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영화관 - 대구 (4)
오오극장에서 <벌새>를 관람했다. 벌새는 1994년 14살이었던 소녀 은희에 대한 이야기이다. 1994년은 김일성도 사망하고, 성수대교도 무너진 상징적인 해다. 가부장제의 폭력이 일상적으로 느껴지던 시절이기도 했는데, 직접적으로 폭력의 장면을 묘사하지는 않지만 주인공 은희의 아버지와 오빠, 은희의 담임선생님의 말과 행동에서 마치 내가 그 폭력적인 상황에 놓인 것처럼 공감되고 아팠다.
영화를 보며 나는 계속 은희를 안아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열네 살의 소녀는 계속 사랑을 갈구했는데, 소녀에게 돌아오는 건 차가운 현실뿐이었으니까. 그나마 한결같이 은희에게 애정을 줄 것 같던 배유리가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라고 말하던 순간은 1학기와 2학기가 절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간극과도 같았다. 그 대사를 들으며 나는 심장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점은 이 영화에서 영지 선생님이라는 상당히 멋지고 아름다운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영지 선생님으로 인해 은희는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털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은희가 다니던 한문학원의 선생님인 김영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삶을 불쌍하다고 말하는 은희에게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라고 말하며 너무도 쉽게 타인의 삶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단정 지으려는 은희를 깨우쳐준다. 그런 영지 선생님이 있기에 영화를 보며 나는 희망의 빛을 보았다. 은희가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거라는 기대감도 들었다. 참 흥미로운 점은 영지와 은희 둘 다 왼손잡이라는 것이다. 단단해 보이는 그녀와 은희는 왼손으로 정갈하게 글씨를 쓴다는 점이 닮았다. 자칫 사소한 부분으로 무시될 수도 있지만,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점은 그들의 공통점이자 하나의 유대감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은희는 감자전을 자주 먹는데, 물도 마시지 않고 감자전만 먹는 모습이 아련했다. 만약 내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은희에게 물이라도 한 잔 떠주었으리라.
<벌새>는 시리고 아프지만, 참 아름다운 영화다. 2019년 최대의 행운을 꼽으라면 나는 이 작품을 만난 것을 꼽고 싶다. 벌새처럼 날갯짓을 하는 세상의 모든 은희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