견했다. 둘이서 한국말을 하길래 한국인인 줄 알고 말을 걸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말을 건 사람이 중국인이어서 괜스레 머쓱해졌었는데 이렇게 보니 반가운 느낌이 든다. 두 사람 중 남자는 한국인이고, 여자만 중국인인데 남자의 이름은 승주, 여자의 이름은 설. 너무 유창하게 한국말을 해서 지금도 나는 설이가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 같다. 얼떨결에 우리는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두 사람이 원래부터 알던 사이가 아닌 태국을 여행하면서 만나서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는데, 설이가 누군가에게 손짓을 했다. 그래서 우리 테이블은 두 명에서 네 명, 그리고 여섯 명이 되었다. 새로이 합류한 사람들도 태국을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밝음의 향기가 확 퍼져서 나는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
간단히 통성명을 하고, 비바로 자리를 다 같이 옮겼는데 이럴 수가. 금요일이라고 비바도 일찍 문을 닫아버린다. 다들 정글 파티로 가란다. 처음 갔던 정글 파티의 기억이 썩 유쾌하지 않아서 정글 파티에 가기 싫었지만 딱히 방법이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다 같이 정글 파티로 이동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정글 파티를 처음 오는지라 기대감에 눈이 반짝였는데 그들도 나처럼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돌아가잔다. 정글 파티를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몇 명 모아 툭툭이를 타고 다시 방비엥 시내로 돌아오니 가게들은 다 닫아서 거리가 고요했다. 차라리 노상 맥주를 마실 걸 그랬다. 그러나 가게들도 다 닫혀있어서 맥주를 살 곳은 없었고, 우리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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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날 새벽같이 일어나 탁발을 보고, 장거리를 달려 방비엥으로 넘어와서일까. 피곤에 절어 잠들어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며칠치 숙박료를 한 번에 결제했기에 방을 비워달라는 건 아닐 텐데 대체 왜 문을 두드리는 건가 싶어서 방문을 여니 놀랍게도 방문 앞에 규혁이가 서 있었다. 어떻게 내 방을 알고 왔나 싶어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니, 내 머리색을 말하고 어디 묵는지 물어보니 바로 방 번호를 알려주더란다.
“누나, 대체 몇 시까지 자는 거예요!”
너무 연락이 없어서 찾으러 왔다나 뭐라나. 대체 몇 시길래 그러나 싶어서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얼른 준비하고 시크릿라군을 가자고 해서, 초스피드로 준비를 마치고 시크릿라군으로 갈 툭툭이를 쉐어하기 위해 방비엥인으로 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다들 시크릿라군에 가나보다. 이미 시크릿라군을 다녀와서 딱히 갈 이유는 없었지만, 어제 친해졌던 은아 언니와 태현 오빠가 시크릿라군에서 만나자고 했던 게 기억이 나서 가기로 했다. 그리고, 혼자 방비엥 시내에 남아 있는다고 해서 딱히 할 것도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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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라군에 가니 은아 언니와 태현 오빠는 이미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규혁이도 가자마자 물에 퐁당 뛰어들었고. 혼자 파라솔 아래 앉아있던 나는 고민에 빠졌다. 다시 또 온 김에 이번에는 물에 한 번 들어가 볼까라는 고민. 얼른 물에 들어오라는 손짓에 못 이겨 결국 시크릿라군에 들어갔다. 저번에 시크릿라군에 함께 왔던 사람들이 본다면 놀랄 노자일 거다. 그때는 아무리 꼬드겨도 안 들어갔으니까. 수영을 못하기에 구명조끼와 튜브에 의지해서 물에 둥둥 떠있었는데, 햇살이 너무 강렬하게 내리쬐서 튜브가 따끈따끈 수준을 넘어서서 뜨거워졌다. 더 있다가는 인간 신닷이 되겠다 싶어서 물밖에 나오니 다들 휴식을 취할 겸 나를 따라 나온다. 짧은 물놀이지만 라면을 안 먹을 수는 없지 싶어서 시크릿라군의 별미인 라면과 비어라오를 벗 삼아 먹고 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이맛에 시크릿라군에 오는 거지. 아아, 좋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