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영화관, 국도 예술관 上

내가 사랑한 영화관 - 마지막 이야기 (1)

by 석류


‘내가 사랑한 영화관’의 마지막 인터뷰를 담기 위해 부산에 왔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언제나 기분 좋은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지만,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더 긴장됐다. 내가 사랑한 영화관, 국도 예술관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하니 발끝에서부터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었다. 긴장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인터뷰 장소인 씨네포크 사무실 문을 조심히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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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국도예술관 프로그래머 정진아라고 합니다.”



스무 살 무렵부터 국도 예술관을 드나들었는데, 그때는 이렇게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마주 앉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자기소개를 듣자 마음이 뭔가 벅차는 기분이었다.



골목길을 걸어 국도가 위치한 건물에 도착할 때면 마음이 언제나 설렜다.



“어떻게 국도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국도에서 어떻게 일하게 되셨나요?”

“이야기하자면 좀 긴데요. 처음부터 프로그래머로 들어온 건 아니었어요. 원래는 관객이었어요. 관객으로서 국도는 제가 좋아하던 공간이었죠. 제가 웹디자인과 사진 관련한 일을 했는데요. 국도에서 일하기 전에 일중독이 올 정도로 정말 많은 일을 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아침에 웹디자인 회사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고 다시 출근해 사진 쪽 회사에 다닐 정도였어요. 그 정도로 심한 일중독이 왔었죠. 두 군데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잠을 자는 시간도 부족해서 쪽잠으로 매일을 버티고, 쉬는 날에는 기절할 정도로 계속 잠을 자는 생활을 몇 달간 했었어요.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결국 몸에 무리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한 군데만 다니기로 하고 저녁에 다니던 회사는 그만뒀어요. 한 군데만 일하게 되니 퇴근 후에 해야 할 일이 없는 삶이 적응이 안 되고 불안하더라고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 이 시간들을 활용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쁘게 지내는 동안 극장을 한 번도 못 갔더라고요. 때마침 친구가 “부산에 네가 좋아하는 예술영화를 해주는 극장이 있는데 한 번 안 가볼래?”라고 얘기해줘서 함께 가게 됐는데, 거기가 국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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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에 갔는데 그 회차의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이 저랑 친구밖에 없었어요. 넓은 상영관에 사람이 둘 밖에 없는 느낌이 나쁘지 않고 좋더라고요. 그때부터 퇴근 후 시간에 국도를 다니기 시작했죠. 매주 월요일은 국도를 꼭 가자라는 나름의 다짐도 하고요. 어떤 영화가 있던 상관없이 매주 월요일이면 남포동으로 날아와 국도에서 영화를 봤죠. 봤던 영화들 중에 취향에 맞지 않는 것들도 있어서 지루함에 때로는 꾸벅꾸벅 졸기도 했지만, 그래도 국도에서의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고 좋았어요. 공간이 좋아지다 보니까 영화 자체는 부수적인 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국도에 걸음 하다가 매주 토요일마다 DVD 상영회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우연히 가게 됐는데, DVD 상영회에서 사람들과 알게 되고 친해지게 됐어요. 그게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네이버에 개설되어있는 국도 카페에서도 활동하게 되고, 국도 스텝들과도 알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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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국도에서 빔 벤더스 감독 특별전이 열리게 된 적이 있었어요. 기획전 홍보를 위해 포스터와 팸플릿 디자인 소스를 수정해서 인쇄소에 맡겨야 하는데,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맥에서 압축된 것도 다른 데서 열리지만, 그때는 맥에서 압축된 건 맥에서 열리는 형식이라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압축을 혹시 풀어줄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흔쾌히 압축을 풀어서 전송했는데 소스를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얼결에 제가 포스터와 팸플릿 작업도 하게 됐죠. 근데 이 소스가 많이 깨진 상태로 온 데다가 소스에 포함된 폰트가 저에게는 없어서 좀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비슷한 폰트를 찾고, 원본을 본떠서 똑같이 새로 만들었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국도에서 진행하는 기획전들이 있을 때마다 제가 디자인 부분을 담당하게 됐어요. 굿즈 같은 것도 같이 만들고요. 보수를 받고 하는 일들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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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국도의 일들을 자잘하게 도우며 지내고 있었는데, 국도가 위치한 남포동 극장 건물이 팔려서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왔어요. 국도 대표님은 수익이 나지 않으니까 극장을 접고 싶어 했지만, 많은 관객 서포터들이 계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서 접지 않고 이전으로 가닥을 잡았죠. 이전을 위해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다가 대연동으로 최종 결정되어 대연동으로 이사를 가게 됐죠. 이전을 준비하던 시기에 일하던 국도 프로그래머님이 그만두시게 되셨어요. 그래서 국도 프로그래머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렸어요. 국도는 프로그래머가 네이버 카페 운영도 겸하는 구조여서, 프로그래머님이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프로그래머님이 그만두면서 카페 운영자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라, 저에게 혹시 국도 관련 디자인 부분을 하면서 카페 매니저를 맡아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카페 매니저 정도야 뭐가 어렵겠나 싶어서 그러겠다고 했죠. 매니저를 맡게 되면서 카페에 재개관 카운트 글들을 올리곤 했는데, 재개관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이제는 카운트다운이 아닌 시간표를 올려야 할 시기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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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표를 업로드하려면 상영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어야 하는데 상영 프로그램이 하나도 짜여져 있지 않은 상태라 프로그램을 짜야했죠. 프로그램을 어떻게 짜야 하나 싶어서 대표님에게 물어봤더니 배급사에 연락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영화를 일일이 하나하나 다 찾아보고, 해당 영화를 배급하는 배급사에 전화를 걸어 영화를 배급해달라고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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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시간표 작업에 착수하면서 관객 서포터였던 웰스 삼촌, 육학년님과 어떻게 시간표를 짜야 좋을지에 대해서 매일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어요. 정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시간표를 최대한 타이트하게 짜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죠. 이전한 국도의 로비나 건물이 작다 보니 쉬는 시간이 길 필요가 없더라고요. 워낙 동선이 짧아서 10분이면 나가고 들어오고가 전부 다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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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표를 비롯해 국도에서의 일들을 많이 맡게 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회사에서도 국도 생각을 하게 되고 국도에 관한 일들에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요. 회사일이 바빴다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때마침 회사에서도 일이 많지 않던 시기여서 국도 일에 더 신경을 쓰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함께 일하던 회사의 팀장님과 업무적인 부분에서 맞지 않는 일들도 벌어져서, 회사에 대한 마음이 많이 떠났던지라 회사를 그만두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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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국도에서 자연스럽게 일을 하게 됐죠. 따지고 보면 누가 먼저 일을 하라고 제안한 것도 아니어서 월급을 받거나 그러진 못했죠. 초반에 일했던 몇 달간은 무급으로 국도 일을 도우면서, 개인적으로 들어오는 디자인 일들로 생계를 유지해나갔어요. 이러한 생활도 잠시지, 계속 이어지니 한계가 오더라고요. 한계가 와서 막막해진 시점에 국도 카운터를 보던 아르바이트생 친구가 그만두었고, 2009년 1월부터 정식으로 월급을 받고 국도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사실 페이의 측면으로 본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국도에서 일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요. 회사에서 일하면서 버는 돈에 비하면, 국도에서 일하며 받는 돈은 정말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았거든요. 그럼에도 이 일을 하게 된 건 제가 그만큼 국도를 좋아했고, 국도 일들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프로그래머라는 이름이 주는 전문성 때문에, 영화 전공자도 아닌데 이런 일을 해도 되나 라는 생각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관객으로 오랜 세월 지내온 내공이 있다는 건 다른 사람은 결코 가지지 못한 그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러한 장점을 잘 녹여내 국도를 이끌었기에, 그만큼 많은 관객들이 국도를 사랑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국도를 떠올리면 “상영 시작하겠습니다. 휴대폰은 꺼주세요.”라는 멘트가 자동적으로 떠올라요. 상당히 무난한 멘트임에도, 강렬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요. 멘트를 하지 않고, 상영을 시작하는 곳들도 많은데 상영 전에 이렇게 멘트를 덧붙이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극장은 안내 멘트를 스크린 화면에 띄우곤 하죠. 제가 일을 하게 된 당시에는 국도만의 고유한 트레일러 같은 게 없었기에 화면에 안내 멘트를 띄우려면 따로 영상을 만들어야 했어요. 그런데 굳이 화면으로 띄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목소리로 안내를 하면 괜찮겠다 싶어서, 영화 시작 전에 목소리로 안내 멘트를 하기 시작했어요. 목소리를 통해 영화 시작을 알리기 때문에 훨씬 정감 있고, 관객에게도 목소리가 끝나고 나면 영화가 시작된다는 게 더 직접적으로 와 닿기 때문에 이제 곧 시작하는구나 하고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되고요.”



국도에서 영화를 볼 때, 항상 영화 시작 전에 우렁찬 목소리로 안내 멘트를 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비로소 제대로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와 함께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 불빛만이 공간을 밝게 비추는 그 모든 순간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올빼미를 볼 때마다 영화 중간 쉬는 시간에 졸음을 떨치기 위해 자주 바깥을 오가곤 했었다.



“국도 하면 ‘올빼미 영화제’가 빠질 수 없죠. 국도의 시그니처와도 같았던 ‘올빼미 영화제’ 프로그램은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요?”

“2008년 크리스마스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극장에서 올나잇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처음 시작되었어요. 파티를 하는 느낌으로 드레스 코드도 맞추고, 포트럭 파티처럼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먹을 음식을 챙겨 오라고 했죠. 밤을 새려면 영화를 세 편 정도 보면 딱 맞겠다는 생각에 영화도 세 편을 준비하고요. 그때 사람이 90명 정도가 왔어요. 사실 사람이 별로 안 모이면 온 사람 몇 명이서 모여 앉아 수건 돌리기나 하자는 얘기를 했는데, 예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수건 돌리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사람이 많이 모인 만큼 음식도 둘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많았고요. 그렇게 사람들과 모여서 맛있는 걸 먹으며 영화를 보다 보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정말 즐거워서 이걸 또 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밤을 새서 영화를 보는 ‘올빼미 영화제’를 진행하게 되었어요.”



맨 처음 ‘올빼미 영화제’를 보았던 때가 떠오른다. 사람들과 옹기종기 상영관에 앉아 영화를 본다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대중교통이 끊기는 밤 열두 시에 시작한 영화 상영은 마지막 세 번째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만원도 채 되지 않는 저렴한 입장료를 내고, 연달아 영화를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나는 올빼미가 끝나고 나면 자청해서 상영관 청소를 도왔다. 너무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주는 국도에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런 나에게 청소가 끝난 후 밥이라도 먹여서 집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국밥을 사주던 국도 스텝들. 난로처럼 훈훈했던 그 기억들은 나중에 내가 <비눗방울 속의 너>라는 제목의 단편소설로 등단했을 때 ‘올빼미 영화제’를 주 배경으로 차용할 만큼 소중하게 남아있다. 올빼미 영화제에서 영화가 한편 씩 끝나고 난 뒤 중간 쉬는 시간에 선물을 걸고 진행되었던 빙고게임도 또렷하다. 국도에 발걸음 한 관객들에게 빙고게임을 통해 선물들을 챙겨주고 싶었던 그의 따뜻함이야말로 올빼미가 국도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수 있었던 힘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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